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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과학자의 즐거움

by 격암(강국진) 2014. 1. 8.

14.1.8

여러가지 다른 직업들과 다른 체험들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온 세상사람들이 바나나가 딸기보다 맛있다고 말한다고 해도 바나나를 먹은 체험이 딸기를 먹은 체험을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과학자가 된다던가 화가가 된다던가 농부가 된다던가 우편배달부가 된다는 체험을 서로 비교하고 우위를 말할 수는 없다.  사실 나는 다른 것들도 가능하다면 해보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과학자라는 길을 택해서 이제까지 그럭저럭 살아왔던 것에 대해 특히 나의 2-30대를 과학공부와 연구로 보냈던 것에 대해 나는 매우 행운이라고 느낀다. 그것에는 여러가지 다른 자질구레한 의미도 있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떼어내고 가장 핵심적인 것만을 말해보자면 연구를 했던 경험때문이다. 

 

 

즉 과학이나 공학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풀어내고 정리해서 학술지에 발표하는 경험이다. 이론적으로는 과학자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과학연구는 퍼즐풀기와 같다. 그러니까 아주 어려운 수도쿠 문제를 풀고 그 방법을 정리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과 비슷한 체험을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특히 요즘 세상에서 젊은이가 어떤 문제풀기에 대해 그정도로 진지해 지기는 어렵다. 우리는 미래의 일자리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학술지에 발표한다는 영예를 생각하게 되고, 남에게 여러번 심사를 받으니까 그걸 고치게 되며 여러번 학회에서 발표하면서 그것을 가다듬게 되기 때문이다. 레고블럭을 가지고 방안에서 뭔가 어려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도 때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과학연구를 할 때만큼의 진지함을 가지게 되기 어렵다. 그 진지함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깊은 변화를 일으키게 할 정도가 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으로 외국에서 한시간짜리 영어 강연을 하게 되었던 때라던가 처음으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출간하려고 했을때 나는 물론 개인적으로 큰 영예라고 생각했다. 그건 마치 티브이 속에서 연예인들을 보고 감탄하던 사람이 방송에 출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학술논문을 읽던 때는 그 논문의 저자가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속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다가 학회에 가고 논문을 쓰면서 그들과 토론하고 밥도 먹고 놀기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문득 문득 자신의 현재상태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대학교 4학년일때 세계적인 학술잡지인 사이언스의 한 논문을 읽고 그 분야의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지 않아 그 저자를 만나게 되었고 다시 몇년후에는 그의 연구원신분이 되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열심히 토론하고 계산에 몰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비본질적인 것이며 허영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지만 젊어서는 특히 완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그런 달콤한 유혹을 여행길의 식량삼아 한발한발 걷게 되고 그렇게 해서 진지하게 과학을 연구한다는 경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직업이 과학자이며 뇌과학연구소에 있지만 나처럼 학위가 없어도 또 연구생활따위를 해보지 않아도 과학일반이나 뇌일반에 대해 나보다 열배 백배 더 재미있고 길게 이야기할 사람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학동아나 뉴튼 같은 일반인을 위한 과학 대중잡지를 읽는다던가 수없이 나와있는 일반인을 위한 과학책들을 읽고 외우는 아마추어 과학도들이 종종 그렇다.

 

그것은 그것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며 모든 국민들이 다 과학자가 될 수도 되야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짜로 과학자생활을 해본 것과는 같지는 않다. 그건 마치 뉴욕에 관광을 가본 것과 거기서 살아본것의 차이와 같고 군복무를 한 것과 해병대 일주일 체험코스를 다녀온것의 차이와 같다. 아니 더 크다.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이 세상에 있지 않은 어떤 지식을 만들어 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신문에 보면 종종 세계최초로 뭐뭐뭐를 한 과학자나 공학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계최초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같은 과학자가 읽으면 그런 기사들은 좀 이상하게 들릴 때가 있다. 과학논문인데 세계최초가 아니면 표절이기 때문이다. 예외가 생기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과학논문은 모두가 세계최초다. 그렇지 않으면 논문을 평가하는 사람이 이렇게 편지를 보내올 것이다. 당신의 연구가 매우 길고 자세하며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 결과가 이미 발표된 것이니 당신의 연구는 의미가 없군요라고. 

