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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다니엘 카네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4. 6. 20.

2014.6.20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노벨 경제학 수상자 다니엘 카네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었다. 국내에는 2012년에 번역되어 나온 모양이지만 언뜻 평가들을 보니 번역에 대해 그다지 평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정확히 말하면 Thinking fast and slow라는 원서를 읽었기 때문에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책이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서 이에 대해 소감을 남기기로 했다. 

 

 

들어가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몇가지의 생각들이 끝임없이 떠올랐는데 그 중의 하나는 과연 이 책의 제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저자는 고심끝에, 아마도 편집자와의 상담끝에 thinking fast and slow라는 제목을 찾았을 것이고 번역을 한 회사는 또 다른 고민속에서 -특히 책을 얼마나 팔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에서-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제목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제목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원래의 제목은 좀 더 괜찮지만 내 마음에 꼭 들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 이 책에 어울리는 제목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론을 찾아서가 아닐까 싶다. 나중에 왜 이게 괜찮은 제목일까에 대해 또 왜 제목이 중요한가에 대해 좀 더 설명하겠지만 지금 당장 하나는 지적할 수 있다. 읽다가 지칠정도로 많은 실험과 관측사례를 나열하고 있는 이 책의 제목에 이론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그 수많은 사례를 종합할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스튜어트 서덜랜드의 비합리성의 심리학 (irrationality)같은 책도 저자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가지면서 읽었으며 좋은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지만 서평을 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이유를 좀 과장해서 말하면 우리는 백과사전을 읽고 요약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과사전 자체가 요약이니까 그렇다. 비합리성의 심리학을 포함한 많은 심리학관련 서적들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여러가지 관측사례와 개념들을 늘어놓지만 그것을 총괄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하지 않는다. 그때문에 책이 백과사전처럼 되어가고 -적어도 물리학을 공부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렇다- 사실 아예 비판적 사상가의 사전 (the critical thinker's dictionary)이라는 책은 책의 제목 자체에서 이것이 사전임을 강조한다. 

 

심리학책들은 재미있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것도 같지만 사실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아직 마음의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분명히 그 오류가 뻔한 이론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면 모두 증권을 사고 팔아서 돈을 잘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마찬가지로 심리학자면 인간의 심리를 잘 알겠군요라는 기대에도 어느 정도 경고문은 필요하다. 

 

심리학책은 말하자면 뉴튼의 이론이 나오기 이전에 하늘에 별의 움직임을 기록한 천문학자의 책처럼 되기 쉽다. 별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종합적으로 설명한 이론이 없으니 그 책은 매우 복잡하고 조잡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저 관측 데이터만 나열되어져 있기 쉽고 설사 관측의 종합이 있더라도 그것은 때로 크게 편향되어져있다. 관측이 어렵고 복잡해 지는 이유는 예외적 사건들 때문이다. 그 수많은 별중에 이상한 별들이 몇개 있었던 것이다. 다른 별들은 그저 둥글게 하늘을 가로 질러가는데 몇개의 별은 그 궤도가 지그재그다. 인간이 이 별들의 운동을 기록하고 그 별들의 운동의 의미를 깨닫는데는 실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별들은 바로 태양계 내부의 행성들이었으며 괴상한 별들의 움직임은 중력의 법칙과, 태양주위를 행성들이 돈다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그림이 등장하면서 당연한 것으로 바뀌었다. 

 

심리학책들은 대개 인간 마음의 괴상한 움직임에 대한 관찰 보고서다. 사실 하늘에는 그저 둥근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별들이 훨씬 훨씬 더 많지만 인간은 이상하게 움직이는 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통상 믿는 이성주의자의 모델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무의식의 존재같은 것에 놀란다. 그래서 인간 마음의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은 더 많은 주목을 받고 더 많이 관찰되고 보고 된다. 

 

이같은 것은 경제학자의 관점과는 다르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에서 움직이는 개인들이 99% 합리적으로 움직인다면 1%정도 비합리적으로 움직이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고 실제로 그래왔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고전적이고 단순한 마음의 모델을 가지고 경제학을 만들었다. 사람이라면 이득을 최대화하고 싶어한다라는 가정같은 것을 쓰는 것이 그렇다. 바로 그때문에 심리학자와 경제학자가 만났을때 새로운 경제학인 행동 경제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몇%의 차이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의 차이도 몇퍼센트다. 그런데 그들이 각각 모여서 만든 사회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심리학자의 궁극적인 꿈은 비록 그가 그걸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고 해도 새로운 경제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관측하는 인간마음의 움직임들을 모두 하나의 간결하고 자명한 틀로 정리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책은 다니엘 카네먼이 평생 그 목표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살아왔는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 제목에 대해서 마음에 대한 한가지 이론이 아니라 마음의 이론을 찾아서를 제안한 이유는 저자는 평생의 연구를 통해 그 이론에 접근했지만 이론을 제시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스템1 시스템2라는 것을 말했지만 동시에 저자 스스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편의를 위해서 도입한 것이라고 몇번이고 강조하기도 했다.  

