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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형식과 내용

by 격암(강국진) 2013. 11. 12.

13.11.12

예술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

 

예술은 여러가지 제약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큰 제약을 말하자면 음악은 소리를 통해서 표현을 해야 하고 그림은 2차원적인 시각패턴을 통해서 조각은 3차원적인 물체의 모양을 통해서 작가가 원하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 문학의 경우에는 그것이 대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로 이뤄져 있다는 것,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어나 중국어나 영어로 되어 있다는 것이 제약과 형식이 된다. 물론 이런 형식은 더 자세히 들어가면 더 많이 존재한다. 회화도 유화냐 수채화냐가 있는가 하면 여러가지 유파의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형식을 정해서 그림을 그린다. 시에는 운율이 있는 시가 있다.

 

제약과 형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보통 그것을 한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술의 핵심은 어쩌면 그 한계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즉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술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문학에 적용하자면 문학은 일상에서 쓰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성립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반드시 예술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나 과학 일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계가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 이야기 만들기 혹은 소설쓰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떤 이야기가 성립하기 위해서 그 이야기안에 어떤 제약조건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두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아무런 한계나 갈등이 없다면 그 이야기는 사실상 시작하자 마자 끝나고 만다.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두 남녀가 과거의 경험때문에 망설인다던가, 사회적 관습때문에 사랑이 이뤄지기 어렵다던가, 양쪽 집안에서 반대를 한다던가 하는 어떤 어려움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사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한계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한계나 제약은 하나의 질문이되고 만들어 지는 이야기는 그 답이 되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체험은 장애아를 둔 자신의 실제 상황을 기반으로 씌여진 소설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그 아들은 기형아였고 아마도 당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 분명하다. 그럴 때 당신은 그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되고 어떤 것을 선택하게 되는가. 이 이야기는 직접적으로는 물론 구체적으로는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선택에 대한 것이지만 좀 더 물러나서 보면 이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이 상황, 이 이야기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을 어떤 구체적 상황속에서 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의 제약과 형식은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제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어떤 것을 내놓게 된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저자는 글쓰기에 대해 망설이는 학생을 지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그 학생에게 점점 더 작고 제한된 주제를 주었다. 그 학생에게 좀 광범위한 주제, 예를 들어 뉴욕에 대해 써보자라고 하면 글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제가 점점 더 작아져서 뉴욕의 어느 건물의 왼쪽 끝 마지막 벽돌이라던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에 대해 써보자라고 하면 글을 쓸 수 없었던 학생들도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주제가 일반적일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리가 남이 모르는 뭘 말해야 하는지, 무엇이 흥미로운지 막연해 하지만 주제가 극단적으로 제약되게 되면 이제 무엇을 쓰건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글을 써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약이 극단적이 되면 우리가 거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가가 객관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표현하는 문제라는 것을 좀 더 알기 쉽게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의 형식적 제약도 분명히 우리에게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우리는 예술이 형식적으로 더더욱 제약이 심할수록 거기에서 쉽게 어떤 개인적인 것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각을 못하는 사람도, 네 다섯개의 레고조각만으로 뭘 만들라고 하면 자신있게 뭔가를 만들지 모른다. 가장 짦은 소설은 양자선택중의 하나로 답할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하나일 수있다.

 

여담이지만 이와같은 것은 최소한의 것을 최대한 잘 가르치라고 주장한 화이트헤드의 교육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이가 새로운 개념을 배울 때 개념을 너무 많이 배우게 되면 아이는 그 개념들을 쓰는 방법을 모르게 된다. 자유도가 너무 커서 자기를 발견할 수 없으며 그 개념을 통해서 문제나 세상을 보는 방식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개념들만 가르쳤을때 아이는 가장 쉽게 그 개념을 몸에 익히게 될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빨리 빨리 더 어려운 것만 가르치는 선행학습을 좋아하는 부모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형식은 예술의 핵심이다. 그러나 형식적 제약이 심하면 그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해 본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제가 너무 광범위해서 글쓰기가 안되는 학생이 겪는 문제의 반대다. 이번에는 마음속에 표현하고 싶은 내용이 넘쳐나는데 예술의 형식이 지나치게 엄격하여 표현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따라서 표현된 것들이 같은 것의 반복처럼 보이거나 모순되게 보이게 될 것이다. 즉 뭔가 다른 것이 같은 것처럼 표현되거나 같은 것이 서로 다른 표현을 가지게 되어 모순을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을 모두 파괴해 버리고 나면 지나친 자유도를 통해 자기 표현이 불가능해 진다. 이러한 것은 불만과 긴장을 쌓이게 만들고 마침내 어떤 천재가 새로운 파격을 통해서 형식을 확장하면서도 자기 표현이 가능한 새로운 형식을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 천재란 제대로 질문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 형식 혹은 그 질문을 반복하고 그것에 대해 다시 풍요로운 답을 내놓으며 결과물을 생산해 내게 된다. 언제나 답보다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과학의 경우