 

그것이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계최초로 이 세상에 있지 않은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경험은 짜릿하다. 적어도 어느 순간동안은 이 세상에 그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거라는 생각은 큰 흥분을 준다. 그것은 교과서나 남이 한 일에 대해쓴 어떤 책을 읽으면서 그걸 이해했을 때 생기는 기쁨보다 비할 수 없이 크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기쁨이 크다는 것이외에도 그런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일종의 미지의 영역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독립심을 준다는 것이다. 

 

대학원때의 일이다. 나는 통계물리학 문제를 풀면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와 수학적 모델을 분석해서 내놓은 이론적 예측을 비교할 때가 있었다. 나의 계산이 맞았기 때문에 두개의 그래프는 서로 정확히 일치했다. 그것은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나면 뭐야 그게 그렇게 되야 하는것은 당연하잖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기 전에는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모르는 그런 느낌이다. 내가 서너달이나 걸쳐서 계산한 뭔가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런 것만이 아니다. 그건 마치 태어나서 한번도 움직여보지 못한 팔다리를 가진 사람이 처음으로 그 팔다리를 움직여 본 그런 느낌인 것이다. 움직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그 팔다리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어도 실제로 그렇게 될 때의 느낌은 다르다. 비로소 우리는 그 팔다리를 신용할수 있게 된달까. 물론 여기서 팔다리에 해당하는 것은 학문 혹은 물리학 혹은 이론적 사고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보고 듣고 배웠던 것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것에 의존해서 불확실성이 넘치는 미지의 세계로 전진해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종종 과학자를 포함하는 학자는 이 세상의 어떤 규칙을 찾아낼 때 희열을 느낀다고 말해진다. 그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 희열의 본질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퀴즈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쁨처럼 남보다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있게 된 것과는 좀 다르다. 그것은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새롭게 알게 된 그것때문에 새롭게 가능해진 전망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무엇보다 자신이나 지식이나 논리에 대해 신뢰가 자라난다. 

 

물론 과학자가 된다고 해서 날마다 이런 기쁨속에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아주 불행한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다. 발견과 기쁨의 한순간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다른 문제를 생각하면서 혹은 문제의 다음단계를 생각하면서 머리를 쥐어뜯게 되기 때문이다.  일년중 하루만 기쁘고 나머지는 내내 괴로운 식이 되기 쉽고 그보다는 좋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절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연구의 경험, 창조의 경험은 우리 안에 다른 것으로는 대체하기 불가능한 뭔가를 남긴다. 그래서 뭔가의 이유로 더이상 과학자로서 일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과학자의 내부에는 어떤 소중한 것이 자산으로 남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이런 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신을 체험했다 불성을 봤다 뭐 이렇게 표현하는 그런 체험과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너무 신비적으로 장대하게 표현한 면이 있지만 그것을 경험하고 나면 아뭏튼 그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 들게 된다. 그리고 이 체험이 진짜 과학자로서 일해본 사람과 아마추어 과학자와의 주된 차이다.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아마추어는 그 선을 넘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같은 책은 일반인이 과학자와 똑같은 느낌을 가지고 읽기 어려울 것이다. 논리적인 것을 꼭같이 이해한다고 해도 말이다.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수학책을 취미로 본 사람과 수학논문을 써본 사람은 대부분 다르다. 연극배우가 되는 것과 관객이 되는 것만큼 다르다. 

 

우리는 대개 세상을 볼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으로 가는 길은 실로 무한할 것이다. 무한히 많은 체험이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고 과학은 많은 것을 함축해서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많은 우수한 인력들이 20세기에 과학의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런 세상의 흐름에 일부가 되어 그런 체험을 있었다는 것은 마치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자로서 내가 가질 있었던 가장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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