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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미래상상

미래상상 1. 인터넷 매체는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4. 8. 11.

매체란 수단이므로 그걸로 뭘 하는가는 소유자 마음이다. 그러나 나는 시대적인 변화라는 측면에서 혹은 인터넷 매체가 따로 존재해야 하는 의미라는 차원에서 과연 인터넷 매체는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더 크게 우리의 행동이 속하는 문맥을 보기 위해 우리의 질문에서 조금 더 물러서야 한다. 

 

 

우리가 그 중간에 있는 혁명

 

서구에서 금속활자가 나오고 책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대를 되돌아 보자. 여기서 우리는 출판이 보편화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쓰게 되면서 지식이 폭증하는 현상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구에서 기록과 지식을 독점하던 성직자조직은 이런 시대에 점차로 무능해졌다. 그 이전에는 성경조차 보편화되지 않아서 읽고 쓸 수 있는 성직자가 이게 성경에 나온다고 하면 그냥 믿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권위를 독점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식이 보편화되고 더 많은 것이 출판되고 또 기록으로 남겨지면서 속세의 지식인들 즉 철학자나 과학자가 주목받고 시대의 주인공은 점점 바뀌어 간다.  

 

우리가 먼 미래로 가서 20세기의 통신혁명 이후 특히 인터넷의 보급 이후를 살피는 미래인이 된다면 우리는 비슷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도서관이나 대학에 갇혀 있던 지식은 경계를 파괴하고 사방에 퍼지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신문이나 책의 형태로 주로 글이 써지고 보급되었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글이 써지고 보급되기 시작한 이래 생산되는 정보의 양은 천문학적 규모로 달라졌다. 기록되어지는 글이며 사진이며 동영상의 양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혹자는 이런 현실을 가르켜 인터넷에는 쓰레기만 가득하며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했고 그런 말에는 분명 일정 부분 진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서구의 인쇄시대이전에 바로 라틴어를 쓰면서 지식을 독점했던 성직자가 똑같은 말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읽고 쓰고 출판하는 시대는 그 성직자들에게 쓰레기만 폭증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시대를 바꿨다. 새로운 생각의 틀이 출현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었다.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지식이 폭증했다. 이제 현대를 사는 우리가 보면 전문화된 신학적 질문을 파고들던 중세성직자들이야 말로 아무 의미없는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사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한국인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를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다시 현대로 돌아오면 이제 대학이나 언론기관같은 곳이 바로 그 낡은 시대의 성직자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이 인터넷은 시간낭비고 블로거는 거지동냥이나 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에 진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그 옛날의 성직자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갈릴레오를 재판에 걸었던 서구 중세의 낡은 종교조직이 고정되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듯이 우리는 오늘날의 주류인 제도권 지식사회가 일정부분 전문화라는 형식에 고정되면서 그렇게 된 것을 느낀다.

 

전문화는 상당부분 먹고사는 문제와 큰 관련이 있다. 우리는 남이 모르는 것을 알 때 월급을 받고 차별성을 보여준다. 남이 다 아는 것을 나도 아는 것은 월급에 큰 기여를 못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작게 작게 보는 전문가가 되어간다. 어디 쓸지도 모르는 부스러기 지식으로 퀴즈대회에 우승하는 사람을 대단한 지식인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의 문제, 즉 통일은 해야 할것인가. 4대강 공사는 잘된 것인가 안된 것인가, 교육 어떻게 해야 하는가등 거의 모든 질문들은 당연히 정치, 경제, 공학, 역사, 문화등 무수한 측면들과 닿아있다. 현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전문화된 지식들은 조립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그 방면에서 종종 매우 무능하다. 그런 일을 하도록 훈련되고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전체 부품을 조립할 사람은 없는데 작은 부품을 만드는 사람만 있는 식이다. 그들은 전문화속에서 권위를 자랑하지만 조립에 대해서는 모르고 모르는 분야에는 입을 완전히 다무는 것을 대개 미덕으로 배운다. 그래서 아주 용감하게 그저 내가 해봐서 다 안다는 허풍쟁이가 나서서 맘대로 부품을 가져다 붙이고 있어도 전문가 집단이 말리지를 못한다. 그리고 물론 이런 상황에서 재정적으로 환경적으로 문화적으로 종종 재앙이 일어난다. 