 

즉 그가 한 것은 케플러가 별의 타원움직임을 발견한 것처럼 마음에 대한 하나의 서술이다. 왜 그런가는 모른다. 그러나 누가 케플러가 뉴튼보다 못하다고 말하겠는가.  케플러가 타원을 그리자 별의 궤도가 자명하게 타원으로 보이게 되었듯 카네만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인간의 마음을 보는 우리 눈앞에 있는 많은 근거없는 믿음과 불투명성은 제거되고 인간의 마음이란 것은 적어도 전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보이게 된다. 문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게 뭔가 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지리산에 댐을 지어야 할까요?

 

한 한국사람에게 질문이 주어졌다. 지리산에 댐을 지어야 할까요? 그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었고 그래서 한국의 여러가지 측면에 있어서 댐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는 어쩔수 없이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때로는 지나치게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가 현명하다면 즉석에서 답을 하기보다는 적어도 좀 생각을 하고 정보를 모으고 많은 사람들 특히 이미 정보를 많이 축적한 전문가들과 대화도 한 다음에 시간을 가지고 답을 할 것이다. 전문가들을 끌어모았다고 해도 의견들이 오고가고 발전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현명한 것도 아니고 때로는 그럴만한 시간이 언제나 주어져 있지도 않다. 호랑이가 우리에게 달려드는데 이게 호랑이인지 아닌지 자세히 따지고 있다면 우리는 잡아먹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기반으로 직관적인 답을 제시한다.

 

그 답은 분명히 그의 개인적 성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가 정치판의 권력싸움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댐을 짓는 것의 정치적 의미만 따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마침 식당을 하고 있었다면 그는 댐을 짓느라고 사람들이 오면 식당이 잘될지 몰라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역사학자는 역사를 생각할 것이고 그가 지리산을 오르는 것을 즐기는 등반가라면 댐을 지으면 지리산의 자연환경은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생각할 것이다. 그 사람이 학부형이라면 그는 지리산댐과 우리 아이의 교육환경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답을 할지도 모른다. 그가 마침 농사를 지을 물이 부족해서 고민중이었으며 지리산을 지겹게 본 농부라면 댐이 필요하다는 말은 훨씬 쉽게 나올 것이다. 

 

이러한 답이 국민전부에게 공개되었을 경우 통상의 경우에는 그건 그저 한 개인의 의견일 뿐이지만 그 한사람이 도지사라던가 정부의 중요요인이라던가 어떤 연구소의 책임연구원같은 사람이라서 국가개발정책을 결정짓는 자리에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 한사람의 의견이 세상에 발표되었을때에는 그러한 결정이 가지는 신뢰성 혹은 그 결정과정에 포함되어져 있는 불확성의 정도가 무시되기 쉽다. 실제로 댐을 짓기로 결정한 그 한사람은 매우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결정했을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많은 불확실성과 망설임끝에 그래도 51대 49로 댐은 지어야 한다라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 듣는 많은 사람들은 권위있는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댐을 지어야 한다라고 하면 그것을 100% 확실한 결정으로 받아들인다. 즉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 통계적 인식이 사라지고 만다. 모든 국민이 이렇다면 각계의 전문가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내놓고 여러사람들이 자신의 가치판단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통하면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은 사라진다. 사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비용이 들고 느리고 고통스럽다. 또한 때로는 일을 하는 사람이 현장에서 빠른 판단을 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줘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물론 개인에 의한 판단은 빠른 대신에 이따금씩은 터무니 없이 틀리다. 

 

뇌와 마음

 

위의 글을 읽은 사람은 마음에 대한 이론을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지리산에 댐을 지어야 하는가에 대해 떠드는 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카네만은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시스템 1 시스템 2라는 것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결국 위에서 말한 결정과정과 많이 닮아 있다. 

