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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지식과 체험

by 격암(강국진) 2015. 2. 28.

15.2.28

우리는 오늘날 정보가 폭증하고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급증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여러가지 종말론이나 극적인 긍정론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과학이나 기술이 극도로 위험해 지는 미래를 상상하거나 반대로 그것들이 천국과 같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답이 무엇인가를 묻기전에 우리는 그 질문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과학이나 기술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과연 가장 중요하고 올바른 질문일까? 예를 들어 종교나 예술이 어떻게 미래를 바꿔갈 것인가에 대해 마찬가지로 긍정론자와 부정론자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이나 기술이 종교나 예술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시대에 우리는 살기 때문에 마치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만 질문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에 대해 나는 결코 그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기술적인 진보, 과학적인 정보의 폭증이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것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들은 이런 양적 폭증을 보고서 특이점 이론 같은 것을 내놓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이르면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실질적으로 무한히 빨라지는 특이한 미래가 온다는 것이다. 긍정론자도 부정론자도 모두 이러한 예측에 대해 어느정도 긍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래에 대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아갈 인간의 내부에 대해서는 다소 관심이 없다. 나는 과학과 기술의 폭증이 멈추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과학의 한계, 우리의 한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한계나 기술의 한계란 내가 지식의 한계라고 부르는 것이며 지식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 나는 체험이라는 말을 쓴다. 따라서 과학의 한계의 문제는 다른 말로 지식과 체험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과학의 역사란 결국 시공간을 초월하는 변하지 않는 법칙을 찾아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를 서술한 것이다. 뉴튼과학 혁명의 시대이래 인간은 사물에서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곧 진리로 가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다. 법칙을 찾아내면 이해를 하게 된다. 그저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같았던 많은 것들이 법칙이라는 이름아래서 질서를 가지게 된다. 종교적이었던 초기 과학자들은 이러한 법칙의 장엄함은 곧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법칙이란 지식과 거의가 아니면 완전히 같은 말이다. 우리가 방안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우리는 그 방의 상태를 모른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여자라던가 모두 고등학생이라고 말한다면 갑자기 그 방안의 상태에 대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식이 자연의 법칙을 찾는 것과는 언뜻봐서 무관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현대과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연의 법칙들이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힘이 있는게 아니라 4개의 힘밖에 없다던가 인간의 규모에서 느낄수 있는 것은 중력과 전자기력밖에 없다는 식의 말들이 그것이고 이 세상의 물질들은 무수히 많은 종류의 것들이 있는게 아니라 고작해야 백개 정도의 원자들이 있고 그것들이 결합해서 세상의 무수한 물건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은 법칙을 찾는 일에 골몰했고 지식을 늘렸고 그 힘의 도취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놓치는 것이 생긴다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이 잊게 되었다. 즉 우리의 무지에 대해 더 무지해 진 것이다. 지식이란 예를 들어 나라는 존재가 인간이며 한국인이고 남자이며 전주에 살고 있다는 식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 직업이며 재산의 정도며 성별 국적 학력등을 나열하면 우리는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이해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확신할 수록 우리는 그 지식이 놓치고 있는 일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식이 틀렸다는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식은 틀릴수도 있지만 맞을 수도 있으며 많은 지식이 많은 검증에 의해 옳다고 판명된 것이다. 하지만 단지 어떤 유한한 지식도 거기에 빼먹은 것이 없을 수 없으며 그 지식이 대단하면 할수록 그 빼먹은 부분을 더욱 안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세상의 많은 것들을 확실하게 보게 되지만 그 지식에 의해 무시되어지는 부분은 오히려 더 못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식이 체험과 다른 문제다. 체험이란 존재 전부를 말한다. 지식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말한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 즉 지식이 그 극한에 이르를수록 그런 세계의 인간은 더 어떤 것에 대해 눈이 멀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그 한가지가 모든 것을 다 부정할 수 있는것이다. 당신이 만약 명문대에 들어가고 싶어서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 노력하는 인간이라고 하자. 그래서 입시에서 성공해서 그 대학에 들어갔지만 사실은 당신은 스스로가 시한부인생으로 얼마 더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자. 