 

칸막이의 벽은 매우 높다. 소위 학제간연구라는 것때문에 타학과에 가서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은 특히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전문화된 칸막이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에 질리기 쉽상이다. 한때 한국에서 통섭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국의 현실과 거리가 매우 멀다. 그리고 그 칸막이는 서구중세의 종교조직이 그렇게 했듯이 사람들을 더 어리석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구조가 만들어 내는 모순의 압력이 쌓여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지식폭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래에서는 좀 다른 종류의 정보를 말할 것이지만 고전적인 의미의 정보도 그렇다. 아주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지식이 거의 공짜로 혹은 완전히 공짜로 주어지는 시대에 살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영어권은 고금의 고전을 전자책으로 만들고 그것을 공짜로 나눠주고 있으며 각종 강의의 동영상들이 공짜로 돌아다닌다. 책들이며 여러가지 정보미디어가 전자화된 시대에 우리는 그것을 모두 국민이 공짜로 쓰거나 약간의 광고와 함께 쓰는 시대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비용은 정부가 댈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여러나라가 세금과 기부금으로 도서관을 운영한다. 인터넷 시대는 작은 비용으로 누구나 그 지식을 가질수 있게 만든다. 왜 그렇게 못하겠는가. 전세계가 이제까지 만들어 온 드라마며 영화며 다큐가 얼마지나지 않아 손끝에서 검색되고 바로 볼 수있게 될것이다. 내가 말하는 시대가 100년뒤인가 50년뒤인가. 아마 10년도 안걸릴 것이다. 

 

지금은 지식이 대학문을 넘고 국경을 넘어 퍼지는 시대다. 옛날의 성직자가 그 역할이 축소되고 대학이 새로운 지식축적의 중심이 되었듯이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우리의 성직자조직인 대학의 역할을 축소하고 새로운 형태의 기관을 만들 필요가 생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지식폭발이 어디에까지 이를 것인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국적으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새로운 기관을 만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 아무리 세상이 빨리 바뀐다고 해도 그런 혁명의 정돈기는 적어도 아직 몇십년뒤에나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가 오기 훨씬 전에 지식의 폭팔은 많은 벽들을 깨부실 것이고 지금 우리에게 익숙해진 많은 것들이 무너질 것이다. 

 

어떤 종류의 지식인가

 

정보가 흐르는 채널이 넓어질 때 기존의 주류지식인의 눈에 새로운 정보들이 대부분 혹은 모두 쓰레기로 보이는 이유는 상당부분 그 정보들이 바로 기존의 시각에 따르면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과 영웅전설의 세계를 말하고 그 가치를 연구하고 보존하는데 몰두하던 독실한 종교인들에게 신이나 영웅이 아닌 그저 평범한 거리의 여자를 눈에 보이는대로 그린다는 것은 시간과 재료의 낭비처럼 보였다. 늙고 병든 사람이나 창부가 왜 중요하단 말인가. 더하여 오류에 가득 차고 근거가 불확실한 실험과 관찰을 꼭 직접 해야겠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혁명과 정치적 혁명은 새로운 매체가 엄청난 양의 새로운 정보들을 소통시킬 때 그것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타난다. 평생 장님이던 사람이 눈을 뜨면 뭔가를 보게 된다. 그러면 이제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이름을 제대로 붙일 필요가 있다. 시각정보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보폭발의 시대를 살아가려는 노력중에는 데카르트가 했던 것처럼 우리의 이성은 과연 확실한 진리를 알아 낼 수 있는가 같은 기본적 질문에 몰두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해서 과학적 관점이 보편화되고 새로운 세상이 오게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증대하는 정보속에서 다시 한번 지식이론과 인식론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날 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훨씬 더 많은 개인들이 자신을 표현 할 수 있는 시대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 소통의 통로는 좁았다. 과거에 출판이 보편화되었다고 해도 읽는 사람은 물론이고 책을 쓰는 사람은 더더욱 아주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유명인사나 정치인, 교수등의 권력자나 고급지식인이 아니면 결국 입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발표를 하는 것도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귀족의 시대였던 셈이다. 

