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26
나는 함석헌이 번역한 간디자서전을 좋아했다. 그러나 역시 젊었을때 읽었던 간디란 고작해야 아 남을 위해 사신 참 위대하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것 같다. 나이들어서 간디자서전을 읽어보니 이젠 위대한 간디대신 인간 간디가 조금 보인다. 그리고 인간간디가 보인다는 점에서 그는 더욱 좋아할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그가 완벽하지 못했다던가, 그가 어떤 판단착오를 저질렀다던가 하는 점에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그는 신이 아니다라는 식의 비판을 하고 있다. 그의 자서전은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여러번 말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그의 자서전은 나는 그저 진리 혹은 신에게 다가가고픈 한명의 구도자일뿐이다라는 말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의 이름도 나의 진리실험이야기이며 결코 내가 찾은 진리따위가 아니다. 실험이라는 것은 성공했다거나 찾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는 이렇게 해봤더니 이렇더라 라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간디를 보면 간디는 더욱 친근하고 더욱 위대해 보이는 것이다.
간디 자서전을 보면 상당부분이 그가 몸을 단련한 이야기, 그가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채식주의자 간디는 단순히 고기를 먹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검소한 채식과 가지지 않는 삶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를 고민했던 사람인 것이다.
천대받는 식민지국민으로 태어난 간디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그는 그저 변호사 자격증을 따서 고국으로 돌아와 편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속에서 그는 기독교, 신지학회등과 접촉하고 인도와는 다른 영국의 삶을 체험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 자신의 종교인 힌두교나 그 밖의 종교등에도 눈을 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남을 보았기에 자기를 발견하는 길을 시작한 것이다. 종교적 질문의 핵심은 물론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한 다른 민족, 다른 나라의 해법이랄 수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해 듣고 전도 받으면서 그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책도 읽고 도대체 진리란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물론 그것에는 거대한 제국에 비해 초라한 인도인이었던 그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했던 환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촌놈으로 비웃음받고, 여성과의 접촉에서 유혹을 받으며, 그의 가족 종교가 금하는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력한 비판과 유혹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자서전을 실험이야기라고 말하듯 그는 독단적으로 어떤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않고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다. 그는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위선적이지 않고 일관되기를 원한다. 그는 쉽게 제국통치에 대해 적의에 불타오르지도 않고 또한 쉽사리 자신을 인도인과 분리해서 다른 인간으로 생각하고 영국이나 서양찬양론자로 변하지도 않는다. 그는 끝없이 질문하고 탐색할 뿐이다. 도대체 이건 뭔가. 뭐가 옳은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의 일생은 이와 같은 내적 질문에 대한 탐색으로 일관되어져있다. 그의 외적인 삶이 제 아무리 거대한 스케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 자신이 노력하고 이루려고 했던 목표자체라기 보다는 그저 내적인 고민과 성과가 외적인 환경과 만나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을 대표해서 싸우게 된 것 그리고 인도로 돌아와 인도 민중을 위해 싸우고 결국 독립을 성취하게 된 것도 모두 목표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내적인 투쟁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여러번 그저 산중에서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난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꿈을 꾼다.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평범한 간호병사로 자원을 하기도 했고 하찮은 서기일을 하거나 화장실청소를 하는 것에 꺼리낌이 없었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절제된 삶을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감옥에 가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매우 적게 먹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옷조차도 최소한의 것을 가지는 절제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 앉아있는 것이 밖에 있는 것과 그다지 차이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자기가 꼭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자기안에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외적인 환경변화도 그를 낙담하게 할 수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자긍심과 행복은 그의 지위나 돈이나 명성이나 집같은 소유물에 딸린 것이 아니라 그의 내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데 익숙하다고 말한다. 안정된 것을 버리고 불확실한 삶으로 뛰어들 때 그에게도 잠시간 두려움이 있을지 모르나 그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기에 그런 삶에 금방 자신을 적응시키고는 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두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비폭력운동이고 또하나는 인도인 혹은 세상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그는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독립이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독립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비폭력운동을 통해 생각하는 독립이란 도덕적 주체성의 확립이다. 진정한 독립은 내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침략자나 지배자를 힘으로 몰아내고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그에게는 독립으로 여겨질 수가 없었다. 침략자의 도덕적 독립 혹은 정신적 가치적 독립이 무너진다면 침략자는 더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물러갈 것이며 우리의 정신적 가치적 독립이 무너진다면 설사 침략자가 물러간다고 해도 우리는 스스로 무너져서 남의 지배를 구걸하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영국의 법안에 항의하던 전국적 시위가 벌어지던 가운데 영국 경찰이 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간디는 이번에는 이 막을 수 없어 보이던 시위를 단식투쟁으로 막는다. 만약 비폭력으로 성공할 수 없다면 시위가 계속되어 이루는 어떤 성공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도의 도덕적 정체성을 보이고 도덕적 우위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인도가 서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우고 있는 인도는 법조문위의 인도나 지도위의 물체로 존재하는 인도라기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부끄럼과 책임감을 아는 도덕적인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인도였다.
