2012.11.30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를 최근에 읽었다. 이 책은 여러가지를 떠오르게 하고 매우 좋은 책인 동시에 그다지 좋지 않은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읽은 것을 정리해 두고 싶게 하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잘려나간 뿌리의 한계
이 책이 좋지 못한 책이 될 수 있는 것은 저자인 정민의 탓만은 아니다. 그것은 상당부분 우리가 현재 세상을 보는 방식이 우리의 역사에 근거한 것이상으로 식민지시대를 거치고 해방을 맞아 무분별하게 이식된 서양문화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서양화를 배운다면 서양화의 발전사에서 중요했던 과거의 누군가에 대해 더 잘아는 것이 더 많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런 것이 현재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의 기원을 밝혀주기에 당신이 세상을 보는 눈을 더 깊고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당신이 전혀 이질적인 과거의 것을 만난다면 당신은 현재의 당신과 어떻게 그것을 연결시켜야 할지 잘 모른다. 우리는 한국인이지만 한민족의 역사와 단절되어 있고 그래서 조선시대 선비의 이야기와 단절되어 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과학기술은 물론 철학조차도 과거의 우리가 가진 것을 토대로 쌓아 올린 것이라기 보다는 통째로 이식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를 현대 한국인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된 답이 없는 것이다. 표면적 지식이 많다고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많이 아는게 아니다. 깊게, 철학적이고 정서적으로 개인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말한다면 현대의 한국인들은 조선의 사람들을 마치 서양인들이 그들을 만나듯 낯선 사람으로 만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 지식이나 수없이 많은 사극드라마로부터 배운 지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과거를 모른다고 말하는가라고 말한다면 그 드라마를 자세히 보라고 하고 싶다. 그 드라마는 대개 매우 피상적인 것들이다. 나오는 인물들은 매우 평면적이다. 우리는 그들의 진짜 정서를 모른다. 우리는 진짜로 과거를 만난게 몇번 안된다.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조선말엽의 선비들을 통해서 알수 있다. 선비란 무엇인가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은 그저 유학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책에서 소개하는 조선의 선비란 좀 더 살아있다. 그들은 시인이요 음악가고 공학자고 과학자이며 구도자다. 무엇보다 지적 호기심과 감정과 욕망을 가진 인간이다.
홍대용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지인들을 모아서 노상 음악회를 열고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여러사람들이 각자의 악기로 혹은 목소리로 즉석연주에 참여하면서 흥을 돋구웠으며 나중에 보니 그 음악이 가히 천국의 음악이라 스스로 매우 흡족했다는 것을 글로 남기고 그림까지 남겼다. 실제로 얼마나 바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족한 재능을 가지고 쉼없이 노력하여 훌룡한 시인이 되었다는 김득신의 예도 있다. 그는 한때 유행하던 최불암시리즈 농담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저 근엄하고 세상의 이득에 초연한 선비가 아니라 부족한 자기에 대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노력하는 인간으로 그를 소개하고 있다.
이런 과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그들이 살아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조선시대를 별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적어도 과거에 대한 온당한 상상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이 책은 우리를 과거의 선비들과 만나게 하고 따라서 그들과 이어지게 한다. 그런 점에서 좋은 책이지만 그런 점에서 나쁜 책이기도 하다. 그 연결은 당연히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기에 독자들을 혼돈에 빠뜨리고 말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과거의 선비들을 만나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이 불교의 연기설에 근거해 이야기했다는 말이나, 내단을 이루기 위해 수련을 했다는 것등과 만나게 된다. 즉 그들의 윤리, 그들의 철학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삼키기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짧은 소개만으로는 더 그렇다. 홍길주의 글만 이해하려고 해도 책 한권으로 다하지 못할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한국인이면서도 어느새 우리 것에 이방인이된 우리는 당황하고 때로는 너무 서둘러 허황된 선입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스피노자나 흄이나 플라톤을 읽는 것과 다르다. 서양은 자신이 가진 것위에 현재의 것을 건축했는데다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수많은 연결점을 만들었으므로 우리는 보다 안전하게 플라톤이나 케이사르를 읽을수 있다. 마치 그들이 현대의 정치가나 철학자인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그리스사람들이 물이나 불로 세상이 이뤄져있었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수천년전의 인물은 고사하고 오행설이나 이기철학을 말하는 조선시대의 인물도 안전하게 만날수 없다. 우리와의 간격이 조선 말엽의 선비보다 플라톤이나 몽테뉴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문명이 지배하는 세계를 살고 있는 현대 한국인들은 그 서구의 과거인들을 내부적 시선으로 보는 반면 조선 시대의 인물들은 외부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인물들과 만남을 주선하는 책은 그래서 현재시점에서 좋은 책인 동시에 나쁜 책이다. 대부분 그저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나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더 혼란된 정신을 가지게 되거나 반항심에서 역시 유학운운하는 사람들은 모두 싹 쓸어버려야되라는 식의 반발감을 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동서양을 모두 편안하게 포용할 수 있는 시각이 대중화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때문에 동양을 택한 사람은 서양을 허물고 서양을 택한 사람은 동양을 허물어 버린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보면 미친 사람들로 보인다. 이 책의 제목은 미쳐야 미친다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묘한 어감을 준다. 대개의 사람들은 책의 서두에 나온 사람들만 뭔가에 미친 사람들로 생각할테지만 현대한국인의 사고 패러다임에서 보면 우리와 단절되어 있는 조선선비는 모두가 미친 사람들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조선선비의 눈에 현대한국인은 모두가 미친 사람들이다. 우리는 미쳐야 조선선비를 이해할 수 있다. 나쁘게 미치는 것은 조선시대로 퇴행하는 것이고 좋게 미치는 것은 동서양을 모두 다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으로, 지금의 주류적 시각, 대중적 시각을 넘어서는 시각으로 미치는 것이다. 앞의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뒤의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하지않으면 우리는 영영 뿌리없는 인간이 되고 필경 한국문화는 꽃피지 못할것이다.