 

시스템1이란 열정이 없는 공무원처럼 일한다. 시스템1이란 인간의 마음이 빠르고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으로 판단을 내릴 때를 말한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아주 많은 일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습관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며 놀라울만큼 그렇게 잘하고 있다. 즉 일상생활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을 때 그녀의 목소리를 잠깐 듣는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안다. 의식적으로 이유를 몰라도 우리는 직관적으로 상황을 금새 인식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왜 우리가 언뜻 본 그 여자가 그 여자라고 쉽게 알아보았는지 이유를 알아서 알아본게 아니다. 이유를 알기 전에 이미 우리는 그녀를 알아본다. 우리가 이런 능력을 가진 것은 다행인데 앞에서 말했듯이 호랑이가 달려오는데 즉각 반응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잡아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직관적 판단은 빠른 대신에 오류를 만들기도 쉽다. 그걸 신경이라고 부르건 뇌의 특정부위라고 부르건 판단을 내리는 그 부분에는 충분히 많은 주목과 기억과 피드백을 위한 시간이 투입되지 못한 것같다.  시스템1은 열정없고 시간에 쫒기는 공무원이 그렇게 하듯이 그저 하던대로 좁은 시야로 판단한다. 여러가지를 고려할 시간을 들이지 않고 판단이 자동적으로 내려지고 편견이 실행되는 것이다.  마치 신경을 쓰지 않아도 깊은 생각에 빠져 산책을 하는 도중에 우리의 다리는 척추의 조작에 따라 혼자서 움직이듯이 말이다. 

 

카네먼은 이 책 가득히 그런 오류를 밝혀내기위한 실험을 나열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우리는 불확실성과 무지의 존재를 너무 쉽게 망각한다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어떤 불확실성위에서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 통계적이고 기초적인 확률을 무시하고 그저 대표값에 따라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시스템1이 우리안에서 이게 좋다라고 결정을 내리고 나면 우리는 왠지 확신이 선다. 마치 정부말에 항상 고분고분한 시민들처럼 말이다. 

 

당신이 어느 대학의 간호학과에 갔다고 하자. 거기서 당신은 뿔테안경을 쓰고 양자역학책을 들고 복도를 걸아가는 남학생을 만났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저 학생이 어느 학과의 학생일까요라고 묻는다. 그럴때 당신이 물리학과 학생이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이 어느 건물에 있는가를 잊고 있는 것이다. 그 건물의 학생들의 대부분은 간호학과 학생이다. 그런데 당신은 물리학과 학생을 떠올리게 하는 증거들에만 몰두한 나머지 기본적인 상황적 확률을 잊어버린다. 

 

길을 걷던 당신은 죽어가는 돌고래를 살립시다라는 포스터를 본다. 그 포스터는 돌고래들이 멸종하고 있으며 그들을 살리기 위해 돈을 모금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돌고래 사진을 보고 당신은 돈을 기부하기로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고통받는 돌고래의 숫자가 도대체 얼마인지, 고통받고 있는 다른 것들은 어떤게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이 돌고래 문제에 어느정도의 신경을 써야하는지 같은 것은 고려하지 못한다. 그저 단한마리의 돌고래가 고통스러워 한다라는 것이 우리의 성금액수를 크게 좌우한다. 단한마리의 귀여운 북극곰 아기사진이면 북극곰살리기 운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통계학적인 용어를 써서 카네만이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베이지언 추론 (Bayesian inference) 을 해야 하는데 최대 우도 추론 (Maximum-likelihood inference)의 결과가 전부라고 생각 한다. 즉 프라이어 확률을 완전히 무시하며 애초에 이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이었다는 것을 잊는 것이다. 세상을 적합한 프레임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대상의 일부 특징에 매몰되어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를 할로 효과라고 부른다. 그것은 잘생긴 투수는 공도 잘던진다, 친절하고 사람좋아보이는 교수가 연구도 잘한다 같은 식으로 우리가 어떤 것의 특정 부분을 좋은 것으로 판단할 때 그 대상이 일관성을 가지고 모든 측면에서 훌룡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우연히 유명해지거나 나쁜 놈으로 유명해 져도 유명한 사람은 뭔가 다를꺼야 하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면도 있는 것같다. 유명한 정도와 권력과 개인적 능력을 지나친 상관관계를 가정하고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행운의 효과, 확률의 효과를 무시한다. 아들이 시험성적이 나빠서 혼을 냈더니 다음번에는 성적이 올랐다고 하면 우리는 금새 강력하게 혼을 내는 것과 성적이 오르는 것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실은 이것은 평균값 주변에서 행운에 따라 오르고 내린 것에 대한 반응으로 생기는 인지적 환상일 수 있다. 즉 그 아들이 한번은 매우 운이 안좋아서 시험성적이 나빴고 혼이 났다면 운이란 늘상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없어도 다음번에는 성적이 오를 것이다. 반대로 지난번에 운이 아주 좋아서 성적이 좋았다면 칭찬을 하건 용돈을 주건간에 상관없이 다음번에는 성적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성적을 올리는 효과적 방법은 혼을 내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 쉽다. 그러나 지나치게 눈앞의 결과에 대해 크게 칭찬하고 벌을 주면서 결과와 자신의 행동간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시스템1은 암시 혹은 프라이밍에 약하다. 좁은 시야로, 우연히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에 기반해서 일을 처리한다. 노인을 연상시키는 말을 들으면 왜 그런지 몰라도 몸이 느려지고 돈의 이미지를 보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증가한다. 연필같은 것을 물고 억지로 웃음을 짓게 하고서 영화를 보면 영화를 더 재미있게 느낀다. 뭐든지 자주들으면 그걸 진실로 느끼게 되고 특히 피곤하면 더 그렇다. 그래서 광고를 반복해서 보거나 특정성향의 사람들에 늘상 둘러쌓여 있으면 어떤 믿음이 생겨난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른거라는 말을 날마다 듣거나,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이 이런 말을 날마다 듣거나, 여자가, 남자가 이런 말을 날마다 듣거나 당신의 배우자도 바람피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근거없는 이야기를 매일 들으면 그렇게 의심하고 믿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 그때 느끼고 있었던 문맥을 항상 옳은 문맥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사례들은 흥미롭고 책은 훨씬 더 많은 사례들을 소개한다. 그렇지만 다시 시스템1과 시스템2로 돌아가자. 결국 시스템2는 의식적이고 더 많은 기억과 정보에 기반하여 판단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느리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해도 무한히 합리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의식적이 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창의력을 죽일지도 모른다.