 

그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 예술가나 소설가가 노동자소설을 쓴다던가 농부의 삶을 그린 그림을 발표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가나 지식인이라는 좁은 통로를 거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수 없는 단순화, 개념화를 도입하게 된다. 일개 개인이 가질 수 있고 처리할 수 있는 경험의 양은 그가 아무리 위대해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이나 정치인들은 그들의 그런 개념에 세상을 맞추려고 했다. 그 반대가 아니라 말이다.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디지털 카메라나 스마트폰은 현대인들을 전혀 다른 상황에 놓는다. 스마트폰으로 오늘 점심에 먹은 메뉴를 올리는 현대인들, 휴가가서 집에 있는 부모님에게 휴가지의 자신들을 찍어보내는 현대인들이란 마치 글자도 못읽던 가난한 소작인이 책을 출판하는 작가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는 혁명적 변화의 결과다. 

 

인터넷은 많은 것을 직접 소통하게 하고 그런 네트웍의 가치를 무한히 증가시키고 있다. 아마존, 알리바바, 페이스북이나 라인, 카카오톡 같은 서비스, 공유경제의 흐름 나아가 비트코인의 소동을 보면서 우리는 권력의 바뀜을 예감해야 마땅할 것이다. 경제규모가 그런 개인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연구하게 된다. 요즘 우리는 빅데이터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는 확률통계적 시각이 세상을 보는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하게 만든다. 우리는 뇌와 마음을 연구하고 강력한 되먹임속에 창출되는 자기스스로 조직되는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다니엘카네먼은 심리학자인데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치면서 과학의 중심은 물리학에서 점차로 생물학으로 옮겨 갔다. 이제 우리는 그 왕좌가 심리학과 뇌과학으로 옮겨가는 시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은 객관적 진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페이스북을 만든 주커버그는 어떤 종류의 지식인일까. 그는 사업가일뿐이라고? 그는 신발을 만드는 직공이나 자동차를 만드는 엔지니어와는 다르다. 그의 관념은 과연 철학자의 사상과는 정말 아주 멀리 있는 것일까. 사이버 시대에 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현실도 우리가 만드는 게임의 규칙일 뿐인 시대에 현실이란 그저 우리의 심리에 효과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뭔가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인간 심리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유효하다는 것이 판명나는한 우리는 이제 주관이니 객관이니 엄밀성이니 따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뭐가 시대를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시대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결국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고 과학도 철학도 영향받는데 있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대학을 설립하거나 지원하고 연구비를 대는 시대에는 특히 말이다. 

 

과학과 대량생산의 공장시대에는 우리는 자연스레 그런 분야가 생성한 말들을 일상에 쓰게 된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그런 식으로 조직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강하게 느끼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우리의 언어가 이미 너무나 그런 것들로 가득차서 당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확률적 추정과 심리학의 결과가 점점 더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 우리는 확률론의 단어를 일상에서 쓰게 되고 심리학적 관찰과 이론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조직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플라톤,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각에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분류하고 측정하는 것, 수학적 관점으로 쌓아올려진 기존의 과학적 시각, 관찰의 주체와 객체가 잘 분리되거나 주체는 망각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세계를 관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고 우리 자신은 그 세계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진리관과 인간관을 바꾸게 될 것이다. 제인스는 그의 유작 과학의 논리를 통해 확률이란 논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통계의 시대가 그렇게 했듯이 확률적 시각은 우리의 시각을 많이 바꾸었고 바꿀 것이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잘 분류하고, 이것이면 저것이 아닌 배중률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교회다. 아리스토텔레스적 합리성의 교회다. 하지만 확률론은 물론 학자들이 주로 연구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대체하는 것이다. 언젠가 대학이라는 조직이 우리가 교회나 절을 보고 느끼는 것처럼 중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낡은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시대가 정말 온다면 그것은 이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관점에서 대학은 낡은 믿음을 유지하는 기구로 보일 것이다. 그때의 지식은 전혀 다르게 만들어지고 다르게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뿐만이 아니다. 팩트팩트만 건조하게 외치는 전문가들은 아직도 세상에 넘친다. 그들은 뭐하나 생산은 못하고 어떤 권위를 가진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남의 이야기가 부정확하다는 이야기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시대에 뒤져있다. 