 

이와 같은 것을 예술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라고 볼 때 이것은 반드시 예술의 영역에서만 사실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연을 묘사하는 다른 언어인 과학에서도 사실이다. 누군가는 예술은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고 과학은 자연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나 사실 인간은 자연을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자기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 자기는 같은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의 형식이란 과학의 형이상학적 전제이다. 우리는 자연은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 형이상학적 기초는 과학의 결과물이 아니라 과학의 전제이다. 예를 들어 세상은 물질로 이뤄져 있다던가, 인과론이 성립한다던가 하는 것이 그렇다. 우리는 이런 형식을 받아들이고 그 형식위에서 사고를 쌓아 올려서 자연을 기술하고 자연을 인식한다.

 

그런데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과학이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것인데 예술이건 과학이건 그 형식이 지극히 광범위한 자유도를 가지는 경우에는 우리는 종종 거기에 형식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아무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런 전제없이 과학은 출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술에 대해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현대예술을 만나면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현대예술은 과거의 예술에서 그 형식을 더 확장 시킨 것들이므로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의 눈으로 볼때 아무런 형식을 느끼지 못하기 쉽다. 따라서 작가가 그저 무한대의 자유를 혼자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기 쉽다. 현대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더 많은 과거의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과거의 형식을 파괴하면서 표현하고 싶어했던 그 새로운 감각에 대해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여러 과학이론들이 모여진 하나의 패러다임 혹은 그 과학이론들의 공통된 기반이 되는 형이상학이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 우리는 과학이 가진 형식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19세기말에 빛의 속력이 지구의 움직임과 상관없다라는 관측을 만난 경우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확장을 통해서 과학을 수정했던 것이다. 원자의 안정성이라는 문제와 만난 이후 우리는 양자역학을 통해서 과학을 수정했다. 이런 수정은 단순히 이전 이론의 소극적 수정이 아니라 동시성이라던가, 인과율, 위치, 입자등 과학의 기본적 전제가 되는 개념들을 바꾸는 일이었다. 즉 이전의 형이상학적 형식속에서 세상에 대한 묘사가 불가능했으므로 그것을 수정하고 확장한 것이다.

 

이런 수정이 이뤄지고 나서도 오늘날의 과학이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현대의 과학은 인식의 문제 혹은 몸과 마음의 이원론의 문제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은 마음이나 윤리나 가치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떤 과학의 형식적 한계극복을 통해 과학이 다시 한번 새로이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확실치 않다.

 

사회와 인간의 경우

 

마지막으로 나는 이 형식과 내용의 문제를 사회와 인간의 경우에 확장하여 이야기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이스라엘, 미국, 일본등 여러나라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다른 나라로 이동할때 마다 크고 작은 문화적 충격을 느끼고 그 나라들의 장단점을 경험하면서 나는 한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나라에는 자유의 부분이 있고 형식의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도 자유 자유하면서 자유를 외치는 것같지만 모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전제하에 여러가지 제약을 만들고 결국은 세계에서 가장 법이 복잡한 나라인것이 현실이다. 이스라엘은 종교국가나 민족국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일본도 자신의 전통문화를 통해 가지는 공동체 문화가 여러가지 제약을 가져온다.

 

이런 예들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제약이 확실하니까 혹은 그 형식이 확실하니까 자유가 온다는 것이다. 즉 여러 나라는 이것 저것은 질문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이다라고 못박고 그것을 신성시 하거나 금기시 한다. 그대신 그런 한계나 형식을 지키는 한도내에서 나머지는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다.

