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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왜냐고 묻는 것과 좋은 과학자, 좋은 사람

by 격암(강국진) 2013. 6. 16.

2013.6.16

나는 어린 과학도가 있다면 왜냐고 묻는 것을 멈추지 말 것을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 어떤 벽속에 갖히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오직 그렇게 했을 때만이 좋은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좋은 과학자가 되는 것을 넘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왜라고 묻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조언은 나도 어릴 적부터 어딘가에서 몇 번은 들었을 만한 조언이지만 나는 어려서 그 뜻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매사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을 멈추지 말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말았다. 어떤 의미로 열심히 공부해라 뭐 이런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 식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실 왜라는 것을 묻는 것을 멈추지 않게 되는 일은 지극히 힘들다. 

 

실은 세상은 수없이 많은 벽들과 상자들로 이뤄져 있다. 그 벽들과 상자들은 종종 당신을 해치려고 하고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 당신을 무지한 상태로 유지시키는데 쓰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사실 자신도 자신이 벽이나 상자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선의로 가득차서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그 벽과 상자를 당신에게 강요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 벽과 상자를 적극적으로 의식하려고하지 않을 때, 독립적인 정신을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벽속에 굳게 가두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왜라고 묻는 것은 거기서 멈추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어떤 회사에서 어떤 직장 상사 밑에서 일하고 있다면, 당신이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하고 있다면, 많은 경우 당신은 창의적이 될 것을 더 크게 눈을 뜨고 책임감있게 어른스럽게 행동할 것을 조언받는다. 일일이 상사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바 일이나 공부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해야 더 잘되고 왜 이렇게 하면 더 잘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도록 조언 받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왜 직장상사나 회사는 이런 일을 내게 시킬까, 이런 일은 사회적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같은 것을 묻도록 권장되지는 않는다. 회사나 직장상사는 당신이 그들이 시키는 일을 더 잘해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단순한 자세를 가지기를 원한다. 월급을 받았으면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거나 출세하고 싶으면 맡은 바 일을 잘해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거나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학부모나 선생님들은 대부분 학생으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에서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도록 권하지 않는다. 대학이 가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거기에 대하여 왜를 자꾸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생각은 대학을 가야하는 것은 당연하고 가기위에서 해야하는 일들에 대해서만 끝없이 왜를 묻도록 권해지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렇게 주변사람들에 의해 권해지는 박스들은 반드시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박스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에 대해 당신에 고민하거나 회의에 빠져 나쁜 길에 빠져드는 것을 말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걱정은 반드시 틀린 것만도 아니다. 하나의 박스는 하나의 정해진 규칙들이다. 당신이 이러저러한 규칙을 지키면 그래서 정해진 의무를 다하면 정해진 권리에 의해 보상이 나온다는 기대를 가진 규칙이며 당신의 선배며 부모며 스승들은 경험에 의해서 그러한 규칙의 옳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박스를 넘어서 생각한다는 것이 그러한 규칙을 파괴하는 것에 멈추고 만다면 당신은 더 좋은 결과를 얻는게 아니라 단지 혼란만을 얻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신이 어떤 테두리 안에서는 왜를 묻기를 바라지만 그 테두리 자체에 대해서는 왜를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는 적어도 좋은 과학자가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내가 태어난 한국은 변방의 가난한 나라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되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그 학문이라는 것이 대부분 서양에서 배워오고 일본에서 배워온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할 때 그런 나라안의 시각이라는 것은 지극히 작은 박스안의 생각이 되기 쉽다. 그리고 그런 것은 심지어 한국학생이 유학을 가도 대개는 마찬가지다.

 

하나의 원천적 생각이 있다고 하자. 그 생각이 비행기를 만들어 바다를 넘자라는 것이라고 하면 그 비행기를 실제로 만들어 내는 데에는 수많은 하청업자가 필요하다. 하청은 다시 하청으로 이어지는데 비행기의 구조에 대한 생각이 한번 갈라지면 그것이 또 갈라져서 작은 부품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단 하청업자로 갈 수록 전체 그림에는 무지하게 된다. 누군가는 비행기가 뭔지 모르고 비행기를 한 번 타본 적이 없어도 단지 비행기의 창문을 열심히 잘 닦는다는 이유로 훌룡한 비행기 제작의 일꾼으로 말해질 것이다. 

 

당신이 바다를 건너 미국같은 나라로 유학간 유학생이라고 하자. 당신은 훌룡한 재능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문화적 어학적 배경이 미국에서 태어난 다른 사람보다 못하기 쉬우므로 대개는 기술자로 평가된다. 즉 뭘 해야 할지는 지도교수나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당신은 그 훌룡한 재능을 작고 매우 전문화된 분야에 투자해서 최고의 전문 기술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훌룡한 업적을 낸 그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와 학생을 받고 실험실을 운영한다. 그 실험실이 실적에 대한 걱정과 권위주의의 지배를 받는다면 안그래도 전문화되어진 그 작은 사고방식의 박스는 다시한번 더더욱 분화되고 말며 직업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 그 학생들은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 빠진다. 

