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소거법의 논리와 확률의 논리

by 격암(강국진) 2013. 12. 24.

13.12.24

이 세상에는 그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것은 거의 없다. 물리학 방정식풀듯이 지금의 상황이 이러저러하면 결정론적으로 반드시 미래가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는 이상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근사일뿐 실제로는 가능한 모든 변수를 다 알지도 못하고 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도 다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상황에서 백번 같은 일이 생겨도 다음번에도 반드시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혁명적 변화가 이따금 있어온 것이다.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확률적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확률적 사고는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논할 때 중대한 의미가 있다. 우리의 관점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과학적 사고, 확률적 사고

 

 탐정 소설같은 것을 보면 명탐정은 여러가지 조건을 조합하여 용의자의 범위를 금방 축소해 들어가고 독자인 우리는 그 탐정의 예리한 지성에 놀라곤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답의 범위를 축소해 들어가는 식으로 좋은 결과를 보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다. 

 

논리적으로 축소해 들어가는 사고는 이렇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인범을 찾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남자이고 30대 이며 신월동에 살고 있다. 이렇게 정보가 더 생기면 생길수록 우리는 가능한 후보의 숫자를 줄여갈 수가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여자거나 70대라면 범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만이 논리적 사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소거법의 논리 혹은 배중률의 논리를 이 글에서 나는 논리적 과학적 사고라고 부르겠다. 실제로 수학이나 과학계에서는 우리는 이것이든지 이것이 아니든지가 분명한 정의에 기반해서 배중률에 충실한 논리를 쓴다. 

 

소거법의 논리는 물론 타당한 사고방식이지만 또한 약점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적용할 때 우리의 정보중 하나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범인을 잡을 수가 없다. 왜냐면 살인범을 찾기위해 우리는 대개 아주 여러개의 조건을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남자이고 30대이며 신월동에 살고 있다가지고는 당연히 정보가 충분치 않다. 따라서 여기에다가 키가 180이며 청바지를 잘 입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무서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으며 머리가 길고 왼손잡이인 사람이고 피해자와 한번 이상 만났던 적이 있는 사람 정도의 조건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만약에 이 많은 조건중에 한가지가 잘못되어 있다면 어쩔 것인가. 즉 목격자의 진술이나 정보가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은 이 조건들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진범은 절대로 진범이 아니라는 면죄부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범인이 30대라고 굳게 믿는데 실제로는 50대라면 50대인 범인은 의심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범인을 찾기 위해 쓴 정보가 하나뿐이고 그 정보가 매우 확실하다면 우리는 이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적다. 그러나 우리가 범인을 찾기위해 쓴 정보가 열개쯤이라면 혹은 20개쯤이라면 각각의 정보가 꽤 확실해도 이젠 그중의 하나는 잘못될 가능성이 꽤 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조건들을 통해 축소하고 소거하는 식으로 범인을 압축해 들어가면 범인에게 면죄부를 줄 가능성도 점점 커지게 된다.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 당연히 정보는 확실한 것만 써야지 불확실한 것을 쓰면 어떻게 해.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나라고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바로 그게 이 문제의 핵심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부딛히는 문제는 대부분 불확실한 정보들이다. 수학문제 풀 때처럼 무한한 정밀도를 가지고 참거짓이 갈리는 정보는 현실에서는 거의 없다. 만약 당신이 현실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가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과학적 논리의 맹신자인 이공계 학생들, 특히 수학과나 물리학과 학부생이 연애에 서툰 일이 많은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을 보면 정확히 내가 말하는 소거법의 논리에 중독되어있다. 교실 안에서는 그 사고방식이 생산적이지만 사회생활을 할 때 그런 사고는 바보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그런 관점에 중독된 사람을 어제 지구에 착륙한 상식이 없는 바보같아 보이게 만들기 쉽다. 

 

현실에서 어떤 정보는 더 정확하고 어떤 정보는 매우 불확실하다. 어떤 정보도 무한히 정확하지는 않다. 우리가 좀 불확실한 것을 전부 버리면 남는 정보가 거의 없으므로 우리가 정확한 정보에 집착할 때 우리는 대개 무능해 진다. 확실한 정보만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우리의 삶을 무식하리 만큼 단순하게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굴속의 쥐처럼 세상에 대해 무신경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확실한 것을 일단 믿자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드시 라고 할만큼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 오류는 때로 심각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은 기계론적 논리적 사고의 일반적 문제다. 이래서 정보를 압축하는 코드에서는 오류를 자가수정하는 코드를 쓰고, 초정밀 기계에서는 어떤 하나의 소자가 망가져도 전체시스템이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품이 몇만개씩 들어가는 기계의 경우에 부품 하나만 망가져도 그것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기계가 돌아가는 날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래서 공학계에서는 그래프를 써서 확률적 관계를 작성하고 조건부확률을 구해서 결론을 끌어내는 방식을 연구해 왔다. 불확실한 정보를 끌어모아서 확실한 결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우리는 불확실한 정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총체적으로 보고 그 안에서 어떤 전체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하나의 정보를 따로 따로 보는게 아니라 전체그림에서 어떤 것이 가능성 큰 그림인가를 느끼는 직관이 필요하다. 삼류탐정소설에서는 종종 그렇게 하지 않아도 기가막히게 범인이 잡히는데 그것은 그 세계가 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소거식의 논리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종종 문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모든 단서를 불확실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다 거부해 버리는 것이다. 

