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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이윤의 굿바이 카뮈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2. 4. 30.

삶의 의미라는 주제에 대한 책들을 펴낸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책들을 보내주었다. 그래서 그중 한권인 이윤의 굿바이 카뮈를 읽고 소감을 남긴다.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큰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저자는 매우 중요한 부분들에서 비약을 하는 느낌이며 그렇게 해서 얻어낸 메세지도 그다지 힘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저자는 인생의 의미는 객관적 가치가 있는 일을 골라서 주관적 가치를 느끼며 사는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내맘에 그리들지는 않지만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것이므로 여기에 독후감을 남기기로 한다.






책을 받고 나서 사실 한편으로는 좀 난감했다. 나는 삶의 의미는 물어서는 안되는 질문이라는 결론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에 삶의 의미를 묻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그럴수 밖에 없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이 책을 읽기를 흥미롭게 하는 이유였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는 사람의 의견에서 배울게 많을수 있기 때문이며 삶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들을 소개받는 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면서 삶의 의미를 물어서는 안된다 혹은 물을 수 없다는 내 생각을 재확인 했을 뿐이다. 그것도 더욱 강하게. 저자처럼 표현하는것도 가능은 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리 큰 확신은 들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물어서는 안되는 이유


그럼 왜 삶의 의미는 물어서는 안되는가.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지 말아야 하는 이유 혹은 물을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무한의 세계 혹은 우리의 인지영역을 넘어선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계에는 항상 우리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성이 있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한다. 미래를 모르고 우리가 아는 우주 바깥도 있다. 이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삶이란 이야기는 항상 끝이 없다는 이야기다. 


의미란 것은 항상 어떤 이야기 구조를 말한다. 우리집에서 나의 의미라는것은 우리 가족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온다. 이야기나 의미나 관계나 다 그게 그건데 이야기라고 하면 왜 삶의 의미라는 말이 문제가 되는가를 쉽게 이해할수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 결말부분을 잘라버리는 상상을 해본적이 있는지. 예를 들어 백설공주에서 공주가 사과를 먹고 쓰러지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끝내버리는 것이다. 그랬을때와 이야기를 끝까지를 들었을때 우리는 백설공주의 여러행동이 가지는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수 밖에 없다.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도 있는데 그래서 새옹지마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한 청년이 말때문에 다리 불구가 되면 그것은 불행이지만 전쟁이 났는데 다른 청년들은 징집되서 죽었고 그 청년만 불구라서 전쟁에 안나가고 살았다면 그것은 아주 행복한 사건이 된다. 어떤 사건의 의미는 이야기가 계속되면 언제든 변할 가능성이 있다. 


이야기는 사실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죽어도 그렇다. 내가 평생 무명으로 살았지만 내 블로그의 글이 고전으로 남아 천년뒤에 제2의 소크라테스로 숭상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걸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내 삶의 의미는 이런 차원에서 보면 영구히 끝나지 않고 바뀌는 것이다. 


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조망해 보다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기 쉽다. 어차피 죽어 티끌이 되고말 인생인데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가능성으로 보면 그쪽이 훨씬 크니까. 바로 저자인 이윤이 거듭해서 카뮈를 통해 인생의 부조리함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말이다. 삶이란 그저 계속 반복되거나 무한한 우주나 역사에서 보았을때 티끌같은 의미도 없는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삶의 의미를 묻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걸 묻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무한의 저주를 푸는 자신의 방법을 소개한다.


무한의 저주에서 풀려나는 방법 한가지.


저자가 어떤 방법을 소개하는가를 말하기 전에 한가지 다른 방법을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무한의 우주, 세상속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이야기속에 인생의 의미를 잃어가는 무한의 저주를 푸는 가장 유명한 방법 하나는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다. 이야기를 끝내는 방법은 바로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를 등장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신이 없으면 인생의 의미가 존재할수 없다고 말하고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무한의 저주를 끝내고 모든 것은 신에게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삶의 의미는 바로 그 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종교적 해법이다. 


무한의 저주에서 풀려나는 저자의 방법


저자의 방법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한쪽을 쳐다보면 어지러우니 그냥 가진거나 쳐다보면서 살라는 것이다. 무한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왜소함, 무의미함을 느끼지 말고 이 세상에서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말해지는 것중에 하나를 골라서 주관적으로 가치를 느끼며 살라는 것이 저자의 방법이다. 행복은 주관적이지만 객관적 가치를 같이 추구하지 않으면 골방에서 이상한 짓을 하면서 사는것도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의 저주는 계속된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은 답이 될수 없으며 따라서 다시 허무주의로 가거나 어떤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살게 되기 쉽지 않을까한다. 객관과 주관적 가치를 나누는 기준은 원래 애매할수밖에 없기도 하다. 저자는 행복은 결국 주관이라는 결론을 좀 더 세련되게 만들었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장식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


무한의 저주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책에서 말하는정도로 피하는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결국 별 근거없이 유한한 자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고 말하는것과 차이가 별로 없다고 느껴진다. 


