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뇌의 문제, 인생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4. 1. 30.

14.1.30

뇌와 인생이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모두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아주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고 뇌과학과 인생론이 어떻게 같이 논의될 수 있냐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둘에는 분명히 공통되는 중요한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테두리의 문제다. 

 

인생의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근원은 테두리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만 그런 것은 어떤 기초와 문맥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에 가기로 했을 때 차로 가는 것이 좋은가 비행기가 좋은가, 중간에 천천히 구경하면서 가는게 좋은가 빨리 가는게 좋은가 같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한 전제는 바로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간다라는 출발점이다. 누군가가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가 서울인건 그렇다쳐도 부산에는 왜 가는데? 

 

알고 보니 부산에는 바다구경을 위해 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누군가가 말한다. 바다라면 역시 동해로 가야지. 강릉으로 가자고. 출발점이 서울에서 출발하여 바다구경을 가자는 것으로 바뀌면 이제 문제는 다 달라진다. 어디를 가야하는가, 거기를 어떻게 왜 가야하는가하는 것까지 등장한다. 이제 우리는 이론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의 지중해를 보러가자던가 태평양을 요트를 타고 횡단하는 여행을 하자는 계획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알고 보면 우리가 이런건 왜 당연한 거냐는 질문을 아직 던지지 않은 조건들로 둘러쌓여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런 조건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우리는 그래서 최고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던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 조건중 하나를 허물어뜨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이제까지의 인생의 의미는 모두 허물어지고 눈앞에 이제까지 상상도 하지 않았던 계획과 의미가 가능할 수도 있는 것들이 떠오르게 된다. 

 

삶이 가진 근원적 문제는 이 한계의 무너짐이 끝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이런 한계를 일찌기 느꼈기 때문에 그 전망에 대해 환호하는 동시에 황당해하고 심지어 우울하고 절망하게 되기 까지 한다. 스스로를 무한한 우주위의 작은 도토리나 모래처럼 느낄때 우리는 무의미의 늪속에 빠져들기 쉽다. 이것이 삶의 부조리 (absurdity)다. 

 

이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뭔가 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왜 이 문제가 뇌과학의 문제이기도 한지를 설명하는 것이 이 글의 주제다. 소위 과학적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출발이 항상 고립계 일 수 밖에 없다. 즉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온 우주의 상황이 모두 그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되므로 연구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고립된 존재라는 것은 남용되거나 오해를 사는 경우도 많다. 그 결과는 결국 괴상한 결론이 된다. 

 

예를 들어 여기 사과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저 저기에 사과가 있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 존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물잔에 기름반 물반이 차 있다고하자. 우리는 물과 기름사이의 경계선을 본다. 그 경계선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 말장난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도 터무니없지 않으며 분명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존재하는 것은 경계선이 아니라 물과 기름이기 때문이다. 물과 기름이 없는 세상에서 물과 기름간의 경계선만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경계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고 해도 여기서 존재한다는 말은 사과가 존재한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다. 사과는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진공공간에서도 홀로 존재하는것이 가능하니까. 이런데도 우리가 경계선에만 주목할 때 우리는 물과 기름을 잊어버릴 수 있다. 즉 실체를 경계선으로 여기고 물과 기름을 제거하고도 경계선이 있을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전제로 해서 뇌라던가, 심장이라던가 하는 것을 다시 보자. 심지어 생명이란 것도 다시 볼 수 있다. 생명이나 뇌는 물과 기름 사이의 경계선처럼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과처럼 존재하는 것인가.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뇌나 생명은 주변환경과 밀접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 왔다. 나는 그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사과를 연구할 때는 손쉽게 자 여기 사과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사과가 있다고 하자라는 출발점을 쓴다. 그런데 물과 기름의 경계선을 연구하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그것을 논하는 방식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뇌를 사과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렇게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자 여기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뇌가 하나 떠있다고 해보자. 이 뇌는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만약 뇌라는게 물거품이나 물과 기름사이의 경계선과 같이 존재하는 거라면 그런 출발점을 설정한 순간 우리는 뇌에 대해 큰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테두리에 대해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보통 나라는 존재가 생각하고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사과처럼 나도 환경과 떼어져서 존재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혹시 나라는 존재는 물과 기름사이의 경계선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 '내'가 뭘 하는게 맞나? 여기서 '나'라는 것은 내 뇌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두엽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작은 어떤 몇개의 신경세포인가?

 

우리는 세상의 많은 여자중에 이 여자를 선택해서 결혼하기로 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를 선택의 주체로 믿는다. 그런데 나와 이 여자로 이뤄진 관계를 바깥에서 구경하는 사람에게 나란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그저 이 여자의 매력에 빠져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은 틀린 것인가? 사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의견 차이가 쉽게 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인생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우린 뇌를 연구할때 진공에 떠있는 뇌로 연구하는게 아니라 그걸 사람의 몸안에 있는 뇌라는 문맥에서연구해야 한다. 뇌말고 다른 기관에서 신호를 받고 상호작용하는 것이 뇌다. 거기서만 멈출 것인가? 우리의 몸은 우리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문맥위에서 뇌의 의미, 뇌의 작동방식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뇌가 얼마나 기묘한 물건인가 하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혹은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 죽기도 한다. 누군가가 한국인의 조상은 전부 몽고족 병사들이 한반도여자를 강간해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주장을 했다고 하자. 한국인으로서 이런 주장은 응당 분노할만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때문에 언쟁하다가 살인이 일어나는 상황이 상상 불가능한것은 아니다. 한일간의 역사논쟁이 얼마나 쉽게 험악해 지는가.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한민족의 정당하고 올바른 역사가 아니다. 여기서의 요점은 우리의 뇌라는 물건은 천년 이천년의 시간을 거슬러올라가서 그때 있었던 일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그토록 심해서 그 것때문에 죽고 죽이기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작 1-20년전에 만들어진 자동차를 보듯이, 여기 20년전에 만들어져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경험하고 변형되어져온 자동차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듯이 우리 뇌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뇌과학자는 인생론을 쓰는 철학자나 문학가와 같은 문제를 가진다. 어쩌면 뇌과학자가 인생의 부조리를 논하는 이방인같은 소설을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뇌의 의미란 어찌나 부조리하다는 말인가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뇌의 문제와 인생의 근원적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이라는 점은 나쁜 소식만은 아닐 수 있다. 서구의 주류철학은 적어도 데카르트이래 과학의 철학으로 변하고 인생의 지혜와 무관한 물질의 철학으로 변했다. 그들은 너무 쉽게 고립계에 매몰되고 환원주의적 시각에 매몰된다. 그리고 서양인이 아니라도 요즘은 전세계인이 그 철학의 영향속에 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 영화를 보지 않는 나라는 없으니까. 뇌의 문제와 인생의 문제가 같은 것이라는 인식은 과학이 다시 삶의 지혜를 논하는 철학으로 통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일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좋은 뉴스다. 

 

나쁜 뉴스라면 이 말은 뒤집으면 뇌의 문제는 인생의 문제처럼 어려우며 어쩌면 절대로 안 풀릴 문제거나 우리 살아생전에 어느정도 획기적인 진전이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수천년전에 살았던 플라톤이나 공자나 부처가 논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게 얼마나 되는가. 만약 뇌에 대해서도 그 정도라면 뇌과학자들에게는 아찔한 문제다. 그러므로 이것은 희망찬 뉴스인 동시에 입맛이 쓴 뉴스이기도 한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