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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게이샤의 추억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1. 12. 24.

2011.12.24

 

아서 골든의 게이샤의 추억은 한 게이샤가 자신의 삶을 회고한 이야기를 미국교수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띈 소설이다. 이 책은 3류소설적 재미가 있으며 당연히 일본문화 특히 게이샤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전해 주는 책이다. 

 

굳이 3류소설적 재미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게이샤의 추억이 왜 3류소설이 아닌가를 말하기 위함이다. 전체적인 형식으로 보아 이 책은 통속적 러브스토리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기대하는 대로 일본문화에 대한 소개서라고 봐도 그다지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런 당연하다면 당연한 시각을 가지고 이 책을 본다면 이 책은 단순한 3류소설이나 일본문화에 대한 부정확한 소개서가 되고 말기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게이샤가 게이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게이샤의 삶과 윤리를 긍정하는 형식을 띄게 되고 그러한 점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이 책을 끔찍한 책으로 여기게 만들지도 모른다. 아내가 있는 다른 남자의 정부가 되는 게 가장 큰 성공인 게이샤의 삶을 긍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마치 살인자집단에서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찬양하는 견해처럼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문화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 소개라는 것이 가능할런지도 의문이거니와 이 책은 서양인이 동양문화를 보면서 미화하거나 폄하하고 자기멋대로 평가하는 악덕을 저지르는 것을 결코 피하고 있지 않다. 아니 애초에 그런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양사람이 한국의 선불교를 보고 선불교는 이런 것이다라고 줄줄이 이해하기 쉽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상황같은 것이랄까. 그 설명이 제 아무리 훌룡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사람에게는 선불교자체를 모독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선불교를 선불교보다 더 작은 어떤 것으로 줄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단편적 사실들이며 따라서 비록 일본사람은 아니지만 서양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한국인이 볼 때도 서양인이 본 일본사회라는 것은 그 배경이나 문맥에서 어떤 중요한 점들을 간과한 견해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문화소개서로 읽을때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대해 불평하게되고 무조건 찬탄만 할 수는 없다.

 

 

 

 

이 책을 그런 단순한 낭만적 사랑이야기나 관음적 본능을 자극하는 3류소설이상으로 만드는 것, 그저 그런 흥미본위의 문화소개서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므로 이 책의 진정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문화적 충격이다.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하나의 세계로 뛰어들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가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주제이며 이 책을 단순한 3류소설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다. 

 

저자는 이와 같은 것을 많은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설속에는 게이샤 사유리 (어릴적 이름은 치요)의 기억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서문을 단 사람자체가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는 언급이 있으며 사유리는 게이샤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와 40여년을 살다가 죽은 여자로 설정된다. 즉 두 문화를 경험했기에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앉아서 생을 마감하는 게이샤가 게이샤의 삶을 일본어로 일본 대중에게 설명한다면 그것은 미국인에게 게이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 된다. 그런데 미국인에게 게이샤를 설명하자면 미국인을 알아야 게이샤를 설명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이 뭘 모르는지 뭘 아는지 하나의 단어가 어떤 효과를 듣는 사람에게 주는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던져지는 설명은 그 핵심을 놓치게 만들고 오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치요는 가난한 어촌에서 태어나 교토의 게이샤거리로 팔려온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겪는 것은 무지와 불확실성이다. 즉 9살나이의 그녀는 자신이 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채 교토로 오게되는 것이다. 글자도 모르는 가난한 집의 자식인 치요에게 교토는 사실 외국이나 마찬가지로 낯선 곳이다. 하물며 게이샤의 세계란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던 세계였다. 그녀는 사실 넝마이외엔 입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런 어린아이인 치요가 게이샤 거리에 던져진다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처음으로 외국사회를 경험하는 것과는 비할 수없는 문화적 충격을 준다. 그녀는 모든 일에 있어서 뭐가 옳은지, 뭘 할것을 기대되는지 알 수가 없다. 

 

생의 마지막에 있는 치요는 물론 어릴적 그녀가 처한 상황을 제3자적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린 치요는 무지한 상황속에서 뭘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선택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입장이다. 그녀는 하츠모모라는 게이샤가 자기에게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구는지, 게이샤의 집에서 탈출하려다가 실패한 어린 아이가 어떤 댓가를 치루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이 책은 그 구조상 나이든 치요가 어린 치요의 삶을 번역하는 이야기라고 봐야 할것이다. 회고란 역사의 기술이 그러한 것처럼 단순히 있는 사실을 그대로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 알게 된 사실에 근거하여 사실을 선택하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그 삶을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겪은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는 세계가 회고를 통해 창조된다. 이 책에서 이렇게 다른 세계의 접촉이 끝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세계 안에 있을때 우리는 곧 그 세계에 적응하게 되고 세계간의 충돌이나 변화가 있을때만 볼 수 있는 것을, 적어도 그때처럼 생생한 느낌을 가지고 보지 못하게 된다. 

 

치요는 탈출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녀가 교토로 온지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러가지 일을 통해 늘어난 빚이며 사람들의 불신때문에 그녀는 살아도 사는게 아니었다. 초등학생나이의 치요가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그녀에게 설명되어진 것들은 그녀가 평생을 하녀로 일해도 그녀의 빚은 갚을수 없다는 사실, 게이샤의 집에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하츠모모가 그녀를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목적과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뭘 하면 좋을지, 뭐가 가능한건지 도대체 뭘 잘못한건지 치요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강변에서 울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회장을 만난다. 회장을 만나고 나서 치요는 자기의 삶에 한줄기 방향을 보게 되고 그것을 따른다. 그것은 바로 회장을 지향하는 것이다. 

 

어린 여자애가 부자집 남자를 동경한다는 이야기는 어떤 문맥에서는 그저 유치하거나 권할만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의 핵심은 회장이 아니다. 그 핵심은 암흑같은 무지와 불확실성안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있던 한 아이가 이 세상에서 한줄기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언니에게도 버림받은 치요가 어떤 좋은 것, 양질의 것, 따뜻한 것, 행복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게이샤가 되겠다고 노력하겠다고 하게 만든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여러가지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녀가 어떤 것을 느끼게 되자 많은 것들이 어떤 징조와 계시처럼 보이게 되며 일들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녀가 그것을 보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소설의 말미에서 들어나듯이 그 만남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즉 그녀가 좋은 것을 향해 노력한 것이상으로 그녀가 도달하려고 하는 세상도 그녀를 부르고 있었달까.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계속 좌절하게 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영화는 이 소설의 미덕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3류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물론 그 책을 소개하는 이 글도 그 점을 다 표현할수는 없다. 이렇게 짧게 이거다라고 쓰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3류소설 이야기가 되고 만다. 

 

저자 아서 골든은 일본예술을 전공해서 하버드를 졸업하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일본 역사로 석사를 받는다. 그후 중국을 여행하고 일본에서 잡지사 근무를 하면서 산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이 책을 집필한다. 이렇게 그 자신이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 것들이 이 책을 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생각하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리고 내 스스로도 그런 말을 할때마다 그 말이 나자신에게도 던져지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러저러한 일을 선택하게 되는가. 이러저러한 일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잘 쓴 소설을 읽는 큰 미덕중의 하나는 어떤 보편성을 가진 상황이 주어지고 그 안에서 고뇌하고 발버둥치는 주인공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게이샤가 될 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게이샤의 고민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다른 문화, 다른 세계, 성장의 다른 단계를 거치면서 빠지게 되는 심리적 상태에는 보편성이 있으며 그 보편성안에서 우리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러한 점을 잘 표현했다는 점이 게이샤의 추억에게 단순한 3류소설을 넘어서게하는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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