 

이런 변화가 언제 올 것인가. 그걸 알고 싶은 사람을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라. 심리학과 통계학, 뇌과학의 책들은 이미 우리 근처에 버글댄다. 혁명은 앞으로 온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한참 진행되었다. 

 

혁명의 본질적 내용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인터넷매체는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가. 앞에서 말한이야기들을 했던 것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인터넷 매체는 혁명의 본질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마치 과학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르네상스가 이미 한창인 시대에 다시 근엄한 신화와 신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혁명의 본질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제까지의 세상이 소통시키지 못했던 우리 자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겪는 혁명은 본질적으로 단순하다. 정보의 전달방식이 달라지자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급증하고 이제 그 정보를 효율적으로 다룰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중앙만 보던 눈을 자기와 자기주변으로 돌리는 탈중심의 삶이고 다양하게 조직되고 공존하는 공동체내지 게임의 삶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본질은 사람들이 다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마치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이 개인을 출현시켰듯이 우리는 다시 더 세세한 진짜 자기를 발견하고 유통시켜야 한다. 개인은 그냥 개인이 아니다. 개인으로 소유하고 개인으로 행동해야 개인이다. 그리고 나도 그냥 나가 아니다. 나로서 표현하고 보고 느껴고 발견되어지고 선택되어져야 나다. 그리고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예술가나 문학가나 철학자가 발견한 개념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발견하고 인식한 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남의 작품을 읽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스스로SNS를 통해, 블로그를 통해,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 자기를 표현하고 기록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진짜 삶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아주 특이하지 않다. 실존주의자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자기가 밤에 잠을 잘 못잔다는 이야기를 수십페이지나 자세히 쓰던 프로스트, 탈중심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던의 철학자들은 SNS나 블로그에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이며 생각을 친구들과 나누고 있는 현대인의 선구자다. 다만 그 시절에는 그때의 미디어 환경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협동조합운동, 작은집짓기 운동, 공유경제운동, 마을 재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자신이 의식하던 하지 않던 자아발견운동의 일환인 것이다. 더 민주적인 미디어의 시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방식으로 살게 하는 시대일 것이다. 

 

중앙은 여전히 둔하다. 예를 들어 자영업자가 국민의 절반이상이라는 한국에서 드라마는 주로 재벌이나 정치가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몰두한다. 찾아오는 사람 별로 없는 외딴 집에서 쓸쓸하고 가난하게 사는 노인들이 젊고 돈이 너무 많은 재벌후계자의 고민과 모험에만 자기를 일체화 시킨다. 젊은이들은 정년도 보장안된다고 하는데도 대기업취업만이 살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많은 학생들은 결국 아주 소수만이 살아남는 경쟁속에서 정신없이 뛰고있다. 

 

이런 시대에 기억할 중요한 경고가 있다. 말이란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 말하는게 필요해서 생각을 하는게 아니다. 우리가 나의 철학, 탈중심의 철학을 배워야 겠다면서 여러가지 동서양의 개념들을 삼키고 그것에 매몰되는 것은 가장 그 철학에 위반되는 것이다. 한 은퇴한 철학자는 우리가 칸트에 대해 공부하려고 하면 결국 국내학자의 글과 책을 언급하게 되는게 아니라 외국인들의 것을 언급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닌것같다고 썼다. 그것은 정말로 자기가 자기 생각을 쓰는가의 문제다. 남의 생각, 외국인의 생각을 요약한 것이라면 권위는 원전에 있으니 외국인의 것을 보는 쪽이 훨씬 시간절약이다. 한마디로 한국인 철학자가 쓴 글에서는 그의 자아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자신의 철학에서 그 자신의 인생이 강하게 부각되지 않으므로 부정하건 긍정하건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할 가치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의 핵심은 남의 말을 반복하는게 아니다. 유명한 구지선사의 이야기도 있다. 불법의 뜻이 뭐냐고 묻는 사람에게 선사는 항상 엄지손가락을 치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것을 본 시중드는 종자는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불법의 뜻을 말해주겠다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이것을 본 구지선사는 종자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내고 다시 묻는다. 불법의 뜻이 뭐냐고. 습관때문에 엄지를 치켜올리려던 종자는 이제 자기 엄지손가락이 없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순간 불법이 뭔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남의 글도 읽어야겠지만 형편없는 글을 쓰더라도 자기 글을 자기가 읽는 것이 의미가 더 크다. 누군가의 단어를 그저 좋다고 외우고 다니는 것은 엄지손가락을 덩달아 치켜들던 종자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답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맺는 말

