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바지니의 빅퀘스천이란 책을 읽었다. 바지니는 이책에서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주로 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서문과 결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가 인생의 의미는 이것이다라는 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질문을 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흔히들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떤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는가를 개념을 정리해 나가면서 하나하나 풀어가고 있다.
삶의 의미를 묻는 기본적 문제점
삶의 의미를 묻는 기본적인 문제점은 근래에 이윤의 굿바이 카뮈라는 책의 독후감 (http://blog.daum.net/irepublic/7888316) 에서 무한의 저주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바있는 것으로 바로 이 세상과 시간의 무한성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영화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기에 우리는 그 안의 어떤 것들에 대해 의미를 논할수 있다. 새옹지마의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하나의 이야기가 끝없이 계속될때 우리는 어떤 것의 의미가 계속 달라지는 것을보게 된다.
무한성이 우리가 의미를 따지는데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예를 들어 이런 대화를 생각해 보자.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왜?
돈을 많이 벌어서 큰 집을 사고 싶어.
왜?
그 집에서 아내와 같이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
왜?
이런 식으로 질문은 끝없이 이어질수 있다. 결국 우리가 어딘가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즉 어떤 것은 그냥 당연히 좋은것이지 라고 생각해 버리지 않는다면 뭐가를 좋다고 말하는 근거, 뭔가의 의미는 끝없이 나아가는 질문속에서 애매해 지게 된다.
이럴때 우리는 저런 황당한 질문을 왜 계속해나가는가, 그냥 어떤 것은 원래 그렇지 않은가라고 말해버리고 말 수 있지만 어떤 것이 그냥 원래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고민할 거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삶의 문제는 항상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의심할 필요없이 확고한 사고와 삶의 기반을 발견하는 일이 가능했다면 인류는 이미 분명한 삶의 의미를 알고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와 같은 큰 질문을 던질때 우리는 이 무한의 저주를 피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신과 같은 존재를 등장시키거나 행복은 그자체로 원인이 없이 그냥 좋은것이라는 주장을 등장시켜 이 무한의 저주를 피해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대개 실패하고 만다고 할수 있다.
신앙의 문제.
바지니는 신앙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하지만 특히 신앙에 대한 명쾌한 문제점을 하나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신을 믿고 따름으로서 인생의 의미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해도 실은 해결된 문제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바로 신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신이란 돌맹이나 나무처럼 명백히 우리앞에 서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을 믿기로 한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의 목소리가 정말 신의 목소리인지 악마의 목소리인지를 확신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이 뜻하시는 바대로 사는 것이 옳다고 해도 어떻게 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확실하게 들을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우리를 문제의 거의 처음으로 돌려보내고 만다. 즉 우리의 삶의 의미를 신이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들을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신의 목소리를 잘 듣기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무신론자들이 생각하는 성실한 삶, 감수성과 영감이 있는 삶과는 다른 것일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처음의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무한의 저주에 대한 해결책
무한의 저주에서 풀려나는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뭐가 해결책이 안되는가를 분명히 지적할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뭔가를 알거나 얻음으로써 삶의 목적을 달성하고 삶의 의미를 완성할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야기가 무한히 계속 되기 때문에 즉 영화처럼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무한의 저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산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곳에서 우리가 사진을 찍었다고 해보자. 사진은 분명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 즉 영화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진안에서 봉우리와 계곡을 파악하고 어떤 것이 전체 그림에서 어떤 위치를 가졌는가를 이해할수 있다. 우리가 그 사진안에서 최고봉을 오르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업적이 될것이고 가장 낮은 봉우리를 오르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닐수 있다.