 

시스템1과 시스템2의 차이라는 것은 이분법적인 구분이 아니라 실은 인간의 뇌가 세상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투입하는 피드백의 정도의 차이일지 모른다.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하던 것을 하는 것이다. 길을 걷고 있었다면 다리는 그저 리듬을 타고 저절로 하던 일을 한다. 이것은 의지와 의식을 가지고 조심스레 절벽에서 매달려 내려가고 있을 때의 우리의 다리의 움직임과는 다르다. 

 

우리는 시스템1적으로 즉 무의식적으로 하던대로 판단을 내리고 뒤늦게 시스템2를 작동시켜도 이미 편견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그 믿음과 판단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다. 그 오류는 프라이어의 오류, 프레임의 오류, 문맥의 오류다. 확실하지 않은 것중에서 한가지 선택을 하고서 애초부터 한가지 선택밖에 없었다고 믿는다. 우리가 뭘 모르는지를 모른다. 작은 프레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전망이론과 인간의 마음

 

카네만은 전망이론 (prosect theory)라는 이론의 주창자이다. (이책을 읽다가 따로 쓴 월세의 심리, 전세의 심리와 우리가 피해야 하는 네가지 심리적 함정이 이 이론에 대한 글이다.) 이 이론은 기존의 경제이론과 매우 흥미로운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경제이론의 근거를 이루는 베르룰리의 가치이론은 기본적으로 사물에는 객관적인 가치가 있다고 가정한다. 백원은 백원의 가치가 있고 백만원은 백만원의 가치가 있다.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고 믿어지는 인간은 고전적 경제이론속에서 이 가치를 최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다. 이에 반해 전망이론은 사물의 가치를 표현한 고전적 경제학자의 그래프에는 빠진 변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치를 판단하는 개인이 서있는 현재위치다. 

 

카네만은 월급과 휴가의 교환을 예로 든다. 어떤 사람이 월급은 많지만 휴가가 적은 직장으로 갔다. 다른 선택도 있었는데 그것은 월급은 적지만 휴가가 많은 직장이었다. 월급과 휴가의 가치가 서로 균형을 이룬다고 할때 어느 쪽에서건 실제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 사람에게 그 두 개의 직장은 같은 정도의 매력을 준다. 이것도 저것도 같은 가치다. 

