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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1. 6. 23.

하루키는 요즘도 대단한 인기작가 이지만 그건 벌써 수십년간 그래왔다. 때문에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1-20년전에 몇권쯤 읽었었는데 그당시 나의 인상은 그리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술술 읽히니까 시간을 떼우기는 좋다는 느낌, 어떤 관념적 유희가 즐겁다는 느낌 정도였달까. 





최근에 나는 하루키의 양을 쫒는 모험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하루키의 소설은 전혀 다르게 나에게 다가왔다. 양을 쫒는 모험은 한 사나이가 별무늬가 있는 양을 찾아달라는 부탁내지는 협박을 받고 양을 찾아 나서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양을 찾게 되었을때 그는 분노하고 양을 둘러싼 음모와 야심에 종지부를 찍는 일을 돕고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이야기를 보자면 양을 찾아서 친구가 폭탄을 가지고 어떤 시스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돕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뿐인 이야기로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줄거리적으로 대단히 복잡한 것은 없다. 


하루키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몇가지의 장치 내지는 설정이 등장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나'다. 거기에 섹스와 음식과 음악, 기타나 청바지나 가슴이 크거나 아무와 마구 잠자리를 하는 여자나 스파게티, 술이 더해 진다. 아뭏튼 하루키의 소설이 늘상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마치 먹이를 주듯 요리를 하고 먹는 장면이나 맥주를 마시는 장면, 그리고 세부적 묘사도 없이 그저 섹스를 했다라고 한줄로 표현할 지언정 섹스했다라고 하는 표현이 계속 등장하곤 한다. 


세상에서 미끄러지는 나라는 건 이렇다. 나는 도무지 이세상의 많은 것들에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출세하기 위해서나 큰 재산을 모은다거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몰두하고 맹렬히 뛰고 있는 것을 나는 방관하면서 보게 된다. 나는 심지어 사랑도 맹렬히 할수가 없다.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철저히 고립된 혼자이며 고독을 즐기고 그래서 그의 친구들조차 그 벽너머에서 절망하게 만들것 같은 그런 인물이다. 그렇게 되는 것에는 가치적 감수성을 느낄수 없는 허무주의적 상황이 나에게 깔려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출근길을 마구 뛰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도대체 뭘하러 저렇게 아둥바둥일까 하고 한가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루키 소설의 나다. 그래서 사랑이건 직업이건 혹은 어떤 집이나 고향에 대한 애착이건 나는 간단히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양을 쫒는 모험에 등장하는 나는 스스로 이런 자신을 잘알고 있다. 그래서 대단한게 없고 평범한 자신이지만 한가지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나는 자유의지에 따라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먹이를 쫒아뛰는 개같은 존재는 아니다. 나는 자유다. 


자신을 협박하려고 하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나는 말한다. 나는 아내를 잃었고 직장도 얼마전에 잃었으며 잃어버릴 재산도 없는데 도대체 나에게서 뭘 빼앗아 갈수 있다는 것인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너에게는 빼앗길것이 있다고 말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나는 결국 화를 내고 기타를 부수는 행위를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자신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 주변사람들이 짜준 각본속에서 행동했던 것이며 애초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양의 정령을 끝장내버리기로 한 친구 쥐에게서 나는 자꾸 일반론으로 빠져들지 말라는 충고를 받는다. 그렇다. 나는 너무나 일반론에 뛰어나다. 양을 제외한다면 일반론 나라의 왕이 될거라는 말을 들을 만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그저 냉소적인 태도로 아무것에도 열중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친구의 죽음이 있은 이후 몇시간에 걸쳐 우는 일을 하는데 그것은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반론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게 된 스스로를 위한 울음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아는것처럼 건방지게 살았던 스스로에 대한 울음이다. 


소설의 주요 줄거리를 만들어 내는 양이란 어떤 시스템적인 사고다. 양사나이는 그런 사고가 만들어 내는 전쟁이 싫어서 세계대전이 끝난지 수십년이 넘었는데도 인간이 아니라 양으로 숲에서 산다. 그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양이 상징하는 관념이다. 일본의 역사같은 것과 연결시키면 반전, 반제국주의의 메세지도 이 소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부분은 상당히 약하고 비본질적이다. 


소설속에서 양은 이사람저사람을 넘나들면서 그 사람들을 지배하고 결국은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고 왕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게 한다. 쥐는 스스로가 그런 조직의 머리로써 세상을 지배하고 강대해져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이 자기 몸에서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자살함으로써 양의 지배를 끊을뿐 아니라 양이 사람들을 지배해서 만들어낸 암흑의 조직을 운영할 사람도 폭탄으로 죽게 만든다. 


하루키의 소설은 CF를 연속해서 보는 것같은 감각적인 자극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맛있는 맥주를 마신다라는 문장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린 마치 맥주 광고를 보고 맥주를 마시고 싶은 욕망을 느끼듯이 주인공처럼 맥주를 마시거나 크래커를 먹거나 스파게티를 삶고 청바지를 입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서 쾌감을 쉽게 느끼는 부분은 이런것 때문인데 여기에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고 느낀다. 이세상의 하나뿐인 존재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이미지의 또다른 반복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뿐인 존재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하루키 소설의 큰 메세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하루키 소설의 대중적 매력이란 마치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액션영화가 조용한 삶이 바람직하다는 메세지를 주는 것같은 상황과 비슷한게 아닐까. 하루키가 문제라고 하는 부분을 오히려 독자들은 열광적으로 나는 그렇게 되고 싶다고 외치는 상황이 아닐까. 

 

하루키의 매력이 뭔가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읽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기작가의 문체가 가지는 매력을 당장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루키의 세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약간만 이야기하고 이 감상문을 마치기로 해보자. 


하루키의 세계는 맹목적 이데올로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허무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동시에 그걸 허무하게 바라보는 세상에서 미끄러지기만 하는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애정이 담겨져 있지 않다. 하루키의 최신작을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하루키의 과거소설에서 하루키는 어떤 돌파구를 찾아낸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세상에 대한 부정, 그 부정하는 자신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 어떤 존재로 나아가는가하면 그렇지 않고 계속 세상에 미끄러지고 혼자 유유하게 사는 사람으로 남는다. 


출구가 없는 철학이라는 것이 하루키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다른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양을 쫒는 모험에서도 25살까지만 살겠다고 하곤 정말 26살이 되자마자 죽는 사람이 나온다.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50이나 60 혹은 80까지 산다는 것은 감옥살이하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정도이며 아이나 아내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가지는 정상적인 인간은 왠지 정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불임으로 젊어서 추해지기 전에 쾌락이 다하면 죽어버리는 인간상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삶에 대한 긍정이 약하다. 이것이 하루키 세계의 아쉬운점이 아닐까. 싸구려 이데올로기로 삶을 긍정하는 신파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도 꼴불견일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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