 

인과성과 책임문제

 

우리가 어떻게 사고를 하는가에 따라서 여러가지 일들의 책임문제는 달라져 보이게 된다. 우리는 종종 뻔한 오류도 저지른다. 예를 들어 이런 유명한 농담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는 침대이다. 왜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대위에서 죽기때문이다.'

 

원인과 결과를 뒤집었기에 나오는 이 어처구니 없는 결론은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피하기 그리 쉽지 않다.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그렇게 보이게 만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기 어떤 정치가가 있다고 하자. 그 정치가가 어떤 법을 바꿨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사망률이 만분의 1이 증가한다. 만분의 1이라는 것은 매우 작게 느껴지며 종종 통계적 오차의 안에 있으니까 현실적으로 어떤 정치적 행위도 그 정도의 변화는 일으킬 것 같고 따라서 이러한 사망률증가에 대해 민감해져서 이 정치가에게 비난을 퍼부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망률이 만불의 일이 증가한다는 말은 평균적으로 말해 -그게 무슨뜻이던지간에-  백만명이 있으면 백명이 더 죽는다는 말이고 오천만명이 있으면 오천명이 죽는다는 말과 같지 않던가? 

 

이렇게 다시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떤 정치가가 기관총을 들고 나가서 거리에서 오천명쯤을 쏴죽였다. 이럴때 이 정치가를 미친 범죄자가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정치가가 국민들이 오늘 죽을 확률을 만분의 1 쯤 증가시킨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이 경우 그 인과관계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백퍼센트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일은 거의 없다.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지 않게 보일 방법을 찾는다. 바로 중간단계를 몇단계 집어넣는 것이다.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당신이 당신의 집에서 키우는 소 칠칠이를 직접 죽여서 먹으면 당신은 그 소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 소의 죽음은 확률적인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간에 소매상 도매상 도축업자 소를 키우는 사람을 집어넣으면 당신이 슈퍼에서 스테이크 재료를 사는 행위가 칠칠이를 죽이는 결과에 이르는 것은 이제 확률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신은 스테이크를 먹는데도 소의 죽음에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한마리의 소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소중의 하나이며 당신은 그 프로세스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여러단계를 거치는 조건부 확률의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아주 자주 이런 식으로 우리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희석시키곤 한다. 

 

이래서 세상은 우리가 뭘 믿고 뭘 믿지 않는가에 따라서 종종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듯이 달라져 보이게 된다. 어떤 것이 확실하다. 예를 들어 빈민들에게 돈을 주면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 그들의 생활수준은 도로 나빠진다같은 법칙이 확실하다고 믿는다고 하자. 또 어떤 것은 불확실하다. 예를 들어 대통령일가가 소유한 땅이 하필이면 그 대통령이 크게 국책사업을 일으켜 엄청난 돈을 퍼부은 그 지역에 있어도 그것들은 반드시 인과관계로 얽혀있는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고 하자. 우리가 어떤 것을 확실하다고 믿고, 어떤 것은 불확실하다고 믿으며 또 소의 도축에 대한 것처럼 그 문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어떤 두가지 사실들의 인과관계는 매우 확실해 보이기도 하고 매우 작아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세상에 살아도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사고과정을 쫒아가다 보면 사람들은 종종 앞에서 말한 축소하는 논리의 오류를 범하는 듯하다. 즉 한가지 정보를 굳게 믿고 누군가를 범인으로 지목하거나 용의자 대상에서 제외해 버린다. 노무현이 퇴임후 집이 생겼다더라라는 정보면 노무현이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점은 의심할 바가 없다거나 이명박이 그 어려운 출세길도 뚫었다더라 라는 정보면 이명박의 능력은 대통령이 되기에 적합하고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그저 시기하는 사람이 되버리고 만다. 김대중시절에 북한에 돈이 갔다고 하면 역시 김대중은 빨갱이이며 이명박 시절에 더 큰 돈이 갔다는 말을 들어도 그것은 뭔가 잘못된 정보로 처리된다.