 

서구에서 중세이전에 종교인들은 신이 진리를 계시해 주었다고 생각했고 데카르트 이후에 발달한 과학적 사고관은 인간은 진리를 직접 찾아낼 수 있다고 믿게 해 주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진리는 찾아질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는 점은 같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은 인간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좀 다른 태도를 취하도록 압력을 받는다. 이미 백년전에 진리의 절대성은 무너졌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절대성도 무너졌고 나아가 수학이 엄밀하게 참과 거짓을 구분할수 있다는 것도 괴델이며 튜링의 연구로 무너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말한 정보의 폭증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결론은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옥상에 가는게 아니라 그저 다음칸에 가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변화와 과정을 즐겨야 한다. 

 

새로운 혁명은  결국 우리의 겸손을 요구할 것이다. 무지를 인식하고 자기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성장의 기초다. 우리는 폭증하는 정보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교만했던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마치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태양이 지구주위를 돌아야 한다고 생각해 온 중세인들과 다를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좀 더 많은 시선을 보내게 된다. 인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대학안에 지식의 바벨탑을 쌓으면 뭐하는가. 결국 이 세상에 살만한 곳이 되는 것은 인간 하나하나가 깨어있는 존재, 더 성장한 존재가 되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자기가 보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인간들은 마치 알속에 있는 병아리를 억지로 꺼내는 사람처럼 혹은 이미 다 커버린 닭을 알속에 다시 집어넣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모두 다른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거대한 자기머리속의 시스템에다가 끼워맞추려고 했다. 이것은 마치 봉건질서가 대부분의 사람들을 억압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살 능력이 없으므로 왕이나 종교적 지도자를 쳐다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그 자리에는 객관적이라고 주장되는 정보의 신당이 서있다. 대학과 정부가 그 중요한 몸통이다.  

 

결국 인터넷매체가 전달해야 하는 것은 자아찾기의 모험이다.  마을 재생운동에서, 집짓기 운동에서, 가게소개에서, 골목문화의 소개에서 우리는 나를 발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글을 쓰는 것 나아가 여러가지 취미활동을 하는 것도 물론 나를 발견하는 모험이다. 매일같이 난초를 그린다던가 노래를 부르고 트럼펫을 부는 사람이 있다고 할때 그 사람의 작품이 사회적으로 최정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기를 발견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시스템의 붕괴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모두가 중앙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넓은 대안들을 찾아 헤매는 탐색의 길이고 창조의 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안적 삶에 대한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고나 은퇴같은 일들이 보여주듯이 자기가 없는 사람에게 시스템의 붕괴는 자아 붕괴다. 대기업에 취업해서 성공하는 젊은이 보다 자기가 공유경제기업을 만든다거나 가게를 시작해 본다거나 세상을 사는 또다른 방법을 찾아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새로운 혁명의 중심에 가깝다. 보지 못하면 알지 못하지만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매체는 이론과 실천, 양쪽을 다 소개해야 할 것이다. 

 

물론 매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뭐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에 반대로 가고, 주류 매체가 하는 소리와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매체는 그 존재의미를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마치 르네상스가 한참 진행되었는데도 고루한 신화를 그린 그림만 생산하는 것과 같다. 참신함이 없고 대안도 안되는 비주류만큼, 결국 똑같은 문화를 가진 비주류만큼 가망없어 보이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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