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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지리산 행복학교 : 공지영

by 격암(강국진) 2011. 6. 1.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는 지리산자락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소설이 아닌 실화들이다. 물론 작가적 감성으로 윤색된 느낌은 좀 난다. 이 책은 유쾌하며 여러가지 사람들의 삶, 지리산자락에서 사는, 도시의 삶과는 다른 삶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자극적이고 유익하다. 어려운 이야기는 없으며 되도록 유쾌하게 써져서 한국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끈적한 슬픔의 늪때문에 골치아파야할 것도 없다. 나는 이책을 추천한다. 

 

 

 

 

 

이렇게 서두에 확고하게 추천한다, 좋다, 유쾌하다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부터 내가 훨씬 더 길게 좀 안좋게 들리는 이야기를 할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메세지나 의미는 매우 오독되기 쉽다. 작가의 의도를 틀리게 안다는 뜻에서 오독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같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얇팍한 생각이 아닐까?

 

이 책을 검색하면 책소개가 나오는데 그 책소개의 서두는 이렇다. 어쩌면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또 책속에서 작가는 진보의 삶, 진보라는 정체성에 대해 이따금 언급하는데 이 책의 가장 주요한 등장인물인 버들치시인과 낙장불입시인둘다 환경보존운동에 헌신해오고 헌신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없는 살림에도 진보정당에 가입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런 언급은 만들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즐겁게 깔깔 웃으며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즐기면서도 한쪽에서는 이 에피소드의 바닥에 깔린 무거운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새로운 대안적 문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말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것은 혼잡한 도시의 삶 이상으로 모순에 차고 답답한 것은 아닐까? 정말 제목처럼 우리는 이 책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고, 행복이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일까?

 

작은 예에서 출발해 보자. 이 책의 한 꼭지에는 마흔이 되어 직장을 때려치고 지리산으로 낙향한 한 사진작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진작가는 전재산으로 지리산에 땅을 사서 집과 전시실을 지으려고 하는데 이웃들이 그걸 1년반이나 방해를 해서 개발을 하지 못한다. 이 부분을 읽어보면 작가는 무의식중에 주인공인 사진작가의 편을 들어주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이 예와 지리산 댐건설에 반대하는 환경운동을 나란히 놓게 되면 왠지 묘한 모순을 느끼게 된다. 

 

남의 땅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뒷산을 지키려고 방해공작을 펼치는 이웃들 그리고 거기에 당해서 고생하는 사진작가는 왠지 환경보존을 위해 삼보일배를 하는 거룩한 분들과 국토개발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관계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규모의 차이가 있을뿐인데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하면 로맨스라는 인식의 정당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책은 어쩌면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라고 말한다. 작가도 책속에서 틈틈이 50만원만 가지면 일단 1년을 살 수 있다라는 말을 가끔 스스로에게 되뇌인다고 말한다. 이런 문맥과 이 책의 분위기를 보면 여기에 어떤 일반화가 일어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즉 누구나 지리산의 삶이 가능하며 지리산의 삶은 우리에게 행복이 뭔지에 대한 일반론적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예를 들어 지리산 사람들을 한번 보자. 이 사람들은 그냥 보통 사람들인가. 이 사람들은 정말 지리산의 보살핌으로만 사는가. 그들은 책을 써서 돈을 벌고, 지리산 관광때문에 돈을 번다. 주차요원을 하는 것도 도시사람들이 와서 주차를 하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마을에 흑돼지고기를 공급하는 강남좌파와 공지영 그리고 회를 공급하는 사업가는 특히 확실한 도시사람들이다. 강연이며 책을 써서 돈을 버는 버들치 시인이나 낙장불입시인, 특히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끊임없이 챙겨주는 버들치 시인.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정말 도시를 떠난 사람들일까?

 

나는 여기에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보고 느껴야할 전체적인 메세지가 뭘까 하는 점이다.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거대한 부를 물려받은 자식이 그 돈을 바탕으로 경치좋은데 성같은 집을 짓고 칩거해 살면서 나는 조용히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다른 사람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다. 누구나 재벌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자기힘으로 사는 것같지만 결국 아버지 유산에 기대어 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지만 절제된 삶을 살고 있는 예를 보여주었다면 나는 이것이 새로운 행복대안론이라는 것에 보다 쉽게 동의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따지고 보면 몸만 시골에 있을뿐 도시에 크게 의존하면서 시골예찬론을 펼치는 거라면 그야 자신의 자유지만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나는 술을 먹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성적인 금욕주의자로 경건하게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제아무리 호탕한척하고 쿨한척해봐야 술먹는게 과하면 건강을 해치고 성적인 방종은 흔히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런데 공지영의 글은 흥행성을 위해서인지 지나치게 술먹고 노는 이야기가 강조되고, 성적으로 자극적인 이야기도 가끔씩 강조된다. 결론적으로 어떤 지속가능한 삶의 이미지를 주지 못한다. 파티의 이야기는 즐겁지만 파티가 끝나면 어쩔것인가. 

 

이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 작가는 정당하게도 나는 완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게 아니라 그저 지리산자락에 사는 친구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팔은 안으로 굽기때문인지 아니면 책을 팔아야 하기때문인지 모르지만 적당한 미화와 함께 말이다. 인정할 수 있다. 더구나 도시사람들의 삶이 그보다 좋은것도 아니라는 것도 인정할 수있다. 

 

다만 이것이 대안문화인가라는 점에 이르르면 그다지 공감이 가질 않는다. 친구가 키우던 닭을 죽이기 싫다는데 억지로 그 닭을 잡아먹은 활극을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지만 그런 에피소드속에서 이런 것이 그냥 웃음거리라면 개발주의자들의 거대한 계획안에서 몇사람쯤 죽어나가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거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문제는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수성이다. 그들은 과연 여럿이서 모여살아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감수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할 때 발을 밟히면 비명을 지르며 뭐 이런 놈들이 있냐고 하지만 정작 자기가 남의 발을 밟는것에 대해서는 뭐 별거아니네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치고 물어뜯는 것은 그다지 도시의 삶과도 다를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쓴 것이 지리산 마을의 전부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전부도 아닐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건 모른다. 다시 말해 내가 아는 것은 작가가 글속에 쓴 것 뿐이니 그것만 말할뿐이다. 그것만 보면 거기에 어떤 대안적 삶의 아름다움과 희망은 별로 보이질 않는다. 그저 연약하고 상처입은 도시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뿐이다. 

 

정치적으로는 나는 이것이 한국 진보진영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정으로 대안적 삶에 대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는 것. 진짜 다른 삶은 말할 수 없다는 것. 이 말은 결국 진보가 보수의 악세사리로 이따금 문제가 커질때 경고음이나 단편적으로 울려낼뿐 어떤 대안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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