 

과학적 세계, 나의 세계

 

전체적 그림을 보는 능력은 객관적인 정보만으로 만들어 지는게 아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논리적 소거법적 관점을 맹신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주로 우리의 세상에 대한 관찰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만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즉 더 정확한 관찰의 결과가 우리에게 하나 하나의 작은 진실들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 작은 진실들이 우리에게 세상 전체에 대한 진실을 보여줄거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종종 기자정신이라고 추앙 받는 태도이고, 지금도  많은 지식을 나열하기 좋아하는 자칭 지식인들이 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정확하고 엄밀한 관찰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객관적 진실을 준다라는 것은 과학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된다. 

 

많은 과학자들은 오랜동안 확률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확률을 말한다면 그것은 관찰의 오류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더 정확히 관찰하라는 뜻이다정도로 주장하는 라플라스같은 과학자도 있었다. 위에서 말한 범인잡기 문제를 다시 기억해 보자. 이것은 말하자면 잘못된 정보를 믿었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류가 있다면 모든 정보를 더 확실하게 더 많이 수집하면 범인을 잘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태도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게을리하면서 안개속의 정보안에서 진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태도는 미신적이고 지나친 선입견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태도가 특히 생명과 사회문제같이 적응하고 변화하는 대상에 대해 생각할 때 한계를 가진 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위에서 과학적 시각이라고 부른 것에 중독된 사람들은 심리를 망각하고 인간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란 객관적이고 한가지 의미만을 가진 존재로 모두에게 수동적으로 똑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너무나 손쉽게 모든 인간이 같다는 식으로 사고한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먹으면 똑같은 정도의 행복을 누릴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그것도 대부분은 조악한 방식으로 객관화시키고 수치화 시킨 객관적 현실을 가지고 그들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지나친 확신에 빠진다. 

 

세상은 종종 그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는 복잡성 증가의 법칙같은게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두개의 사건사이의 인과관계가 매우 분명하면 우리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부자유스러워진다. 권력이 작아지고 수입이 줄어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대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 결과 이 세상의 복잡성은 증가한다. 

 

나는 앞에서 스테이크의 문제를 논했거니와 내가 자주 드는 자동차 수리소의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 수리소에서 타이어를 교체해 준다고 하자. 인터넷이 나오기 이전에 사람들은 그저 단골 수리소에 가곤했으며 타이어교체가격이 다른데서는 얼마인지, 주인이 얼마나 이익을 남기는지에 대해서 '불확실한 정보'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이 등장하고 가격비교사이트가 생겨서 사람들이 타이어교체가격의 상호비교가 쉬워지자 상황이 바뀐다. 똑같은 서비스에 대해 국내최저가를 주장하는 수리소만 살아남을 판이다. 

 

이것이 바로 타이어교체에 대한 사회적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진실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그들을 현명한 소비자로 칭찬할지 모르고 분명 그런 면이 있다. 하지만 자동차 수리소 주인은 수입이 없어도 먹고 살수 있는 기계도 아니고 언제나 변하지 않는 돌멩이도 아니다. 그들은 그런 가격경쟁이 무한출혈로 가서 그들 모두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말하자면 가격정보와 싸운다. 예를 들어 상품을 다변화하는 것이다. 타이어교체와 세차를 결합한 상품을 내놓는다던가 유리를 닦아주고 사은품을 주며 커피를 대접하고 자동차 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제 서비스들이 보다 복잡해 졌기 때문에 가격의 단순비교는 어려워졌다. 다시 말해 정보는 다시 불확실해졌다.

 

다른 면도 있다. 최저가격을 제공하는 업체만 살아남는다면 규모를 가진 체인점만 경쟁력을 가지고 결국 그런 시장에서는 최종적으로 거대 체인점이 독과점을 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소규모 가게가 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점적 위치를 이용해서 가격은 다시 올라갈지 모른다. 냉철하게 진실만을 추구하는 태도만으로 정말 세상이 살기 쉬워지는게 맞을까? 

 

실은 상대를 객관화하는 냉철한 관찰이란 대개 잔인한 결과를 낳고 종국에는 공동체적인 가치의 파괴를 낳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관찰대상으로 상대를 올려놓는 순간 우리는 그 관찰대상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힘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방금전에는 가족이었는데 지금은 도마위의 햄조각처럼 사물로 변한다. 그런걸 합리화운운하면 종국에 정말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정말 최선의 결과가 나올까? 