그런데 실제의 세상은 말하자면 끝이없는 산맥이다. 우리가 사진안에서 최고봉이라고 생각한것은 더 큰 그림안에서는 그야말로 구덩이에 가까운 것이 될수 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사진의 테두리를 더더 늘려갈수록 끝없이 변한다. 위와 아래라는 개념은 지구가 몽땅다 그 사진안으로 들어오면 무의미해 진다. 이런 과정은 끝이 없어서 사진의 테두리를 아무리 넓혀도 우리는 항상 더 큰 그림을 보게 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수가 된다던가 부자가 된다던가 어떤 여자와 결혼한다던가 하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파악한다고 할때 우리는 항상 더 큰 시각으로 보았을때 그 모든 노력은 헛되고 심지어 해로운 일이 될수도 있는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좋은 장인이 되기위해 노력한 한 기술자가 나중에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만든 기계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된다는 것을 깨달을때 그의 인생의 의미는 뒤짚혀지지 않겠는가? 좋은 직원이 되기위해 노력한 셀러리맨이 그가 부자로 만들어준 재벌회사가 무한히 많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회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을수 있다. 평생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 공부한 철학자가 늙어 죽을때가 되어 사실은 그냥 여행을 더 많이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식키우고 사랑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쓸것을 하고 후회하게 될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의 저주를 깨달을 때 우리는 삶은 부조리하다고 말하는 까뮈의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무한의 저주를 빠져나올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바로 우리의 삶을 하나의 과정이나 상태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전체 그림안에서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을 중단하고 지금 서있는 곳에서 앞으로 갈것인가 뒤로 갈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그리기로 말하자면 전체를 보고 내가 지금 그리는 부분의 의미를 생각해서 그리기를 포기하고 그냥 지금 당장 내 위치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해나가는 과정을 삶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삶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에게 뭘 던지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행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지니의 책은 서두에서 무한의 저주문제를 설명한 다음 삶이 어떤 목적을 이루는 과정으로 파악할수 없으며 그보다 상위의 어떤 원칙을 이뤄나가는 과정으로밖에 볼수 없다고 제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삶의 의미를 남을 돕는 이타주의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타주의 이외에도 쾌락이라던가 성공이라던가 행복이라던가 하는 여러가지 것들을 실천해 나가는 과정을 나열하면서 그것들을 최종적 답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그런 것들을 답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왜 헛점이 있는가를 지적한다. 즉 삶의 과정이나 상태지만 보통 사람들이 답이라고 말하는 그런 것이라고 믿기에는 그런 믿음에는 헛점이 많다는 것이다.
바지니의 답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바지니의 답은 무엇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바지니는 서두에서도 결말에서도 자신이 그 답을 말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며 스스로도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하나의 답을 의식중에, 무의식중에 실천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이것이 답이야라고 생각하는 답들을 가져다가 모두 분쇄하고 있는 그의 행동자체다. 그는 무한의 저주에 대해 설명하는 앞의 몇장을 제외하면 책의 절반이상을 써서 왜 이런저런 생각은 문제가 있는가, 답이 아닌가를 논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말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모른다는 것이다. 삶의 예측불가능성이다. 말하자면 삶의 무한성과 예측불가능성이 삶의 의미를 논하는데 있어서 핵심문제이며 동시에 답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바지니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 허무주의는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빠지는게 아니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빠지는 것이다. 이러저러하게 해봐야 소용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미래는 이러저러하고 이 세상은 이러저러하므로 이러저러한 것은 의미가 없다라고 단언하고 자신이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답이 아니다라는 것을 논하는 그의 목록들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삶을 하나의 과정으로 볼때 그 과정의 본질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가정이 책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즉 삶이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이라던가 삶이 그때 그때의 순간에 충실해 나가는 과정이라던가 하는 주장은 삶은 이러저러한 과정이다라는 답들로 그 과정자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특징은 기본적으로 이런 답들이 왜 모두 한계를 가지는가에 대한 근원적 문제점들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이라는 것을 고정된 하나의 관념에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삶을 하나의 성장하는 생명과정으로 파악할때 우리는 어떤 하나의 특징을 가지는 변화하지 않는 과정을 가지게 되는것은 아니다. 어린애가 커져서 청소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될때 우리는 과연 같은 것을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그러는게 자연스럽고 옳은 일일까. 나비와 고양이와 새와 인간은 모두 같은 삶의 의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인간이 있는데 그냥 인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질수 있을까? 이책에서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약하게 나타난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실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삶은 과정인데 무슨 과정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생명으로 파악하고 생명이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가운데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을 진전시킬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것은 나의 삶의 의미론이지 바지니의 주장은 아니므로 여기서 더 진행할 수는 없겠다.
맺는 말
이 책의 미덕은 그 간결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더더 많은 내용을 가지고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는 책이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혼동에 대한 질문들을 따라 읽는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도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63빌딩은 서울에 있는데 누군가가 그건 대전에 있다면서 대전의 어디에 있을까를 계속 고민한다면 그 고민의 세부사항은 사실 모두 쓸데없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삶에 대한 고민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의 머리가 명쾌하게 정리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바지니는 그런 군더더기를 거의 남기지 않고 짧은 글속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좋은 대화상대라고 나는 느꼈다. 책의 후반부는 전반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약간 지루한면도 있지만 그것은 틈틈히 재미삼아 읽을수 있는 것이며 책의 전반부는 매우 명쾌하다. 전반적으로 그는 매우 즐겁게 대화할수 있는 대화상대이며 딱딱한 개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아니다. 이 책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읽어볼만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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