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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인간을 묻는다 (Jacob Bronowski)를 다시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4. 7. 30.

2014.7.30

나는 이 책을 이미 몇년전에 읽고 그 소감을 써둔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내 감상이 좀 달라졌고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기회가 있었기에 그 소감이 사라지기전에 다시 그 요약을 써두고자 한다.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수학, 생물학, 통계학의 연구자이자 문예지의 창간자이고 시인 블레이크의 연구서를 써내기도 했던 다재 다능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는 일찍부터 과학이나 문학같은 어떤 특정한 분야를 넘어서는 인간 지식의 전반적 모습에 대해, 따라서 자연히 인간과 과학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책을 썼던 사람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identity of man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과연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왔으며 답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한 결과다.  브로노우스키는 인간이란 계속 변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얻고 세상과 우리자신을 인식하게 되는가에 따라서 그 정체성이 변화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치 사과가 뭔지를 그것을 보고 듣고 만지며 사과에 대한 실험을 함으로써 알게 되듯이 인간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누구인지를 인식함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에 대해 묻기 이전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뭔가를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 즉 지식이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자연히 등장하게 된다. 브로노우스키는 우리가 뭔가를 본다고 하는 것이 그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보를 선택하는 작업이 관여되고 정보의 되먹임이 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눈은 세계에 대한 선입견없는 정보를 주는 정보의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뇌의 상위부분에게 자기가 볼 것을 기대하는 것을 선택해서 보여주는 기관이다.  이것은 지식을 위한 어떤 다른 과정에서도 옳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라고 할 때 그냥 그것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어떤 인식 혹은 실험의 형식을 도입하고 그것이 우리의 지식의 내용을 제한한다. 우리가 단 한가지 방식으로 얻은 지식이 가능한 모든 지식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면 다른 방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지식을 부정하고 차차 그 방면에 대해 더욱 무지해 지게 된다.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사실 어떻게 여러가지 다른 종류의 양태를 가진 지식이 존재할 수 있게되는가를 이해함으로써 그런 지식들을 우리의 내부에 상호충돌없이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가 하는 것이다.  작가는 책에서 과학과 문학이라는 두개의 문화가 충돌하는 현상을 논한다. 즉 과학과 문학은 모두 어떤 지식을 제공해 주는데 그 지식이 생기는 양식이 서로 다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과학의 신봉자는 문학을 무시하고 문학의 신봉자는 과학을 무시하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어떤 특정한 양태의 지식세계에 더더욱 무지한 상태에 빠지게 되어 버리게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글에서 그냥 과학과 문학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지식이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고 그 예들로서 과학과 문학이 거론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과학과 문학을 일본에 대한 지리적 지식과 한국에 대한 지리적 지식같은 지식들에 대해 그렇게 하듯이 같은 차원에 놓고 그저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이라고 말하는 태도로는 과학과 문학의 충돌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한쪽에 공감할 수록 다른 쪽을 부정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내부에서 과학과 문학같은 서로 다른 지식의 양태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식이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그 이전의 단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문학과 과학이 각각 어떤 한계를 가지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즉 지식의 분야들을 통합하기 위한 그 상위의, 메타적 시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우리는 과연 뭔가를 어떻게 해서 알게 되는가. 인간이라던가 사과라던가에 대해 뭔가를 알기위해서는 우리는 적어도 두개의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는 적어도 애매한 수준에서 저것이 인간이고 저것이 사과라고 인식의 대상을 지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두번째는 그 대상에 대해 어떤 특정한 관찰이나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과가 뭔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과를 집어서 먹어 볼 수 있다. 그럴때 사과의 맛이 우리에게 사과에 대한 정보를 주고 사과의 의미를 강하게, 더 정교하게 만든다. 우리는 사과와 배의 무게와 색과 모양을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에너지라던가 시간이나 질량같은 개념을 쓰면서 과학이론을 전개할 때도 마찬가지다. 즉 과학자들이 수학적 논리적 일관성과 실험을 통해 뭔가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이란 무엇인가, 질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는 과정이며 따라서 과학자들이 뭔가를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과학같은 정량적 학문에서 조차 어떤 개념의 의미는 애매함없이 단하나로 지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고 그것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과 같다. 우리는 여러가지 단어를 만들고 그 단어들을 서로 관련되어 사용함으써 그 단어들의 뜻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 간다. 친구가 뭔지, 부모나 자식이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를 배워가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란 세계에 대한 묘사내지 이해를 위한 이론이나 수단이며 과학은 문학이 그러하듯이 여러가지 가능한 언어중의 하나다.  