그러면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바친 당신은 시간낭비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닐수도 있지만 그럴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지 알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데 어떤 것을 진보와 발전으로 말할 때 우리는 스스로 인간멸종의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우리는 무한히 복잡해진 시스템에 갇히고 그 안에서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허우적 거릴 확률이 크다. 그 시스템이란 바로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안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그 복잡함이 감당못할 수준이 될 때 우리는 시스템의 노예가 될 것이다. 시스템의 어처구니 없음은 모두가 느껴서 모두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할 수도 없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경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대개의 국가에서는 정치가들을 떠올리면 된다. 온갖 복잡한 규칙을 만들어 내고는 패를 갈라 싸우는 정치가의 싸움이란 아주 자주 좌절을 주는 것이다. 정치란 그만둘 수는 없다는 생각은 들지만 공허한 질문에 공허하게 답하고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면 아무도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진행 시킬 수 없어지는 게임처럼 보인다. 과학발전의 극한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아마도 정치판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돈을 무한정 소모시키지만 누구도 가치있는 일을 할 가능성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사실은 서구의 과학혁명이란 바로 중세 신학이 이런 상황에 도달했을때 터져나온 것이다. 신학적 지식이 타락과 혼돈만 만들어 내던 시기에 세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세한 관찰이 세상에 대한 진짜 지식을 준다는 것을 발견한 과학자는 진정한 종교인이었다. 과학혁명의 초기에는 과학적 혁명을 이끈 사람들의 이러한 사고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법칙과 지식을 만들어 내는데 골몰한 나머지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 극단에 이르면 모든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이란게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단지 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거기서 허우적 거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법칙의 극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의 실종이다. 유명한 예가 멜서스의 인구론 같은 것이다. 여기 굶어죽는 이웃이 있다. 이에대해 인구론에서의 논증은 경제적 변화에 대한 법칙을 주장하면서 우리가 이웃이 굶어죽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면 결국 더 많은 음식과 돈은 더 많은 빈민을 만들어 내고 그 끝에서 더 큰 비극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법칙에 몰두하면서 우리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이웃이 굶어죽지 않게 하겠다는 우리의 선택, 우리의 책임 그리고 우리의 의지다. 법칙은 우리를 세상에서 격리시킨다. 세상이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는 것은 내가 선택한 행동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뀔 수 없는 법칙때문이다. 과학의 끝에서 우리는 인간의 실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과학과 기술은 이런 부분에 대해 답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질문을 잊혀지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다. 다시 복잡해진 세상의 매듭을 칼로 잘라내듯 단순화하는 질문은 우리의 의지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결국 우리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고 의지를 관찰함으로서 우리는 무한대의 가능성중에서 하나를 예측하는 문제에 빠지지 않고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의 시대에 우리는 법칙에 따라서 살아왔다. 법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가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의지의 시대에 우리는 예측을 하지 않는다. 단지 의지할 뿐이고 의지를 확인할 뿐이다. 그것은 이런 상황과 같다. 내가 넓은 광장에서 눈을 가리고 아무렇게나 길을 걸었을 때 20분안에 정동향으로 100미터 떨어진 곳을 지나갈 확률은 얼마인가. 그것은 계산하기 어렵다. 그런데 눈을 뜨고 정동향으로 걸어가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우리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것이다. 그러면 20분후에 우리는 반드시 그 정동향의 어느 지점을 지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확고하게 밝히는 것은 법칙을 찾아내는것이 아니라 의지를 굳건히 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인간은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식과 체험의 문제다. 어느날 우리가 자동차를 사기로 했다. 이 결정은 어떤 체험이 우리의 내부를 바꾼 일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하자. 나는 자동차를 산다는 행위가 항상 권장할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동차에 대한 수많은 지식이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알고보면 아주 간단한 하나의 체험이 우리를 바꾼 것이며 그 체험에 대해 우리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른다. 

 

법칙에 따라 산다는 것이란 법에 따라 살고 변호사를 가까이 두고 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어떻게 뜯어봐도 잘못된 것이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멀리서 두고 보면 완전히 미친짓처럼 보일수 있다. 지식이 극한을 달릴수록 우리는 그런 것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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