 

고전적 경제이론에서는 가치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한 직장을 잡고 있다가 다른 직장으로 바꾸는 일은 가치를 잃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까 등가교환인 셈으로 합리적인간은 이것을 손실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전망이론에서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며 인간은 이득보다 손실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일단 두 직장중의 하나에서 일을 하게 되면 다른 직장의 가치는 다르게 된다고 말한다. 월급이 많은 직장에서 일단 일을 하게 되면 월급이 적은 직장으로 이직을 하는 경우 월급이 줄어든다. 즉 월급의 손실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휴가가 늘어나는 이득이 생기지만 이미 월급이 많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 사람은 손실에 더 민감하다. 즉 있던 곳에 계속 있으려고 한다. 반대로 휴가가 많은 직장에 있던 사람도 휴가가 줄어드는 손실에 더 민감해서 월급이 늘어나는 이득만으로 휴가가 적은 직장으로 옮기는 것을 동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카네만의 주장은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의 입장이란 것을 집어넣어야 인간의 선택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망이론은 여전히 객관적인 이론이다. 다시말해 이런 저런 조건의 직장에 있으면서 다른 직장을 바라볼 때 다른 직장은 여전히 정해진 값의 가치를 가진다. 

 

고전적 경제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으로서 전망이론이 설명해 낼수 있는 예에는 소유효과 (endowment effect)라는게 있다. 이것은 어떤 물건이 객관적으로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고전적 경제이론의 말과는 달리 같은 물건인데 내가 그걸 사기 전과 사고난 후에 그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는 효과를 말한다. 

 

당신이 그림이나 와인이나 프로야구 카드를 수집하는 팬이라고 하자. 당신이 뭔가를 사기전에는 예를 들어 한병의 와인을 사기전에는 물론 그 값이 너무 비싸면 사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와인한병에 백만원 이상은 지불하지 않을거야. 저것도 백만원이면 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일단 그 와인을 사고 나서 그 와인에 애착을 가지면 즉 돈처럼 단순히 교환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백만원을 제시해도 그걸 안 파는 것이다. 시장에서의 교환이 등가가치를 가진 것을 교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델은 사람들이 많은 것들에 애착을 가지며 따라서 그 가치가 소유하기 전과 소유하고 나서가 달라지는 비대칭성이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분열하는 자아

 

카네만의 경제이론은 그래프안에 경제활동을 하는 한 개인의 현재 상황이라는 변수를 집어 넣었다. 사람이 앉기 전에 생각하는 것과 앉고 나서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은 때로는 너무나 터무니 없어서 도저히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많다는 것이다. 같은 판단을 하는 것인데도 그것을 손실로 표현하는가 이득으로 표현하는가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린다. 어떤 인간이 비일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준에 따르면 사물의 가치가 어떤 객관적인 값을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판단을 내리는 경로에 따라 다 다른 값을 가진다. 이걸 생각하면 경제학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학문일지 모른다. 

 

인간마음이 만들어 내는 오류중에 극단적이고 인상적인 예들을 카네만은 적을수록 더 많다 (less is more)라는 원칙의 사례로써 설명한다. 그것은 마치 1+1은 0이 되는 것같은 오류다. 그건 컵 10개는 만원에 사면서 거기에 흉한 컵 2개가 더해져 있는 세트는 8천원에도 안 사겠다는 식이다. 흉한 컵들을 버리면 되는데 말이다. 

 

그가 소개하는 적을수록 더 많다는 원칙 예들 중에는 고통에 대한 실험이 있다. 실험에서 피실험자들은 두가지의 상황을 경험한다. 하나는 차가운 물에 60초간 손을 담근다. 이 물은 차가워서 어느 정도의 고통을 주는 경험이 된다. 두번째 상황은 차가운 물에 60초간 손을 담그고나서 다시 30초간 더 그대로 있는 것이다. 다만 후자의 30초동안에는 물에 뜨거운 물이 섞여들어가서 차가운 정도가 완화된다. 즉 첫번째 상황은 고통이 갑자기 끝나고 두번째 상황은 30초간의 유예기간을 두고서 천천히 끝난다. 그렇다고는 해도 물은 여전히 차다. 

 

실험결과 80%의 사람들은 두가지 상황중에서 선택하여 다시 반복해야 한다면 두번째 상황이 더 좋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번째 상황이란 사실 첫번째의 상황에다가 30초동안 더 고통을 받는 기간을 더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번째 상황이 전반적으로 덜 고통스러운 상황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예에다가 적을수록 더 많다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다. 