그 길은 당연히 외적인 투쟁보다 내적인 투쟁을 더 심하게 요구한다. 영국의 압제와 싸우는 것보다 인도인들을 만나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일이 훨씬 더 힘들고 느리다. 온세상이 영국인은 신사고 인도인이 야만인이라고 할 때 그는 오히려 영국인들이 야만적이고 인도인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자제하는, 합리적 윤리적 인간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그는 인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그가 이렇게 인도의 정신, 인도의 윤리, 부끄럼을 아는 인도인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결국 인도란 인도의 가치와 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동체 정신이 없는데 공동체가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그의 삶이 종교인내지 구도인으로서의 투쟁으로 채워진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부각되는 면일지 모른다. 이것은 반드시 국가에 대한 것도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우리에게도 세상은 이런 저런 것을 강제하고 유혹을 던진다. 이럴 때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진짜 싸움은 내적인 것이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을 낼수 없다면 외적인 영향이 약해도 우리는 그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나 뭔가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이 길은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그는 더럽고 비도덕적인 인도인들때문에 거듭해서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외부의 적에 대항해 싸울 때는 단결력을 보여주던 인도인들은 다시 안을 향해 투쟁을 시작하면 그다지 청결하지도 않고 질서의식도 없고 결국 이기적이며 여러가지 종교와 관습으로 산산히 흩어만 지려고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간디의 길은 싸우고 분리하고 나누는 길이 아니라 합치고 이어붙이는 융합의 길이다. 그는 항상 싸우고자 하는 상대에 대한 사랑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천한다. 공장주와 노동자의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가 비록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동정적이며 공장주의 욕심을 한심스럽게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사악한 공장주를 패퇴시키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하지 않았다. 하나의 사악한 공장주가 사라지면 다음 번 공장주가 나타날 뿐이다. 그는 실상 모든 인간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공장주도 노동자도 모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부패한 관리를 고발해서 그를 사직시킨 일이 있었다. 훗날 정부에서는 그 부패한 관리의 재취업에 관해서 간디에게 물었다고 한다. 간디는 그걸 허락한다. 그에게 있어서 죄와 사람은 각각의 것이며 간디가 비폭력저항을 통해 성취하려는 것은 사랑을 통한 융합이지 어떤 사람들을 악으로 지목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간디의 삶은 영화로도 나와있다. 이 영화 간디를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간디가 구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인도사람들이 염전을 점령하러 간 장면이었다. 이 염전은 영국인들이 독점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걸 지키는 부대는 총도 없이 뭉둥이뿐인데다가 숫자도 얼마되지 않았다. 숫자로 밀어부치면 염전을 탈취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인도사람들은 간디를 생각하면서 비폭력저항의 원칙을 지키자면서 그 몽둥이를 든 부대앞에 줄선다. 그리고는 차례차례 줄지어 나아가 몽둥이에 맞고 쓰러진다. 여자들은 부상자를 끌어내고 사람들은 다시 한줄 한줄 나아가 몽둥이에 맞고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본 영국기자는 본국으로 전신을 보내면서 영국은 패배했다고 외친다.
결국 영국은 인도에서 손을 들고 물러난다. 하지만 역시 가장 어려운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엇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인디아로 각자 독립한다. 힌두와 무슬림세력이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인이 가고 없는 인도에서 종교분쟁으로 사람들이 충돌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외적앞에서는 비폭력이었던 사람들이 금방 핏빛눈으로 동포를 죽이는 항쟁이 벌어졌다. 간디는 그 폭력을 보면서 그는 죽을때까지 단식하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누구도 막을 수 없어보였던 그 항쟁은 멈추게되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간디는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분리를 원하지 않던 간디를 모두가 좋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만큼까지 읽으면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역사,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물리적으로 독립이 성취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독립이었는가. 우리는 과연 정신적인 면에서 점점 더 깊어지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덕성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가. 물론 우리에게도 위대한 역사가 있다. 광화문을 가득채운 촛불집회 같은 것이 그것이다. 문제는 그런 힘이 한국을 움직이는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론적으로 정리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말하는 투쟁은 대개 사람과 사람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같이 말이다. 그리고 이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것은 저 반대편쪽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이렇게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생각한다. 사악한 0.1%의 인간들만 없어지면 우리는 좋은 세상 살 수 있을 것이다라던가, 종북주의 빨갱이나 극보수성향의 정신나간 노인들만 없어지면 좋은 세상 온다던가.
이런 주장이 100%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작건 크건 어떤 진실들이 사람들의 말과 인식안에는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충분히 옳은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결국 분노와 미움으로 끝없이 분열하고 자멸하는 이데올로기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모두를 합치는 사고가 있어야 소모적인 싸움이 멈추고 악이 머물 곳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일이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말한마디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민과 공부 그리고 실천이 필요하다. 간디는 구도적 삶, 실천의 삶을 통해 이게 다 가능한데 왜 안된다고만 하는가라고 웅변한다. 실천만 한게 아니라 끝없이 진리를 고민한다. 월급이나 취직이나 명성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세상을 나누는 구분, 차별에 대한 생각과 이해가 필요하고 실천이 필요하다. 간디는 평생 틈날때 마다 바가바드기타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은 이렇게 말한다. 진리로 가는 길에는 이론의 길이 있고 실천의 길이 있다. 그 두 길은 모두 같은 것이지만 실천의 길이 더욱 권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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