 

전체 설계가 바뀌면 전문화된 기술자는 위험하다. 당신이 비행기 프로펠러를 만드는 일중에서 작은 일중의 작은일 그러니까 프로펠러의 포장지를 잘 만드는 일에 종사하며 이것은 너무나도 비행기 프로펠러에 전문화된 일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일에도 별 소용이 안된다고 하자. 그런데 어디선가 이제 제트비행기의 시대를 연다면 당신의 직업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마치 한때 영화관마다 있어서 무성영화에 목소리를 직접 입히던 변사라는 직업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대학교수는 실적을 내라는 사회적 압력속에 있다. 그로서는 독립적이고 언제 결과를 낼지 모르는 야심적인 사고에 몰두하는 학생보다는 그의 손발처럼 일해서 논문을 하나라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큰 학생을 원한다. 사실 대부분의 학생은 혁명적이고 대담한 프로젝트에 손을 대서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교수는 그 학생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 학생을 작은 박스안에 가두고 마는 것이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이 박스안에 가두기는 악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선의에 의해서 행해진다. 학생이나 젊은이를 생각하는 선의에다가 길게 도전할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결합하면 항상 그 결과는 학생이나 젊은이에 대한 정신적 거세과정이 되고 만다. 이 과정은 반복될 수 있다. 즉 그렇게 해서 작은 박스에 갇힌 사람이 그들의 후배나 학생이나 후임자를 더더욱 작은 박스안에 가둬버리고 마는 것이다.

 

전쟁같은 일이 일어나면 사회적 권위는 무너지고 만다. 그럴 때는 젊은이들은 싫어도 좋아도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어지면 질수록 이 박스가두기는 심해지고 누적된다. 더구나 권위주의가 판치는 사회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해방이후 반세기 동안 우리는 열심히 발전했다고 자평하지만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커다란 후퇴이기도 했다. 우리는 좁쌀같은 인간들을 양산하는 사회로 바뀐 것이다. 명문대학도 포함해서 말이다. 

 

전체적으로보아 한국이라는 사회가 들어가 앉은 박스가 커지는 속력은 새로운 새대가 등장하는 속력보다 훨씬 느리다. 전에는 명문대를 나오면 삼성같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한국의 기업에는 과가 없는 과장대우 사원이 즐비하다. 더이상 대기업들은 과거처럼 급격히 성장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기존 사원의 정년도 늘어난다고하니 젊은 세대는 어떤 위치에 처하게 되었겠는가. 그들은 점점 더 작아지는 박스로 구겨넣어질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선의에 의해서 말이다. 바로 마음씨 좋은 선배나 상사가 그들에게 해주는 성공의 비결이 그들을 더욱 작은 박스로 몰아넣는 길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될 때 젊은 세대는 점점 더 어리석어 진다. 그들은 그들이 들어가 있는 작은 박스속에서 불편해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박스를 넘어서지 못한다. 작은 박스를 가진 스승과 초조함과 공포가 그렇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우리 사회의 풍경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누구에게는 지극히 자명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젊은이만 그런게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를 서로 더 작은 박스에 넣으려고 노력하므로 사람들은 결국 작고 작은 박스속에 넣어져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게 된다. 노인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될수 없다. 

 

상자를 넘는다는 것은 물론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말하면 그것자체도 어떤 선입견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마치 우리가 뭔가를 알았다는 착각을 준다. 스스로 만들어 낸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통해서 분명해지기를 바라지만 작은 박스에 갇히는 것에는 여러가지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래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작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유치원생에게도 미래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야 더 열심히 공부하니까. 하지만 공포에 빠져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마도 더 작은 박스속에 더 잘 갇히게 될것이다. 좁쌀같은 마음을 가진 어른들의 현실론은 대개 아이들에게 해롭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규칙을 무시하고 게으르고 한가하게 산다고 해서 박스를 넘어서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산으로 들로 다니고 여러곳을 구경다니며 외국으로 수학여행도 가는 그런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그 박스를 넘어설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필요가 있지만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은 다시 내 안에 뭐가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작게 만든다. 우리는 작은 박스에서 좀더 큰 박스로 비약하는 일에도 공포를 느끼는데 이리저리 아무거나 보면서 한꺼번에 대박을 노린다는 식이 되어서 성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것인가.

 

길은 결국 자기로 가는 길을 꾸준히 걷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게으른 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땀을 흘리기만 하면 되는 길도 아니다. 자기의 느낌을 소중히 하면서 왜 그럴까를 생각하고 질서와 혼란간의 균형을 맞추면서 비약을 위한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뛰어오른 자는 그저 절벽에서 뛰어내린 미친 자가 될 뿐이고 절대 위험을 무릅쓰고 비약하지 않는 자는 작은 상자속에 갇혀살아갈 뿐이다. 오랜간 유지된 시스템이 우리를 작게 만드는 시대이므로 그런 사람들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에도 세상에서는 특히 한국에서는 공포와 혼란속에서 서로를 작은 상자안에 가두려는 싸움이 끝나지를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공포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공포를 사회에 전파하면서 좋은 일을 한다고 믿는다. 어느 나라가 망했다고 하면 흔히 그 나라는 너무 편해서 그래 공포로 좀 더 닥달을 했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의력도 공포나 당근이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창의성이 요즘 세상에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닌텐도를 못만드는가, 스티브잡스를 만들자고 한다. 그러면서 왜 우리 과학자는 노벨상을 못타냐고 말한다. 

 

아이들은 괴상하게 행동하고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작은 상자속에서 비틀어진 하늘을 본다. 결국 나태와 공포가 그들을 비약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숨한번 크게 쉬고 나는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공포에 빠져서 공부해서는 좋은 과학자가 될 수 없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공포를 잊고 왜를 생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저 매순간 이 세상을 발가벗은 나로서 새로이 만나면서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줄 바람이 불기를, 우리를 비약하게 해줄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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