 

고전적 경제학이 상정하는 객관적 가치의 그림에 카네만은 관찰자의 입장이란 걸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관찰자는 당황스럽게도 분열하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입장이라는 것이 유동적이다. 시스템1이 저지른 일을 시스템2의 마음이 잘 분석해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을 한다. 서류에다가 장기를 기증하실거라면 말씀하세요라고 묻는 것과 장기를 기증하지 않을거라면 말씀하세요라고 묻는 것은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어느쪽이 정상상황인가를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그 반응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장기기증같은 중요한 일에서도 질문하는 방식의 작은 차이때문에 이 나라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기기증을 약속하게 하고 저 나라에서는 겨우 몇퍼센트의 사람만 그렇게 하게 한다. 

 

우리는 기억에 따라서 선택을 하는데 우리의 기억은 좀 이상한 저장방식 혹은 압축방식을 가진다. 마치 위에서 설명한 고통을 평가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어떤 경험에서 최대로 행복했거나 고통스러웠던 부분과 그 경험의 마지막 부분이 그 경험의 전반적 평가를 결정하고 시간에 대한 고려가 사라진다. 즉 일단 기억의 세계로 저장된 체험은 10분고통스러웠냐 20분고통스러웠냐가 별로 상관없어진다는 것이다. 

 

끝이 나쁘게 끝난 휴가는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으며 길고 오래 온건한 정도로 잘 지낸 휴가는 별로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주목할만한 부분은 그 경험의 중간중에, 즉 그 휴가중간에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기간중에는 실제로 행복했고 고통스러워해 놓고는 우리는 엉뚱하게 기억하고 다시 그 엉뚱한 기억에 따라서 사물을 판단한다. 2주 내내 행복해 놓고는 마지막 하루가 나쁘면 나쁜 기억으로 여기고 반대로 대부분 엉망진창이었지만 마지막에 행복한 하루를 보낸 휴가는 좋은 휴가처럼 기억한다. 

 

사실 우리가 일상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때도 우리는 정확히 같은 점을 발견한다. 백설공주 이야기같은 것을 생각해 보라. 그 이야기는 중요한 장면들을 말한다. 거기에서 공주가 성에서 몇년을 살았는지 난쟁이들과 몇년을 그렇게 살았는지는 거의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리고 항상 이야기의 끝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이야기는 실제의 체험을 잘 반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럭저럭 온건하게 행복하게 살다가 끝에 고통스런 5분의 고문을 당하고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또 한사람은 대부분의 인생을 훨씬 고생하고 고통스럽게 살았지만 몇번의 영광의 순간이 있었으며 죽기전 5분동안 인생 최대의 행복을 누리고 죽는다. 우리는 대개 후자의 이야기를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그 각각의 인생의 매순간에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를 기록한다면 결과는 다를 수 있다. 후자의 인생이 가지는 기록의 대부분은 고통과 후회의 기록뿐일 텐데도 그렇다. 우리는 이야기의 끝에 너무 집중한다. 사실 인생과 시간에는 끝따위는 없는데 말이다. 

 

카네만은 이것은 매우 모순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체험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가 서로 다르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이런 식으로 기억한다는 점 때문에 행복이 뭔지를 말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지금 이순간 우리 사회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사회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체험하는 나를 강조하는 견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이 그 시절에 행복했었냐고 물었더니 그 기억을 다르게 기억한다면 정치적으로 그런 사회는 어떻게 유지될 수가 있을까, 아니 그게 바람직한 사회이기는 한걸까?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체험이 아니라 기억이 아니던가? 카네만의 말은 사람들은 길고 좋았고 안전했던 시절, 안전도 복지도 외교도 국방도 모두 그럭저럭 굴러가서 나름 행복했던 시절을 지나치게 사소하고 별일 없었던 때로 기억한다는 이야기다. 고통스러운 독재속에서 괴롭다가 민주화운동으로 조금씩 좋아지던 시절에 대한 경험을 끝이 좋았으니 별로 힘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약간의 욕심때문에 그 시절로 돌아가도 뭐 큰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기억에 따르면 독재시대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작 그 시절에는 너무나 불행했고 간절히 그 시대를 탈출하고 싶었으면서 말이다. 

