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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건지 감자껍질 북클럽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1. 12. 7.

2011.12.7

 

사람은 칫솔질이나 목욕같이 특정한 행동들을 하면서 하루 시간을 모두 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처럼 우리의 하루하루는 다양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우리에게 결핍된 어떤 것을 지나치게 중시한다. 샤워를 해야겠다싶으면 그걸 할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정신이 팔려서 다른 일들을 다 미뤄두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이번에는 우리 삶의 다른 평범한 것들이 잊혀진다. 그래서 오히려 당연하고 평범한 것들이 잊혀지고 결핍된다. 우리가 그 상태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그 결핍은 장기간 지속되기도 한다. 

 

건지 감자껍질 북클럽을 읽으면서 그립고 참신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상당부분 그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딱딱하고 논리적인 주제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장기간 이야기하고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내부적으로 메말라 가게 된다. 본인이 항상 긴장해 있고 감정이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때 우리는 만화책이나 무협지나 할리퀸같은 애정소설을 읽는 게 필요할지 모른다. 보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이 책을 할리퀸류의 애정소설로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확실히 건지 감자껍질 북클럽은 무거운 주제를 단순하고 소녀적인 감성으로 접근한 책이다. 그런데 이런 느낌으로 책을 읽고 이 책의 저자를 알게 되면 가벼운 충격을 받게 된다. 이 책을 쓴 메리 앤 세퍼는 이 책이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그때 그녀의 나이가 75세였다. 75세 할머니의 책이 소녀적 감성에 차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책의 공저자인 그녀의 조카의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놀라운 일처럼 들린다. 사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메리 앤 세퍼의 첫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었고 이 책을 집필하던 무렵에는 이미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아 그녀가 책을 구술하면 조카가 받아서 적었다고 한다. 메리 앤 세퍼가 살아서 그녀의 책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부분 1위를 하는 것을 보았더라면 기뻐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아프다. 말하자면 죽기전에 쓴 첫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살아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녀는 간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책을 온 세계의 사람들을 읽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돌아가셨다. 

 

그녀의 직업이 편집자이자 도서관 사서, 서점 직원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평생 책주변에 있었던 것을 사랑했던 것같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의 주인공 줄리엣에게서 그대로 나타난다. 30대의 성공한 작가인 줄리엣은 그녀의 편집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책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진 여자다. 서점 직원은 돈이 되지 않으나 누구보다 먼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쁨이 있으며 그래서 그 기쁨을 고객에게 전해 준다고 하는 책속의 내용, 편집자와 이야기하는 작가는 비록 편집자를 욕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편집자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는 내용같은 것은 그녀의 경험이 그대로 들어난 것이 아닐까.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녀의 조각난 자아들은 이 책의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이렇게 소개를 써놓고 보니 건지 감자껍질 북클럽을 싸구려 감성의 할머니 판타지로 쓴 것 같다. 비록 그런 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해도 그건 공평하지 않다. 나는 이 책을 매우 고맙게 읽었다. 이 책은 몇가지의 기본에 충실하다. 하나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한다. 독자는 세계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의 영국으로 가서 전쟁동안 영국국민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던가, 그리고 어떻게 대처했던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일종의 이상향처럼 들리는 건지라는 섬마을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우리로 하여금 행복과 용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기가막힌 경치를 가진 섬으로의 여행에 누가 불평할 것인가. 

 

이 책은 문화적으로 자극적이다. 이 책이 묘사하는 사건들은 작가인 줄리엣이 건지라는 마을의 북클럽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고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위선적인 도시생활을 버리고 시골마을인 건지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무식하긴 하지만 착하고 용기있는 북클럽회원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저런 책들을 소개해 주는데 그건 마치 어떤 아늑한 서점의 서가를 천천히 걸으며 이런 저런 책들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소설이다. 이 역시 누가 불평할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은 이 책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불러 일으킨다. '현실적' 이라는 말과 함께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비참한 곳으로 말하기 좋아한다. 이 세상에 용기있고 착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환타지이며 가치없는 이야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관적인 것이 꼭 현실적인 것이고 낙관적인 것은 몽상적인 것일까? 그것의 과학적 사실적 진리성은 둘째치고라도 우리는 결국 용기와 행복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언제나 희망이 필요하다. 그러니 한권의 책을 읽었는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마음에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무섭고 슬픈 이야기로 가득하다. 굶어 죽은 사람들, 처형당한 사람들, 배신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과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대표적으로 독일군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출산하고 감옥에서 죽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가 그렇다. 너무 자세히 쓰면 스포일러가 되기에 생략하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때문에 눈물을 흘릴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무시무시한 전쟁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저자는 독일군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쓴다. 결국 전쟁이 터지고 나면 죽어나가는 것은 양쪽 다 마찬가지고 독일인이라는 정체성 이전에 그저 한사람의 개인인 그 독일군도 불쌍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저자는 결국 인간에 대한 희망과 사랑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영원히 진실로 남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키다리 아저씨나 작은 아씨들 같은 고전을 읽는 느낌이 난다. 어릴적에 나는 따뜻한 집에서 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군것질 거리를 옆에 둘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더 필요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한 권을 읽으면 아 뭔가 이런 책을 더 읽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책이 있다. 건지 감자껍질 북클럽은 바로 그런 책이다. 복잡하고 딱딱한 책도 읽을때는 읽어야겠지만 이런 책을 잔뜩 쌓아놓고 한가롭게 지내는 시간을 만들수 있다면 그 이상 행복한 건 없지 않을까. 

 

나는 이 책을 영어 원서로 읽었다. 그래서 한글 번역판의 번역이 얼마나 충실한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쪼록 잘 번역되어 원작의 느낌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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