 

형식이 분명하고 그만큼 자유가 분명한 것이 잘사는 나라의 특징이다. 반면에 사회적 혼란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이 부분이 불분명한 것같다. 다시 말해 전통과 현대가 혼란을 일으키면서 뭐가 안되는 것이고 뭐가 자유인지가 불분명해 지고 결국은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결국 형식도 없고 질서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건 자유도 적다.

 

아름다운 사회란 하나의 예술과 같아서 그들이 정한 제약 혹은 정체성의 한계내에서 그들의 자유를 가지고 그들 자신을 표현해 낸다. 그럴 때 사람들은 효율적으로 서로와 소통하고 사업을 하고, 가정을 꾸려간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나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그 한계 혹은 그 형식을 통해서 표현되지 못하는 욕망이 있다고 할때 사회는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혼란스러워 지는 것이다. 그럴 때 사회는 그 한계나 형식을 확장할 필요에 접한다. 형식이란 질문이고 정체성이다. 

 

하나의 사회는 이상적인 상태에 머무는 천국이 될 수는 없다. 하나의 사회는 그 정체성을 통해, 다시 말해 그 사회의 형식을 통해 인간을 어딘가에 놓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추구한다. 법은 있지만 반드시 감시당하고, 강요당하기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 판단을 할 자유가 있는 가운데 각자의 개인은 각자의 선택을 하며 산다. 그리고 그럴 때 사회는 성장하고 행복해 하며 질서가 생긴다. 여러 다른 사회가 질문하고 있는 것은 같지 않다. 어떤 사회는 인간은 배고프지 않고는 살 수 없는가를 질문하는 반면 어떤 사회는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같은 것을 질문할 것이다.

 

이제까지 말한 형식과 내용의 이야기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응당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제약이 필요하다. 형식과 제약이 없는 삶은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 현대사회가 만들어 낸 풍요가 오히려 젊은 세대를 방황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이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이 넓은 세계를 이해하고 뭔가를 동경할 준비가 되기도 전에 너무나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20살 청년이 되기도 전에 뭐든지 다 해본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어린 아이들에게 마치 처음부터 가장 어려운 현대예술작품부터 줄줄이 보여주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자신들이 그 형식적 한계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복잡한 것들을 한계없이 소비하고 경험하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좌절하게 되기 쉽다. 그들은 욕망을 가지기도 전에, 질문을 가지기도 전에 소비하고 답을 듣는 꼴이다. 사랑이 뭔지 고민해 보기도 전에 사랑의 행위를 흉내낸다. 아마도 오늘날의 청년들은 세상에 난리가 나서 기존에 존재하는 시스템이 망가지고 우리가 가난해 질 때 오히려 행복해 할지 모른다. 도시가 정전으로 마비되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미친듯이 그들을 몰아가는 뭔가가 멈출 때 드디어 세상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하게 움직이게 된다고 느끼며 그들도 능동적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욕이 차게 될지 모른다. 그들은 드디어 자기를 발견할 수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인생의 형식은 우리가 느끼는것을 초과해서도 안되고 너무 미치지 못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인생의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다른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고 우리의 꿈이며 우리의 삶의 방식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질문이고 화두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러저러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이러저러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형식속에서 우리의 삶에는 난관이 나타나고 성취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내부적으로 성장할 때 때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우리의 삶의 방식을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의 방식이 우리의 내부의 내용과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최고의 삶이란 최고의 내용을 최고의 제약속에서 표현해낸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학생의 삶, 직장인의 삶, 부모의 삶같은 것이 모두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 예술작품을 보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희열에 젖는 것이다. 삶의 내용과 형식이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삶에 권태를 느끼게 되거나 부모없이 길잃은 어린아이처럼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맺는 말

 

최고라는 건 무의미하지만 최고의 삶이란 오히려 가난한 삶이 아닐까. 우리는 뭔가를 소유하고 그 소유는 우리 삶속에 어떤 형식을 즉 제약을 만들어 낸다. 가장 자유로운 삶이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무소유의 삶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소유하며 너무 빨리 그 쾌락을 채우고는 그 소유에 눌려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반면에 모든 것을 소유해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소유가 주는 제약이 귀찮아 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소유를 꿈꾸거나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지금의 형식이 지금의 내용을 즉  우리의 내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나쳐도 안되지만 부족해도 우리는 행복에 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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