 

맺는 말

 

카네만은 이 책의 목적은 인지적 환상을 쉽게 인식하기 위한 언어와 개념들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소박하게 말한다. 그러나 책이란 쓰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 혼자서 자기길을 가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자연스레 카네만의 평생의 연구를 돌아보는 연구의 집대성처럼 변했고 자신의 연구과정을 돌아보면서 어느정도 자서전처럼 변했다.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줄만한 연구생활에 대한 일화들을 많이 들려준다. 그러다보니 이 책은 무미건조하게 인지적 환상을 쉽게 인식하기 위한 언어를 집대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카네만이 평생 추구해 온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집대성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 그 계속 되는 연구와 연구속에서 우리는 평생 하나의 연구에 몰두해 온 인간 카네만을 느끼게 되고 나는 그에 공감하여 이 책의 진정한 이름은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이론을 찾아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카네만이 반복하는 메세지는 무지와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상황이 불확실하다고 해도 행동을 하고 봐야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판단은 대개 시간의 제한이 있고 때로 그 제한은 매우 크다. 즉 호랑이가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우리는 호랑이가 있는 것같으면 긴장하거나 도망가야 한다. 거기서 호랑이가 이 지역에 나올 확률은 1%다 같은 확률계산을 하고 있다보면 죽을 수 있다. 호랑이가 실제로 있는데 그걸 예측하는데 틀리면 그 댓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비용이 너무 크다. 극단적 상황에서는 확률계산따위는 할필요가 없다. 

 

아마도 이때문일지 모른다. 이런 환경에서 진화한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을 확률적으로 잘 따져서 합리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극단적 상황처럼 처리한다. 우리가 몇개의 경우를 가진 도박을 한다면 합리적인 베팅은 당첨확률에 비례해서 돈을 거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는 거의 확률이 없는 것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거의 확실한 것도 위험이 크다고 생각해서 베팅을 왜곡한다. 20년정도 동안 무슨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초등학생이 글하나 잘쓴다고 하면 당장 우리 아이는 커서 소설가가 될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는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서면 사회적으로는 그런 사람을 전문가 대접하거나 CEO를 시키거나 대통령을 시킨다. 즉 할수 없다고 인정하는 솔직한 지식인을 처벌한다. 불확실한 것을 불확실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아는게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카네만은 행운과 이유없이 일어나는 일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르고, 이유가 없을 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진다. 그저 우연히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한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라고 카네만은 여러가지 예를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런 불확실의 세계 그리고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인간의 마음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살수 있을까. 아주 힘든 일이다. 우리의 마음, 시스템1은 쉽게 교육되지 않는다. 카네만은 여러번 뮬러-라이어 환상을 예로 든다. 

 

 

 

 

이 환각에 익숙한 사람은 직선부분의 길이가 같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화살표의 표시가 어찌되건 길이가 같다는 것을 알아도 여전히 우리에게 화살표 방향이 다른 직선들은 길이가 달라보인다. 우리가 저지르는 인지적 환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걸 알아도 인지적 환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 우리가 이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구나하고 이 책같은 책을 읽으며 그걸 알게 되어도 우리가 의식적으로 주의하지 않는 한 실수는 반복된다. 카네만은 통계학전공자나 심지어 자기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고 말한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은 일관성이 없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합리적 인간이라는 마음의 모델은 아주 많이 틀려 있다. 카네만은 합리성의 기본적 정의는 일관성인데 인간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간은 오류를 범하는 존재라고 할 때는 그 말의 의미는 통상 우리는 가끔 잘못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네만이 보여주는 인간은 아주 고질적으로 오류를 범한다. 이런 프레임에 넣으면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프레임에 넣으면 저렇게 행동해서 인간은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자유주의 믿음은 믿을 수가 없다. 

 

인간이 합리적이라면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고 자유의지에 의해서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약을 먹든 자살을 하건 말려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실은 인간은 약간의 암시와 조작으로 전혀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때문에 국가와 기관은 인간의 이런점을 적극적으로 인지해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수정된 자유주의인 자유주의적 온정주의 (libertarian paternalism) 가 주장된다. 이것은 좀 무섭게 들리지만 현실을 보면 국가나 공익기관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기꾼들이나 회사들이 계약서나 광고에서 그 점을 이용해서 대중을 악용한다. 결국 인간정신의 약점은 누가 건드려도 건드리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왜 어떤 것을 가입할 때 네라고 계속 누르면 자동적으로 이러저러한 서비스에 가입하게 만드는가라는 비판을 듣는다. 카네만에 따르면 그래서 이미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심리학자들을 고용하여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예에는 기업들의 활동을 감시하는 것 이외에도 연금에 들겠다고 하는 선택을 신청서에서 기본으로 한다던가 차의 기름소비량을 갤런당 마일이 아니라 마일당 갤런으로 표기하게 하는 것같은 것이 있다. 

