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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미래상상

미래상상 5. 지식의 권위

by 격암(강국진) 2014. 11. 16.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서구 철학의 본질은 지식의 이론이라고 말한다. 즉 서구철학이란 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현대에까지 이어져 있다라는 주장과는 달리 인식론이 그 핵심인 서구철학은 데카르트에서 시작했고 칸트에 이르자 서구는 사상가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그것이 지식의 이론을 추구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관점속에서 즉 그렇게 정의되고 받아들여진 철학의 개념 속에서 비로소 서구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 내려온 지식의 탐구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야문명과 지금의 우리 문명을 단절된 것으로 생각하듯 고대의 철학적 담론과 지금의 철학적 담론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로티의 지적은 지식의 권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왜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믿는가. 초기 문명의 초기에 있어서 우리의 지식에 권위를 제공하는 것은 대개 역사적 종교적 관습이었다. 즉 어떤 것이 왜 그렇다라고 믿어지냐면 성서에 나오는 말이거나 누구나 그렇다라고 말하고 있거나 어떤 신적인 영감을 가진 중요한 인물이 그렇다라고 말하니까 그런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권위가 극적으로 도전받게 되는 것은 바로 앞의 글들에서 거듭말한 바 대로 지식이 기록되고 소통되는 기술과 세상을 관찰하는 기술이 바뀐 시대였다. 즉 배나 망원경같은 것이 발전하고 출판기술과 책의 소비가 달라지자 기존의 지식이 가졌던 권위가 도전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우리는 마땅히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로크의 경험론이 나오게 된다. 그 이후의 철학자들이 뭐라고 했건간에 되도록 많은 것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법칙을 찾아낸다라고 하는 것은 과학의 기본적 방법이 되었다. 티코브라헤가 하늘의 별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케플러가 그것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법칙을 찾아내었으며 뉴튼이 단지 별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낸 이야기는 가장 유명한 과학적 성공담 중의 하나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작은 자칭 타칭 과학자들은 하나의 글을 쓸 때 그 안에 되도록 많은 사실들을 나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러한 사실들이 그 글의 결론에 대한 증거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글의 결론을 하나의 보다 큰 법칙이라고 하면 사실들은 우리의 관찰결과이다. 기자들은 팩트가 신성하다같은 말을 성경구절이나 불경구절처럼 외우곤 할 때가 많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만물이 원자로 이뤄져있듯이 우리의 커다란 지식들을 이루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작은 관찰결과들이다. 우리는 되도록 많은 지식을 머리속에 넣으려고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을 볼 때 존경하고 지식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면 스스로도 뿌듯함을 느낀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같은 퀴즈대회 우승자에게 상금을 주고, 눈과 머리가 아프도록 많은 사실들로 채워진 책을 볼 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낀다. 점점 더 많은 학과들로 채워지게 된 대학과 대학도서관은 더 많은 지식의 축적을 상징한다. 대학교수같은 전문가들은 더 자세한 지식을 쌓아올리려는 노력의 결과 더 작은 분야로 자신의 공부를 제한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은 이유는 우리는 지금 이러한 지식의 권위가 무너지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예는 의사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오늘날 의사라는 전문가는 인터넷에서 자기 가족의 병에 대해 검색하고 공부하고 온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에 의해 그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 전에는 근엄하게 당신이 의술에 대해 뭘 아냐고 말하면 일반인들은 저항할 수 없었지만 이젠 의사도 모르는 최신 정보를 환자가 찾아 내는 것도 가능하다. 인터넷에는 지식이 넘치고 검색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일을 대학교수들을 포함한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겪는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일은 날로 어려워진다. 그들이 주는 정보를 즉석에서 비교 비판할 수 있는 수단을 학생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로 대표되는 인터넷 검색은 지적인 세계를 크게 바꿨다. 전에는 많이 아는 것이 큰 힘이었고 정보가 소중한 자원이었는데 오늘날에는 분석을 통해 가공되지 않은 단순 정보는 점점 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기계 트랙터로 밭을 가는 시대가 되도 누가 손으로 밭을 많이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재미있는 질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런 사람의 중요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네비로 길을 찾을 수 있는 시대에 길눈이 밝다는 것은 큰 장점이 되기 어렵다. 어떤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 마음을 먹고 검색을 해보니 관련된 논문이 쉽사리 수천편이 찾아지는 경우 연구자는 기쁨만을 느끼지 않는다. 연구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컴퓨터와 전자통신기술 그리고 검색기술같은 것이 지식이 누적되고 공유되는 방식을 바꿨다. 그러자 지식의 권위에 대한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 과학적 법칙의 발견에는 단순한 관찰결과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가설을 제공할 직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직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을 고민한 사람들은 전에도 있었다. 연구의 가치와 의미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관찰결과 혹은 단순 팩트가 무한 증식하는 것같은 시대에 이런 질문들은 더더욱 절박한 것이 되어간다. 팩트가 흔하므로 그것을 이어줄 통찰력이 더 귀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당신이 설탕회사가 전망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설탕업계는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으며 설탕산업의 전망이 아주 좋다는 것을 말해주는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만약 당신이 설탕회사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라는 글을 쓴다면 그 글에는 이렇게 해서 찾아낸 많은 사실들을 적을 수 있을 것이며 전체적으로 그 글은 결과를 합리적으로 이끌어내는 많은 사실들을 가진 글로 보일 것이다. 문제는 사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당신이 설탕회사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당신이 아직 전혀 모르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는 것들에 대한 사실들에 파뭍힐 때 우리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과 결론이란 실은 사기꾼들의 선동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길고 복잡한 설명을 이해하려 노력하기 전에 그것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 문맥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뭔가를 알고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현대에는 점점 더 답하기 어려워 진다. 선전은 교묘해지고 세상은 복잡해진다. 다양한 문맥속에서 어느 덧 우리가 가진 의미는 길을 잃는다. 이런 곤란은 점점 더 심해지기 때문에 문명적 모순의 누적이다. 이렇게 누적되어 가는 모순은 결국 어느 순간에 둑을 누너뜨리고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꿀 것이다. 즉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어떤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고 상식은 뒤집어 질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적 연구는 기본적으로 간결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뉴튼은 이 세상에 간결한 수학적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그가 실제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냄으로서 큰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뉴튼의 입장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을 종종 만난다. 