망한 나라의 선비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한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서자다. 즉 첩의 자식들로 조선시대에는 출세가 제한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세상에 나가지 않고 홀로 자신을 수련한 경우이지 이황이나 이이같은 조선시대 주류 선비들이 아니다. 적어도 끝까지 잘 나가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허균은 역모로 죽임을 당하고 정약용은 오랜 유배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과거에도 이름이 남은 것은 그들이 뭔가에 특출났고 뭔가에 미쳐있었기 때문이다. 불리한 조건에서 그랬으니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거기에는 자연스레 가짜들이 진짜를 밀어내고 진짜를 잊혀지게 하는 더러운 세상에 대한 한탄이 따라나오곤 한다. 그들이 그렇고 그들의 친구며 제자가 그렇다.
그래도 그들은 뭔가를 열심히 했다. 미쳤다고 하는 한가지 이유는 그래서다. 해봐야 아무 소용없을 것같은데 그걸 미친 듯이 하니까 나중에 이름이 남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절로 한숨이 난다. 그들의 사연이 애절한 것도 있지만 그나마 그들처럼 이름이 남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잊혀지고 밀려난 사람들이 또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대개 망해가는 나라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래서 두배로 슬프다. 흥해가는 나라의 아웃사이더라면 적어도 주류가 잘해서 나라가 흥해가고 있으니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참기가 쉽지만 주류가 나라를 망쳐서 망해가고 있는데도 소수파이며 아웃사이더인 사람들은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이것이 그들이 슬픈 사람들인 한가지 이유다.
그들이 슬픈 사람들인 두번째 이유는 그들은 망해가는 나라의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에 뿌리조차 거의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웃사이더라도 열심히 글을 남기고 공부한 것을 남기지만 나라가 망하고 그 후손은 서양의 것을 통째로 들여와서 조상의 것은 공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조선선비가 수학공부를 하는 방식을 참조하는가? 우리가 조선의 과학을 그 연장선상에서 배우는가? 하다못해 한시라도 공부하면서 조상의 한문시를 감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번역된 것이라도 읽는 사람이 얼마 안되거니와 사실 한시는 번역하면 그 의미를 대부분 잃는다. 오늘날의 우리가 사는 방식을 조선의 삶의 방식을 기본으로 하되 그것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평생 하고 싶은 것을 했기에 소수파였던 것은 덜 슬퍼할지 모르나 후세에까지 연결점을 잃게 된 것은 한스러워 할 법하다. 자기가 사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영원히 남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책제목인 미쳐야 미친다는 다시 묘한 느낌을 준다. 미쳐서 그들이 어디에 도달했는가. 나라는 망하고 그들의 피와 땀은 연결점을 만들어 큰 거목으로 자라나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혁명을 했어야 했다. 그러기에는 충분히 미치지 못했던 것인지 모른다. 미치지 못해서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혁명을 하다 죽은 허균이야 말로 제대로 미친자가 아닐까?
미쳤던 것에 후회는 없다.