 

카네만은 결국 언어의 개발과 사용밖에는 합리적 삶으로 가는 길이 없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이 책의 목적은 우리의 인지적 환각을 알아보고 거기에 대처하기 적합한 언어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보다 분명한 그림을 보여주는 마음의 이론을 가지게 될 때까지 마음이 실패하는 사례의 모음집 같은 것들은 분명 유용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책에는 카네만의 문제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이있다. 그는 그것을 언급하고 스스로의 당혹감을 말하면서 철학자들도 고민할 문제라고 하거나 행복의 정의는 어렵다고 말하면서 넘어간다. 그는 스스로가 전문가이기 때문에 판단에 있어서 프레임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으며 세상에는 여러가지 프레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어떤 특정 프레임을 통해서 뭔가를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같다. 그 결과 우리가 매순간 느끼는 감정의 총합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는 결론으로 나간다. 즉 매 한순간 한순간의 의미를 그 순간의 느낌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위해 그는 experience sampling 방법이니 day reconstruction 방법같은 것을 써서 사람들의 행복감을 기록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억하는 나가 충분히 옳지 않으니 기록된 매 순간의 체험하는 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매순간의 총합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는 표현은 그 나름의 설득력과 감동이 있지만 비판할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삶의 총체성과 상호연관성이 무시되고 삶이 단순적분으로 표현된다. 

 

이런 사람을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연구를 해서 어떤 결과를 얻었고 그 결과로 그는 평생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그가 죽고나서 그 연구결과가 전혀 엉터리인 것이 판명난다면 이야기를 중시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의 인생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카네만은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하나의 사실로 다 뒤집는다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냐고 말한다. 

 

카네만이 지적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매순간의 행복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은 좋은 메세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도 틀리지 않다. 사실 카네만의 방식을 극한으로 몰고가면 어떤 인간이 순전한 환각속에서 개인적 행복에 살면 그것도 훌룡한 삶이라는 관점에 쉽게 동의하게 된다. 

 

세상에는 여러 개의 프레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프레임을 무시하려고 하거나 어떤 절대적으로 큰 프레임을 생각해서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행복과 가치는 언제나 우리 각각이 선택한 프레임위에서 평가할수 밖에 없다. 따라서 행복한 날 + 행복한 날 은 두배로 행복한 날이라는 산수는 통하지 않으며 백명의 행복은 한명의 행복보다 크다는 산수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문맥과 프레임위에 있다. 행복한 사회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어떤 관점을 공유하고 그 위에서 언제나 관점과 프레임의 한계, 우리의 유한성과 이야기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불확실성을 인지하면서 살아갈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결국 인간은 삶을 각각의 단순합이 아니라 총체적인 이야기로 파악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 부분을 무시하고 삶을 구성하면 언제 어디선가 삶의 의미가 폭삭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인지적 환각에 대해 한마디만 하고 이 글을 끝내고 싶다. 카네만은 위에서 보여준 뮬러-라이어 환각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피할수 없거나 적어도 피하기 매우 어려운 환각을 논한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다 어떤 의미에서 환각이다. 누군가가 내손에 총을 쏜다면 나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란 사실 나의 뇌가 만들어 낸 환각이다. 실재하는 것은 손에서 내 뇌로 전해지는 신호다. 그 신호가 고통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어야 할 절대적 이유는 없다. 그러나 물론 나는 그게 환각이란 걸 알아도 여전히 고통을 느낄 것이다. 나는 의지로 그것을 부드러운 촉감으로 바꿀 수는 없다. 

 

이런 인지적 환각의 최고봉은 혹시 나라는 환각이 아닐까? 카네만이건 고전적 경제학자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있건, 여러가지 프레임을 고려하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거기에는 단일한 나가 있다고 느낀다. 물론 카네만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 나는 이럴 때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행동해서 그 나라는 것은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프레임과 문맥과 이야기를 넘어서 거기에는 행동하는 주체인 나라는게 독립적으로 일관성있게 존재 한다고 믿는다.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은 확실한 지식을 내적 성찰로 얻을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믿어져 왔다. 그러나 이 말을 가만히 보면 나의 존재이전에 이야기가 존재하고 인과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은 A가 있었으니 B가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안쪽이 있으니 바깥쪽이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연극이 없어도 연극배우가 존재하듯이 우리가 그렇게 프레임과 문맥과 이야기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일까?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이야기가 없어도 줄리엣은 존재하는 것인가.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그 확신이야 말로 우리가 피할수 없는 인지적 환상이며 프레임과 문맥과 이야기를 빼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본질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야기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파악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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