 

인간의 뇌에 대해 혹은 인간 사회에 대해 우리는 지금 엄청난 양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자료를 얻어내는 능력은 크게 증대하고 있다. 더 강력한 기계를 개발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양의 데이터를 생산해 낸다. 한마디로 엄청난 양의 자료는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자료가 우리에게 인간사회와 인간의 뇌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줄 수 있는 법칙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뉴튼의 법칙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조만간 세상의 수많은 정보들을 어떤 간결한 법칙의 특수한 경우로 생각할 수 있는 법칙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법칙은 인간에게 직관적 이해를 줄 정도로 간단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다시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단순하게 보이는 곳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상황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나는 과학적 기술적 방면에서 발전이 멈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우리는 어쩌면 머지 않은 장래에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많은 것들을 인간보다 더 잘 해내는 인공지능같이 보이는 기계를 만들어 내거나 인간사회에 대해 훨씬 더 미묘하고 섬세한 조정을 가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술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이해와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은 다차원 데이터 분석같은 것을 해본 사람은 느낀다. 우리가 주식시장분석을 한다고 해보자. 그래서 어떤 회사의 주가를 시간에 대해서 늘어놓은 그래프를 그린다. 그러면 그 2차원적인 그림속에서 우리는 어떤 패턴을 발견한다. 이런 경우 어떤 분석방법을 동원하면 더 자세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일단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가만 보는게 아니라 유가, 물가, 자동차 판매량도 보고 평균주가만 보는게 아니라 수천개의 회사 주가를 모두 한꺼번에 본다고 하자. 이제 이것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단계를 훨씬 넘어서고 우리는 어떤 정보분석 방법을 동원해야 어떤 최종적 결과를 얻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정보분석방법을 이해해도 정보와 그 분석결과간의 상호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있다.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의 프로그램이 내일 주가가 오른다고 예측하고 그것이 옳아도 우리는 도대체 그게 왜 오른다는 건지 모른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 분석은 빅데이터가 진짜로 빅데이터가 되면 될수록 직관적 이해를 주는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당신에 대한 정보를 통해 당신이 뭔가를 결정하기도 전에 당신이 뭘 결정할지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그런가는 설명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결과는 있어도 이해는 없는 것이다. 