뭐뭐 해야 한다는 당위와 뭐뭐 하는것이 옳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렇게 살아야지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그렇게 살수있다면 인생의 의미때문에 고민도 잘안할 것이다. 


핵심은 우리의 무지가 아닐까


나는 무한의 저주에서 풀려날수 있는 비종교적인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시지프스의 신화식으로 말하자면 비록 돌을 밀어올렸다가 돌이 떨어지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더라도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무조건 확신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는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시지프스의 신화는 인생에 대한 비유로는 옳지 않다. 시지프스의 신화는 인생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우리가 다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시지프스의 삶은 단순하니까. 실제 인생이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세계도 미래도 알지 못한다. 알지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최종적 의미도 알수가 없으며 따라서 인생의 의미를 묻는것은 무의미하다. 왜냐면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말하자면 바다에 사는 한마디 플랑크톤이나 마찬가지다. 이 플랑크톤도 오래오래 살다보면 진화하여 고래가 되거나 해서 큰 바다를 두루 돌아다닐날도 올지 모르지만 그건 모른다. 우리는 바다가 어떤 곳인지 얼마나 넓은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 삶의 의미따위는 알수가 없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자체가 사실 우리가 전체를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의 냄새가 난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플랑크톤인지 고래인지도 모른다. 바다도 모르고 누가 있는지 남도 다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도 허무주의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현재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그렇지 않다. 즉 우리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누군지는 모른다. 우리는 계속 변해갈것이다. 미래는 알수 없다. 우리가 뭐뭐뭐라고 단정짓는 것은 미래도 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현재를 잊지 않기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우리가 가지는 욕망을 느낄수가 있다. 그러니 그대로 살면 되는것이다.


다리가 부러진 청년은 이제 내인생은 끝났다. 다리도 한쪽 없는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절망할수 있다. 저자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조언이 나올것이다. 다리 가진 사람들도 있고 아예 호나우두 같은 유명축구선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 부러워하지말고 가진것에 만족하면서  더 노력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자고 하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내조언은 이렇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사실 전혀 모른다. 인생의 의미따위 알수 없다. 자기가 다리가 없는 인간이란 것을 비하하지도 자랑할것도 없다.그건그저 객관적 현실이니까. 객관적 현실 자체는 의미가 없다. 또 객관적인 가치든 뭐든 남들이 좋아할 만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할것도 없다. 다만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지금 가고 싶은곳으로 가라. 미래는 모르는 것이다. 좋은 일도 있을수 있다. 중요한건 앞으로 나쁜일만 있다고 해도 당신이 할수 있는건 지금서있는 자리에서 어느쪽으로든 한걸음 가는것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맺는말


결국 인생의 의미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중요한건 행동하는 것이다. 사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는 사실 하나다. 지금 이순간 나는 뭘 할것인가. 여기서 종종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모르면 행동할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흐름은 우리가 세계의 무한성때문에 인생의 확실한 의미를 영구히 알아낼수 없다는 사실에서 좌초하고 결국 인생을 못살게 되게 만든다. 살아도 어떤 머릿속의 이념이나 인위적으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가치를 쫒으려고 하기 쉽다. 안그렇게하려고 해도 의미를 묻고 따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종종 추천되지만 그렇게 하는것이 종종 마음의 소리를 가려버리기도 한다. 먹고 싶은게 있으면 먹는 것이고 사랑에 빠졌으면 그 사랑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 먹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따지고 있으면 결국 산다는 건 점점 더 힘들어만 지지 않을까. 내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긍정적으로 나오면 자기에 대한 과대망상이 되기 쉽고 부정적으로 나오면 허무주의가 되기 쉽다. 


이렇게 하라는 것이 쾌락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쾌락과 욕망을 구분한다. 쾌락은 현실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만들어 내는것으로 바로 우리의 그 생각하기, 의미주기가 만들어 낸 환상의 산물이다. 자기를 알고 있는 평온한 마음이 욕망을 보이면 그것을 하는것. 그것이 옳지 않을까. 


매순간 다른걸 원하는 일관성없는 삶을 살게 되면 어쩌냐고 할수도 있다. 자기를 알고 있다면 그 자기는 변하가지만 매순간 완전히 다른 내가 되는게 아니다. 왜 어느정도의 일관성이 없겠는가. 억지로 만든 일관성은 이데올로기,선입견의 노예가 되는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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