 

과학의 기본적 출발점은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없이 과학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이것이 일반적으로 모든 지식의 자명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래에서 설명하듯이 그렇지는 않고 바로 이러한 점때문에 과학이라는 언어 혹은 과학적 지식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관찰자 개인에 대해서 완전히 혹은 거의 무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 부분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지식의 다른 양태인 문학이다. 브로노우스키는 문학은, 적어도 훌룡한 문학은 그 본질에 애매함과 다의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훌룡한 문학은 이것이 옳다던가 틀리다라고 교훈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핵심은 어떤 윤리적 가치적 선택의 상황에 그 글을 읽는 사람을 놓게 만들고 그런 체험을 통해 글을 읽는 사람이 바로 개인인 그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즉 문학은 자아에 대한 지식을 준다. 문학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대로 마치 우리가 온도계를 물에 담가서 그 온도를 발견하려고 하는 시도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깡패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자. 그런 순간 우리는 피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 그냥 길을 갈 수도 있고 과감히 그 상황에 개입할 수도 있다. 또는 어떤 고되고 힘든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길을 걸을 수도 있고 그냥 포기하고 일상에 매몰될 수도 있다. 우리는 뭔가를 선택해야 하지만 훌룡한 문학작품이 잘 묘사하듯이 종종 그 선택은 아주 당연하지 않다. 따라서 정답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것을 택한다. 그런 선택의 순간을 체험할 때 우리는 바로 우리의 자아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즉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아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을 여러가지 상황에 놓여지게 만듬으로써 우리가 자아를 발견하게 하는 탐구의 방식이며 문학으로 부터의 지식은 그런 탐구의 방식을 전제로한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 세계를 전제하기 때문에 어떤 한 개인이 그것을 이해하고 말고에 그 의미가 흔들리지 않는다. 전자렌지의 원리를 몰라도 우리는 전자렌지를 쓸수 있고 중력의 법칙을 몰라도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반면에 문학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다. 즉 개인적으로 그 문학작품을 읽고 거기서 제공하는 체험을 함으로 해서 자기를 느끼게 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그 개인에게 의미가 없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문학은 애매하고 주관적인 허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아에 대해 말할 때 훌룡한 문학은 우리의 자아에 대해 매우 정교한 지식을 제공해 주며 반대로 문학의 눈으로 보면 과학은 자아에 대해 한없이 애매한 지식만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개성이 말살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하는 행위를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종종 과학은 비인간적인 것이며 문학은 인간적인 것으로만 채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완결된 지식 혹은 지식체계로서 과학은 개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지만 과학은 시간에 따라 인간의 의지에 의해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고전역학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의해 대체되었듯이 우리가 아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론은 언젠가 다시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씌여질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어떤 형식을 띄게 되는가 하는 것, 무엇보다 어떤 새로운 과학이 만들어 지는 것 자체가 인간의 노력과 가치판단에 달려 있다. 우리는 소립자이론에서 개인을 발견하지는않지만 소립자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에는 여러인간들의 내적 가치판단이 반영되어있다. 왜 그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병원을 짓거나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식량원조를 하는 대신에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거대한 성당을 왜 중세유럽인은 지었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하기에 익숙한 과학자들은 비록 연구의 결과와 방향에 대해 공감하기 어려운 경우라도 서로에 대해 관용과 존경을 마음을 가지며 이는 다른 과학자의 과학하는 노력과 태도를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자는 차가운 논리만을 다룬다는 문학전공의 사람들이 가질수 있는 선입견은 올바르지 않다. 오히려 과학은 열정과 헌신의 마음으로 발전한다. 