 

전세계에서 인구당 가장 많은 사람이 교도소에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법도 참 복잡하다. 그래서 그 법에 능수능란한 변호사도 많고 나중에는 변호사가 마치 정의를 만들어 내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러한 현실은 미국사회가 바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진실찾기를 더 맹렬히 추구한 결과일지 모른다. 결국 정보 빼내기와 복잡성증가의 연쇄가 종국에는 그 사회를 꽤뚫어보기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결과 저소득층이나 저교육층은 더욱 더 무기력해 진다. 앞에서 말한 타이어교체의 예처럼 소비자와 판매자간의 정보전쟁이 복잡한 상품을 만들면 마찬가지 일이 생긴다. 미국에서 전화서비스를 가입해 보려고 하면 읽을수 없을 정도의 약관을 고려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뭐에 동의하는지도 모르고 동의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과학적 태도를 비난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다만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걸 잊으면 상황이 좋아지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관찰은 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고 객관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무한히 정밀한 관찰로 객관적 진실을 찾겠다는 태도는 자명한 진실이 아니다. 대상의 복잡성이 증가하여 결국에는 관찰하나 하나의 정밀도도 떨어지게 된다. 한때 이 세상은 진실이 구한다면서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기자같은 사람들이 크게 높이 추앙받았으나 세상을 구하는 것은 냉정한 진실을 찾는 것을 넘어 운명공동체로서의 관계를 잊지 않고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을 잊으면 되지 않는다.

 

논리적 태도가 무엇보다 나쁜 것은 인간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진실은 객관적 관찰의 결과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찰도 결국은 우리의 눈과 귀를 포함한 오감기관으로 하는 것이며 우리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찰결과, 우리의 인식결과는 우리안에 존재하는 선입견, 프라이어에 기반한다. 우리 모두는 엄밀히 말해 다른 인생을 살아왔고 다른 경험을 가지기 때문에 무한히 같은 객관적 관찰결과란 있을 수 없다. 그건 마치 나이와 몸무게와 성별이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같은 분량의 식량을 주면서 그게 공평하다고 말하는 식의 오류다. 무한히 정확한 객관적 공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어떤 기준에 따르면 공평하다고 말할수 있는 선택중의 하나다. 

 

우리가 우리를 잊어버릴때 우리가 썩어간다. 우리는 매우 취약해 진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요즘 세상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밤을 새고 노력하기 때문에 소위 기득권이란 사람이 마법사의 지팡이 한번 까딱이면 그 복잡도가 금새 배로 증가한다. 머리좋은 사람들을 고용한 사람들이 말과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비기득권이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벽을 말이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공동체다라는 정신을 잊고 있는 동안 이것이 모두가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업비밀을 지키려고 하고, 경쟁에서 이기려고하고, 물건을 좀 더 싼값에 사고, 더 비싼 값에 팔아서, 같은 노동을 하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리려고 하며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정당한 댓가라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 댓가로 받는 착취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과 마음과 공동체를 잊고서 객관적 진실찾기로 세상을 좋게 만들자는 것은 가능성이 크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구체적 실체도 아닌 종북인 사람들이 한국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자회사로 분리한다던가 우리 집앞에 운하를 놓는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이 좋은거 아니냐고 하면 그냥 그렇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현학적인 세미나를 할 수도 있겠고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동정이나 필요에 의한 동지의식말고 그들의 삶에 진짜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지 부터 생각해야 할 것이다. 노인들이 고집불통이라고 한다. 당신들은 효자인가? 노인들의 삶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뭘 즐겨 먹고, 뭘 하면서 여가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노인들은 물리쳐버릴 적인가? 그들이 적이라면 당신도 그들의 적이니 싸우고 안 믿는게 당연하다. 그들은 그저 당신의 지식을 전수받아야할 대상인가? 잠재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그저 작은 댓가나 받아야할 비천한 존재다. 

 

장애인을 동정하는게 아니라 동등한 사회적 일원으로 생각하는게 중요하다는 지적은 여러번 있어왔다. 이 세상사람들이 대부분 눈이 하나라면 안경점에서는 눈이 하나인 사람을 위한 안경을 주로 가져다 놓는게 맞다. 거기서 나는 눈이 두개고 인간은 원래 눈이 두개니 그런 상품을 가져다 놓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세상은 인간이 살기 위한 세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옳은 세상에 인간을 무조건 가져다 붙이는게 아니라 말이다. 

 

결국 모두를 위해 적당한 정도가 어느 것인지를 모두가 함께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필요없는 경쟁으로 서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 멈춰질 것이다. 한사람도 빼지 않고 그렇게 되기는 어렵겠지만 인간은 본래 상식이 서게 되면 그것을 그냥 따르는 법이다. 사회의 중심이 될 사회적 공동체가 그 중심을 지키면 그 사회는 힘을 아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서로가 서로의 암세포인것처럼 자라나서는 모든 에너지를 소모해 버릴것이다.

 

소거법의 논리, 과학의 논리와 확률적 사고를 비교하면서 그 장단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나친 환상을 보게 되기 쉽다. 그런 눈에 세상은 분명 극단적으로 휘어져 보일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