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8.15
닐 포스트만은 뉴욕대학의 교수였으며 죽도록 즐기기라는 책을 쓴 매체전문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전에 유년기의 상실이라는 책을 읽고 그가 통찰력이 있으며 재미있게 글을 쓰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 http://blog.daum.net/irepublic/7887766 ) 이번 주말에는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그의 또 다른 책, 교육의 종말을 읽었기에 그 인상이 사라지기전에 몇자 소감을 쓸까 한다.
그가 죽기 얼마전에 쓴 이 책에서 포스트만은 많은 사람들이 교육이 뭔지에 대해 아주 처음부터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교육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말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이란 없다. 우리는 종종 참된 교육을 찾는다. 그런데 실은 진정으로 참된 교육으로 가는 것을 막는 마지막 벽은 교육이란게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이란걸 하려고하기 때문에 교육이 실패한다. 그리고 심지어 교육의 종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책의 제목 교육의 종말은 본래 end라는 영어단어를 이중적 의미로 쓴 포스트만의 의도중 하나밖에는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end는 종말, 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목적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책에서 포스트만은 사람들이 교육의 목적을 착각하기 때문에 교육은 끝장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end of education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그럼 포스트만이 말하는 교육의 목적과 종말은 무엇일까? 먼저 종말부터 말해보자. 포스트만이 말하는 교육의 종말이란 상대주의, 해체주의, 다문화주의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학교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뭐하나 가르쳐 주지 않고 있는 현실을 말한다. 그는 교과서를 없애자는 말을 여러번하는데 그런 말이 나오는 핵심에는 교과서가 선생님과 학생간의 소통을 차단해서 진짜 교육을 실패하게 만든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과거의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학교교육이란 사실상 교과서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있다. 교과서는 시스템을 대표하고 교육의 내용을 대표한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것을 시험에 내면 난리가 나고 아이들은 그래서 대부분 교과서 바깥의 내용 즉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무관심하다. 그런데 바로 이것, 즉 교육은 교과서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교육을 실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과서가 잘못되었거나 좋은 내용을 가진 교과서를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바로 교과서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교육을 실패하게 만든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문자화된 어떤 내용이 아니다. 내용이전에 형식이 중요하다. 교육이 어떤 시스템화된 과정의 반복이 될 때 교육은 실패한다. 그건 마치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키우면서 각각의 나무를 보지 않고 그저 매일 매일 똑같은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모든 나무는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다른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진정한 교육이란 마치 대화같은 것이다. 매일 매일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른 환경에서 만난다. 그런데도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마치 대본을 읽고 연기하는 것처럼 똑같은 대사를 말하고 정해진 답이 강요되어 말해진다. 그들은 완벽한 소통을 위해 완벽한 대본을 찾아헤맬지 모르지만 대화는 대본을 찾아헤매기로 결정한 그 순간 이미 실패한 것이다.
교실안의 선생님도 학생도 실은 이미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마음 저 깊은 속에서는 뭔가가 실패하고 있다고 종종 느낀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이때문에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은 교육하기와 교육받기를 그저 참아낼 뿐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 성공적인 대화와 소통은 감동을 주고 쾌락을 준다. 그들은 누가 말려도 열심히 그것을 할 것이다. 우리가 교육이란 교과서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고 이해해버리는 순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포기되고 실패하게 된다. 다시 말해 학생과 교사가 진짜로 만나는 것을 교과서는 막고 있다.
진정으로 깊은 의미에서 이 세상에는 교육이란게 없고 누가 뭘 가르치거나 배우는게 아닌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사람은 오직 스스로 깨달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 누가 가르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 스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아이에게는 뭔가를 가르칠 수 없다. 두번째 이유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거나 배운다는 것은 객체와 주체를 구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객체와 주체가 구분되어 파악되는 순간 즉 선생과 학생이 분리된 존재로 일반적인 관계로 인식되는 순간 진짜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이상은 실패한다. 교육은 사랑과 공감이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배우는게 아니라 하나로서 일체감을 느낄때 저절로 일어난다. 우리는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진짜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 책임감과 관심없이 가르치는 사람은 진짜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을 학생들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말할수 있다. 나는 예수도 부처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책도 안쓰고 어떤 시스템화된 과정을 개발하거나 교과서를 쓰는 일도 없는 진정한 스승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교과서를 가르쳐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들은 진정한 교육이란게 뭔지 이해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왜 스스로가 예수나 부처나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문제는 단순히 교과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교과서로 갑시다라는 메세지의 부당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교육은 실패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해체주의, 상대주의, 다문화주의등으로 세상에 널리 퍼진 독성있는 철학적 태도다. 그들은 어떤 교조적으로 가르쳐 지는 진리, 시스템화된 진리를 거부하고 그것을 해체하고 사라지게 하는데 열심이다. 그들은 한국인과 미국인과 일본인과 이란인 사이의 차이를 없애려고 하는데 열심이다. 평등과 상호존중이라는 단어를 기계적으로 이해하여 마치 일본과 한국의 교통법규를 하나의 나라에서 실시하는 것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과 한국은 자동차가 가는 방향이 반대다. 그걸 하나의 나라에서 모두 진실이라고 선언하면 종국적으로 남는 것은 교통질서의 실종뿐이다.