미쳤다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관점의 문제고 패러다임의 문제다. 크게 성공한 자들은 대개 어떤 의미에서 미친사람들이다. 소수자이고 아웃사이더였던 사람이 자신의 관점을 주류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에서 드문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 사람들도 성공하기 전에는 성공하는 길을 포기하고 저게 무슨 미친짓이래하는 말을 듣기 일쑤였을 것이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이 미쳤던 자였다고 해서 미쳤던 자들이 모두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미치기만 하면 성공한다고 생각해도 오해다. 반대로 미친자들의 역사는 대개 실패로 끝난다. 주류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세상은 결국 그들을 이해해 주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결국 세상에 도달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밀려나고 주류가 되지 못하여 미친 자로 남은 것을 한탄만 할 것은 아니다. 성공이나 실패는 미쳤냐 아니냐처럼 관점의 문제고 패러다임의 문제다. 도박장에서 제일 성공한 사람은 훌룡한 도박사이며 도박하는 것을 싫어하고 도박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도박에 서투른 사람은 실패한 인간이다. 세상 사람 대부분이 도박장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도박을 하지 않는 인간은 언제까지고 실패한 인간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인가. 꼭 그들 기준으로 성공해야 하는가?
잘 나가던 선비였던 정약용은 유배로 모든 것을 잃고서야 자기를 잡았다고 기록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신포도의 이야기처럼 현실에서 성공하지 못한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로만 생각할 수 없다. 세상이 나를 알아줘서 세상에 나아가면 좋은 일이지만 세상에 내가 추구하는 도가 없어서 세상에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어쩔 수없고 좋은 일이다.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미쳐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잡다한 일에서 벗어난 정약용은 결국 당대에 성공했다고 말해지던 다른 사람들보다 후세에 더 많이 기억되는 인간으로 남는다. 죽어서 기억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서 비로소 정약용이라는 정체성을 또렸히 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살린 것이다. 반면에 성공했다고 하면서 세상일에 바쁜 사람들은 자기를 잃고 결국 길게 봐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별 의미도 없는 삶을 산 것이다. 후대에 결국 치사하고 더러운 이름이나 원망을 남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자기 생각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그저 공포와 남의 생각에 떠밀려 살다가 죽은 것이다.
무조건적인 반항이 미덕은 아닐테지만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되는 것조차 무시해가면서 고개를 숙이고 남의 일에 바빠서 살다보면 우리는 결코 미칠 수가 없다. 미쳐야 미친다. 미쳐야 어리석게 태어난 우리의 눈과 귀를 뻥뚫어서 비로소 사람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훗날에 이름이 남는다던가 당대에 크고 작은 이득을 얻는다던가 하는것은 이런 일에 비교하면 사소한 것이다. 스티브잡스가 스탠포드 연설에서 한 말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흔한 말이긴 하지만 우리는 내일 혹은 오늘 우리가 죽는다면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터이다.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는데 남들이 좋다고 하는 뭔가 다른 것을 얻는다고 한들 내일 죽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그렇게 살면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미쳤어.
저자인 정민은 부분부분 마땅히 평가받았어야 하는 사람들이 밀려났던 과거의 현실을, 현재의 현실도 거론 하면서 울분을 표현한다. 그러나 제대로 미쳤던 사람이라면, 그들도 인간이기에 잠시의 서운함은 어쩔 수없을지 모르나 길게 유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내가 추구하는 도가 없으니 그러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게 내가 평가해 주고 싶은 조선 선비의 수준이다.
맺는 말
언젠가 프랑스의 대입시험에 나오는 문제가 매우 철학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 깊은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데카르트의 책을 거론하는 그들의 주관식 시험지를 보면서 단답형 지식을 요구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읽어볼 수 있는데 사실 프랑스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과거시험문제를 보면 이런 점은 훨씬 더 하다. 대학입학시험은 물론 공무원 시험같은 것과도 비교가 안된다. 그야말로 많이 읽었을뿐만 아니라 자기 생각이 없으면 말이 안되는 시험문제다. 우리는 대개 과거 시험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막연히 그걸 요즘의 대학입시문제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과거 시험의 내용은 잘 주목하지 않고 고작 조선시대의 시험에 부정이 많았다더라 같은 것만 이야기한다.
유관순이 3.1운동에 참여하고 재판받아 사망했던 때의 나이는 17살이다. 김구가 동학혁명을 지휘하던 때의 나이는 18살이다. 서재필이 1884년 김옥균, 홍영식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병조참판겸 정령관이 되었을때의 나이가 18살이다. 우리는 오늘날 점점 작아져만 가고 있다. 명문대를 나오면 더 작아지는 것같다. 서울대를 나와서 나라의 지도자 다운 지도자가 된 인물이 없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고졸이다. 이것은 우리 교육에서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과거와 단절되어 있고 그것을 잇기가 쉽지 않다. 위험하기 조차하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조선시대의 사람들을 알고 싶다. 우리가 부족한 것, 가지고 있었지만 소중한지 모르고 통째로 다 던져버린 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들이 우리의 토대다. 우리안의 그 토대로 가는 길이 끊어져 있다고 해도 말이다. 길은 결국 전통의 발전적 계승밖에 없다. 자기를 잃고서 크게 이룰 수가 없다. 그러기에 이 책은 소중한 책들 중의 하나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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