 

엄청난 정보를 저장하고 분석하는 기술이 발달할 때 그 기술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사실 이같은 일은 수리물리학자들과 일반인 사이에서 이미 일어나는 일이다. 수학이론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런 개념이 언어안에 없기 때문에 양자역학 같은 것을 일상어로 늘어놓으면 말이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같은 주장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아주 신기한 진실의 상자를 만들었다고 하자. 이 진실의 상자는 우리가 만들었지만 우리는 사실 이 상자가 정확히 어떻게 진실을 만들어 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실제로 써보면 어떤 인간의 예측보다 이 진실의 상자가 더 정확하다. 그렇다고 할 때 이제 진실을 만들어 내는 기본재료인 세상에 대한 기초 정보는 인간을 매개로 해서 보다 상위의 법칙 혹은 진실이 되지 않는다. 이 진실의 상자를 통해서 그렇게 된다. 이런 시대는 대학교수보다 구글이 지적 권위를 가진 시대다.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한때 컴퓨터가 체스 세계챔피언을 이기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뇌에 대한 법칙이 발견되었지만 인간 사회에 대한 법칙이 발견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의 일상어로 말해질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거라면 이것은 법칙의 발견일까 아닐까? 인간보다 기계가 지식의 권위를 가지는 시대는 바람직한 세계일까? 

 

이런 시대에 우리는 뭔가를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 하는 하는 것일까? 과학혁명의 시대에 데카르트는 마음을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자아를 지킬 방법을 모색했다. 더욱 더 거대해진 정보의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있는 오늘날, 인간을 보호해 줄수 있는 것은 아마 공동체에 대한 믿음밖에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위도 아래도 없이 진공속에 둥둥 떠 있는 존재지만 지구라는 행성을 기준점으로 해서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절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시대에 모든 것을 사회적 역사적 진화론적 기준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앞에서 말한 로티도 이미 의미와 지식의 근원으로서 사회적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다만 한두가지 생각을 더 첨부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가치적 근거를 사회나 공동체로 말해서 앞에서 말한 지식의 권위와 믿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다른 공동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는 지나치게 체제 순응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때문에 그 반발로 사람들은 이번에는 집단이나 공동체와 싸우는 개인이 되려고 한다. 예를 들어 국가나 민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경계없는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와 대화해야 하고 자기 자신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 개인과 개인과의 대화 속에서 의미가 만들어 진다는 생각은 개인 개인을 마치 원자처럼 더 이상 분할 할수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같다. 그러나 개인은 이미 하나의 우주고 하나의 사회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그 정신세계의 일관성을 다듬기도 한다. 즉 의미나 언어는 설사 우리가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고 해도 존재하는 것이고 필요한 것이다. 

 

개인이 이미 하나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할 때 개인과 사회의 구분은 무너질 것이다. 사회가 개인을 압살하려고 한다던가 개인이 사회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생각도 희석될 것이다. 개인과 사회는 이미 서로 반대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마을, 우리가 좋아하는 공동체, 우리가 좋아하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세계를 만들고 지키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게임의 법칙을 고안하는 것이며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즉 중요한 시대적 과제는 객관적 진리의 발견이나 인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세계를 선택하고 구성하는 것이다. 

 

뇌과학이나 경제학은 뇌나 사회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서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우리의 뇌를 구성하고 변화시키며, 어떻게 경제와 사회를 구성하고 변화시키고 선택하는가 하는 것일 수 있다. 즉 우리의 선택과 책임을 뒤로 하고 객관적이고 무관심한 관찰을 해서 어떤 지식을 달성하겠다는 태도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것일수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미래를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예측할수 없는 것을 예측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야 할것이다.  

 

타인과 대화하는 이상으로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며 행복으로 가는 출발점일 것이다. 이것은 대학과 사회가 다시 자기 찾기를 중심으로 반성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많은 이익이나 더 많은 성공을 말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세계에서의 이익과 성공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그런 대학과 그런 사회는 마치 유행이 지난 종교적 가르침을 주장하는 집단처럼 될 것이고 언젠가는 무슨 광신도 집단처럼 기억되게 될 것이다. 서구 중세의 신학자들이 몰두했다는 기괴한 문제들처럼 지금의 학자들이 몰두하는 전문화된 지식들이 기억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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