물론 진실로 시스템의 진실을 깨달으면 절대적 시스템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걸 깨닫기 전에는 교조적으로 선언된 가르침이 없다면 세상에는 사회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가르켜 닐 포스트만은 신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학교의 본래의 임무는 신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극단적 회의론은 허무만 가르친다.
신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것은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종류의 문화적, 종교적 가치판단의 체계를 말하는것이다. 배금주의도 하나의 신이고 기술만능주의도 하나의 신이다. 유교도 하나의 신이고 예술지싱주의도 하나의 신이다.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하나의 신이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하나의 신이다. 교육이 달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신을 전달하는 일이라고 포스트만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리고 언젠가는 교조적으로 가르쳐지는 시스템으로의 신은 모두 없어져야 할지 모른다. 다르게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니 일본인이니 중국인이니 한국인이니 하는 구분을 잊어버려야 할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런 구분이 의미없다는 것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는 미국인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한국인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학교는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
신이라고 했지만 신에도 종류가 있고 수준이 있다. 어떤 가치관의 체계는 질서를 만들어 낼 힘이 없고 어떤 가치관의 체계는 포용력이 너무 부족해서 끝없이 자기를 환경과 가르고 싸우게 만든다. 닐 포스트만은 교육의 종말에서 자신이 믿는 미국인으로서의 가치관 체계, 미국인이라고 불려야 할 신 혹은 정체성 그래서 결국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교육의 목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닐 포스트만에 따르면 제1급의 교육은 교육이란게 존재하지 않고 시스템이란게 없는 교육이고 제2급의 교육은 포용력있고 질서를 창출하는 능력이 있는 훌룡한 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제3급의 교육 혹은 교육의 실종내지 종말은 해체주의나 허무주의, 단순한 다문화주의적인 사고 방식이다. 이들은 단순한 평등론을 믿고 모든 신을 배격한다. 그리고 나서 남는 것은 엉터리 배금주의라고 불려야 할 실용주의적인 돈버는 기술 몇가지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학교의 현실은 1급도 2급도 아닌 3급에 있다.
2급의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은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도 그럴 수 있고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일수도 있다. 미각을 잃은 사람에게 우리가 아이스크림과 두부의 차이를 설명한다고 하자. 우리는 한번은 하얀 것이 달다고 말했는데 그런데 두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말하는 우리가 우왕좌왕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게 우왕좌왕하는게 아니고 단순한 평균이라는 의미에서 중용이 아니라는 것은 오직 미각이 되살아난 후에나 알 수 있다. 즉 문자화된 내용 이전의 것을 느끼는 감각이 있어야 진정한 소통은 이뤄진다.
그러므로 닐 포스트만은 신을 말한다음에 열심히 다양성, 존재의 불분명함, 문화적 차이를 습득하는 일, 교육시스템을 무너뜨려서 교육을 살리는 시스템을 만드는 듯한 모순적 언사를 계속한다. 그건 모순이 아니지만 모순으로 이해되기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교육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삶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말한다. 하지만 번지점프나 문화체험이 시스템화되면 진정한 경험이 되지 못하듯 시스템화된 즉 고정된 과정은 학생들이 예측하는 것을 줄 것이고 일단 경험이 예측가능해 지면 포스트만이 말하는 효과는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교육은 다시 지루하게 예측가능한 것을 기계처럼 말하는 선생님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고정되고 예측가능하며 시스템화된 것을 배우게 된 순간 우리는 다시 교과서를 외우는 사람이 되고 만다.
미국인인 포스트만으로서는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교육하는 것이 학교의 본래 목적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그는 천문학, 역사, 인류학등을 교육과정의 핵심에 놓자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내가 아닌 것을 보고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데 공통점이 있다. 천문학은 저기 먼 하늘을 보고 나를 발견하는것이고 역사는 과거에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을 보고 현재의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며 인류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러가지 방식들을 보고 자기가 -닐포스트만은 미국인이므로 미국인의-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닐포스트만은 언어를 강조하기도 하는데 다른 언어를 배움으로서 우리는 우리의언어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며 그것은 언어가 포함하는 가치판단의 내용을 이해시켜준다.
영어에 ETHICAL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도덕적, 윤리적 이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나는 이것을 가치판단적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도덕과 윤리가 가치판단의 문제라는 것이 현실에서 망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ETHICAL한 면이 있다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걸 언어는 도덕적인 면이 있다고 번역하는 것과 언어에는 가치판단적 면이 있다고 번역하는 것은 큰 인식의 차이를 줄수가 있다. 사람들은 도덕이라고 하면 이미 좋고 나쁜게 다 결정되어 있는데 그걸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욕심과 욕망에 굴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저 사람은 참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이지 그사람의 가치판단의 체계가 나와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가치판단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의지와 책임이라는 말이 남아있다. 도덕이라는 단어는 현실에서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게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규칙은 정해져 있는데 너는 그걸왜 안 지키는가라는 문맥에서 우리는 이 말을 너무 많이 썼다.
진정한 교육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판단의 문제다. 그 차이를 숙고하지 않으면 교육에는 목적이 없고 따라서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닐 포스트만이 지적하듯 교육학과 교수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이 부분에 대해 무감각한것이 사실인것 같다. 오늘날의 현실이 만들어지고 재생되고 악화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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