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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확률 논쟁과 현대 사회

by 격암(강국진) 2013. 6. 21.

13.6.21

확률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을 괴롭힌 주제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본적으로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사위가 있는데 던져서 1이 나올 확률은 얼마인가 같은 질문에 대해 그 답이 6분의 1이다라는 것정도는 누구나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확률이 무엇인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프리퀀티스트와 베이지언의 논쟁이 있다. 양자역학이나 괴델정리같은 것이 우리를 겁먹게 하거나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이 있는데 이 확률에 대한 논쟁도 그런 것중의 하나다.

 

통계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랜간 도대체 이 논쟁이 뭔지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통계를 전공하는 학생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는 척하면서 대답하던 그 학생들도 뭐가 문제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확률논쟁은 확률이란게 뭔가에 대한 논쟁이다. 우리는 대부분 -내가 그랬듯이- 나는 확률은 잘모르지만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한 마음속 깊은 저 곳에서는 확률이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확률이 뭔지에 대한 논쟁이 이해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확률이 뭔가. 그건 당연하지라고 답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을 시작해 보라. 확률이란 우리의 무지와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라고. 주사위를 던져서 이미 결과가 뭐가 나오는지 봤다면, 혹은 정확한 계산을 통해 주사위를 이렇게 던지면 뭐가 나올지 알고 있다면 우리는 확률을 계산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결과를 미리 모른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그렇다는 것일까? 

 

사실 우리가 뭔가를 모른다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유명한 과학자인 러더포드경은 ‘당신의 실험이 통계가 필요하다면 당신은 실험을 더 잘해보도록 하시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세계에 대한 절대적 지식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19세기의 물리학자에게는 그 근원이 무지와 불확실성에 대한 것인 통계나 확률이라는 개념은 경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다시 무지와 불확실성으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내일 아침에 우리 학교에 하얀깃발이 올라갈 확률은 얼마인가. 이 확률을 계산한다는 것은 하얀깃발이 올라가는 경우의 수를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로 나눠주면 나올것이다. 문제는 모든 가능한 수가 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무지의 양을 말한다. 무지라는 것은 우리가 그걸 모른다고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이런 문제때문에 프리퀀티스트는 확률을 우리가 알고 있는 상황을 여러번 반복했을 때 몇 번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빈도수로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즉 우리의 무지에 대해 우리는 정말로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 지를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지면 우리는 그 답이 뭐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 답은 1에서 6까지의 숫자중의 하나라는 것은 확신한다. 무지하지만 무지의 경계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베이지언은 우리는 우리의 무지에 대해서도 뭔가를 안다고 말한다. 그것이 프라이어다. 프라이어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기본적 가정이다. 그래서 확률은 주어진 프라이어를 고려한 모든 가능한 상황중에서 우리가 확률을 계산하고자 하는 일이 일어날 경우의 수의 비율로 정의된다. 여기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프라이어의 존재는 우리는 지금 뭔가를 알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대개 이 프라이어는 훨씬 더 제약이 없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지는데도 프라이어는 1에서 100까지의 숫자가 나올 확률이 0가 아닐 수 있다. 다만 주사위를 여러번 던지면서 이 프라이어를 고치면 7이상의 숫자가 나올 확률은 0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즉 베이지언은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프라이어) 무지의 경계에 대해서는 훨씬 약한 가정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가지 정의중에 어느 것이 그럴듯하게 들리든 양쪽은 둘다 어려운 문제를 제시한다. 프리퀀티스트는 우리의 무지의 경계를 어떻게 알까? 주사위같은 것은 우리가 고려하는 시스템에 대해 우리가 자세한 이해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오직 경험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나 몇번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빈도주의자(프리퀀티스트)는 확률을 계산 할 수가 없다. 베이지언은 이런 제한이 없거나 약하지만 반대로 그럼 처음의 그 프라이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게 어렵다. 게다가 베이지언 방식으로 확률을 계산하는 것은 대개 훨씬 더 많은 계산을 요구해서 사실 컴퓨터의 등장 이전에는 실행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골치아픈 것이 도대체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21세기에 이런 논쟁은 사실 그 의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주사위를 던지는 문제처럼 애초에 우리의 무지의 범위가 분명히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는 어느 쪽의 정의를 택하건 그 결과가 같다. 문제는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 지는 경우다. 세상의 경제문제 사회문제 그리고 생물학 물리학등 여러 과학문제도 더더욱 더 거대한 차원을 가진 통계문제로 변하고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결코 모든 가능한 상황을 하나 하나 확인해 보지 않으며 확률적 이론의 창을 통해서만 데이터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가가 어떠하다던가, 국민총생산이 어떠하다던가 취업률이 어떠하다던가 하는 말에 익숙하다. 어떤 신약이 나오거나 라식수술같은 새로운 수술법이 나왔을때 위험률이 얼마라던가 하는 식의 이야기에도 익숙하다. 이런 것들도 모두 통계에 의해서 계산되어진 양이다. 즉 원래의 세상은 아주 복잡한데 그걸 한개의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이 간단하다면 예를 들어 우리 마을에 파는 물건이라고는 쌀밖에 없다면 물가가 뭔지는 단순한 의미를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아주 복잡해 지면 물가는 숫자놀음이 된다.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통계를 일종의 사기술의 일종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완전히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확률은 우리의 무지와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것에 대해 뭘 가정하고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에 따라 그걸로 계산되어진 통계치는 우리앞에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을 뽑건, 시장에 가건, 저축을 하건, 집을 사건, 직업을 구하건 세상을 통계와 확률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지 않을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의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그 불확실성도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확률논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눈에 대한 논쟁이 된다. 그 논쟁을 누가 맘대로 주도하고 맘대로 이게 기준이라고 정하면 우리는 그의 기준대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런 시각은 기아나 전쟁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어떤 나라를 부자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과장하자면 마르크스 같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은 오늘날의 통계학자들일수 있다. 경제학이 온통 통계학의 지배를 받는 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그리 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미래에는 그럴 수 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확률이 뭔지 확실히 아는데 확률논쟁이란걸 왜하지 라고 말하는 나라, 미적분은 열심히 공부하지만 확률론은 잘 안가르치는 나라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이미  불확실성이라는 단어에 지배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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