반면에 문학도 개인적 자아차원에서만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문학작품을 읽는 개인이 뭔가를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이 지구에 단 한사람, 바로 그 작가 밖에 없다면 그것은 작품으로서 공공적인 가치가 거의 없을 것이다. 즉 하나의 문학작품이 완전히 한 개인의 사적인 언어로만 채워져 소통불가하며 다른 개인들에게는 아무런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없다면 좋은 문학작품으로 말해질 수 없다. 문학작품은 다수의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측면을 다루며 그것을 보편적 개념, 단어로 기술하기 때문에 다수의 인간에게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 될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평균적 인간을 다룬다. 개성적으로 보이는 문학작품속의 등장인물도 실은 어느정도 평균적인 성격적 특징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낸 기성품같은 창조물일 수 밖에없다. 


사람들은 같은 작품을 읽고 다른 것을 느낄수도 있지만 여러사람들이 뭔가를 느낀다는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도 그리고 그 형식에 있어서도 보편성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시가 운율을 가진다던가, 이야기의 구조가 심리학에서 다루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을 반영할 때 적절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던가 하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과학의 눈으로 보게 되면 인간의 과학적 측면을 알게 되고 우리가 문학의 눈으로 인간을 보게 되면 문학적 측면 혹은 자아의 측면에서 인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둘은 모두 틀리지 않다. 또 우리의 과학과 문학은 모두 역사의 산물이며 따라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되고 최종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과학이 보여주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넘어서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을 탐구해야 하는 동시에 과학과 문학이외의 어떤 형식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형식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의 다른 형태인 음악이 보여주는 세상 그리고 음악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인간은 과학과 문학의 인간과는 다를 것이다. 브로노프스키는 여러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흉내내고 연기를 하는 행위를 통해서 다른 사회적 역할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우리에게 또다른 어떤 인식의 방법 특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해주는 방법일 것이다. 


나는 연극이나 문학, 과학, 음악 이외에도 게임과 같은 다른 형태의 활동은 또 다른 지식을 우리에게 줄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한다. 우리는 심지어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먹고 마시는 상업적 활동을 통해서도 인간에 대해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종류의 문화운동, 게임에 참여함으로서도 인간과 우리의 자아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은 그 자체가 우리의 자아를 재창조해내는 과정일 것이다. 

 

여기서는 한가지를 다시 강조하고 한가지를 언급하면서 이 소감문을 끝내고 싶다. 다양한 체험이 다양한 지식을 준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적 일관성을 원하던 원하지 않던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식의 습득과 조합에 대한 그 상위의 이해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다양한 체험들은 서로를 파괴하고 우리가 어떤 새로운 체험을 하고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우리는 과학과 문학을 두고 적대적인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처럼 어떤 사람들을 무의미하게 미워하고 하찮게 평가하게 될 것 이다. 

 

그 말은 거꾸로 말해서 이 지식의 공존이라는 문제가 해결될 때 우리 앞에 아주 넓은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브로노우스키가 생각한 인간발견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말하자면 문학 혹은 과학이라는 단일한 형식의 지식이 세상에서 유일한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며 그러한 착각 속에서 인간이 단순한 기계라고 선언하거나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따위의 말은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말들을 할때 사람들은 자기가 과학이나 문학이 혹은 기계가 뭔지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인간이 기계라고 말하거나 기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사실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계에서 무슨 의미를 발견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오늘날 과학적 지식의 누적에 의해 과학적 인간관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20세기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론의 한계가 연속적으로 폭로된 시기였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은 절대적 진리가 인간의 마음을 통해 발견될 있다는 예로 오래 사용되어졌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알려지면서 기하학은 자신이 자연을 제대로 반영하는지 안하는지를 스스로 판단할 없는 추상적 시스템일 뿐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괴델의 정리라던가 튜링의 업적을 통해 하나의 논리적으로 완결된 시스템도 있을 없다는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따라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시스템은 태생에 있어서도 논리적 자기 일관성에 있어서도 세상 전부에 대한 무모순적인 지식체계가 될수는 없다. 저자는 이러한 측면에 대해 언급하고 마지막장을 그것을 위해 쓰기도 했지만 부분은 아직 의미가 확실치 않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책을 쓴지는 벌써 수십년이 지났고 우리는 21세기를 살지만 아직 이러한 새로운 발견들이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말할 없는가를 지적하는 정도에 멈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수천년부터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 말해 것과 다르지 않다. 바로 우리는 여전히 매우 무지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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