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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미래상상

미래상상 3. 세속화된 학문

by 격암(강국진) 2014. 8. 21.

요즘의 과학은 돈과 명예같은 세속적인 것에 관한 것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오늘날 그것이 대개 그렇다는것을 부정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과학은 항상 그래왔다는 주장에 저항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과학은 단순히 돈이나 명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새로운 문화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으며 어떻게 말하면 새로운 종교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과학을 만든 것은 서구다. 그리고 그 서구가 과학혁명을 일으켜 과학의 시대를 연 것은 바로 종교가 돈과 명예같은 세속적인 것을 추구할 때였다. 얼마전 이제 손바닥만한 바티칸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교황이 한국에 방문하여 가난한 종교를 설파했지만 교황은 한때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땅을 소유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권력자였다. 다시 말하면 교황은 가난한 농부들을 수탈하는 가장 큰 부자였던 셈이다. 

 

우리는 지금 대단한 것과 지금 시들어 줄어든 것을 보면 그것들이 본래 항상 그랬다고 착각하기 쉽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캐톨릭 신부가 되려고 하는 일이 대단한 인기가 있을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종교가 가장 번성했을 시대의 엘리트 유럽 청년에게 당연한 직업전망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능력이 있고 환경이 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오늘날 서울대나 MIT에서 교수가 될 능력과 기회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과 비슷하게 보였을 것이다.

 

성직은 권력과 돈과 함께 부패했다. 사실 그 안에 들어가서 다르게 살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거대한 시스템의 한 부속으로 그 부패가 진행되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일했을 뿐이다. 시스템은 당연히 재능있는 자를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뽑아 올렸고, 일단 시스템의 일부가 되면 누구 한 개인이 이 시스템을 정화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졌다는 것을 개인들은 느끼게 된다. 연금설계가 잘못되어 국가재산이 파탄나고 있어도 어떤 개인이 모두들 물러서고 손해봐서 고칩시다라고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모두가 그런 엘리트코스를 걸어서 자기몫의 풍요를 누리겠다고 줄서 있는데, 그런 시스템이 그토록 거대해 졌는데 어떻게 한 개인이 그 관성을 뒤집을 수가 있겠는가. 

 

아직 과학의 세기가 본격화되지 않았던 시절, 어쩌면 가장 순수한 종교인들은 과학자였다. 왜냐면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추구했는데 당시로서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면 그런걸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이란 주제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을 때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이유가 된다. 자본주의나 공장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에 자연법칙의 탐구란 주로 신의 위대함이나 왕권의 정당함을 보여주는 도구로서만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런 시대에 부유한 성직자들이 밤이고 낮이고 권력이니 세력싸움이니 돈문제를 가지고 골몰하는 동안 여전히 어딜봐도 돈이 될 수 없고, 소수의 순수한 사람들만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인 자연법칙의 탐구에 헌신하는 과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시대에 가장 순수한 종교인들이었고 주류문화의 한구석에 붙은 아마추어 취미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아무 힘이 없어서 기분 나쁘면 불러다가 이단이라고 부르고 화형을 시키거나 자기 주장을 번복하도록 재판에 붙일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보여준다. 성직이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것이 되었을때 그들이 보기에는 비합리적이고 시시해 보였던 과학자들이 그들을  대체 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개신교가 종교를 혁신하려고 했지만 크게 보면 결국 세상은 탈종교화하고 과학중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세상은 더 이상 신에게 의존하며 돌아가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의존하며 돌아가게 되었다. 수많은 천재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고 대학이 번창한다. 드디어는 라플라스같은 사람이 신과 같은 가정은 필요없다고 선언하는 시대가 오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유럽인들에게 이제 종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상황은 과거와 비슷해 졌다. 과학은 이제 중세의 종교이상으로 돈과 명예에 대한 것이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과학에 대해서 말했지만 사실 과학 이외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신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세속화되었고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과 명예에 대한 것이 되었다. 돈과 명예를 위해서 하는 학문 바로 세속화된 학문은 이제 직업이다. 즉 일을 하면 돈과 명예를 돌려받는 거래가 되었다. 전세계에는 수없이 많이 그들의 교회가, 즉 대학이 서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상황은 과거와 비슷하다. 오늘날 MIT의 교수가 될수 있는 청년이 그걸 거부한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짓으로 보여진다.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으면 가야한다고 여긴다. 

 

여기서 돈이나 명예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에 골몰하는 사람들을 취미 사상가라고 부르기로 해보자. 이런 학문의 세속화 시대에 취미사상가들은 멸종하는 희귀한 사람들이거나 멸종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박해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대학교수나 총장들을 모두 나쁜 사람이나 부패한 인간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그런 사람도 많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생각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 대학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총장도 세속화된 학자일 수는 있지만 그런 사람이 개인적으로 부패했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시스템의 문제다. 

 

자기 시대 이야기를 하면 편견이 들어가기 쉬우니까 다시 서구 중세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를 그 시대의 관찰자로 여겨 보자. 종교가 방대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시대에 어떤 사람이 그 시스템에 많이 필요할까? 권력과 부는 많으니까 그것과는 상관없는 사람일까? 아니다. 가난한 종교를 추구하는 수도사나 수도승일까? 아니다 이미 불어난 권력과 부를 지키고 그것을 더 불려나가는데 수완을 발휘할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찬양받고 따라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종교의 수호성인으로써 훌룡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교단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발전시키는 것이고 결국 신을 거룩하게 섬기는 일이라고 말해졌을 것이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보라. 더 많은 연구비를 모아올수 있는 대학교수, 국제저널에 논문을 마구 출판하는 교수, 더 많은 예산을 만들어 내고, 기부금을 받고, 투자운영을 잘해서 대학을 부자로 만들어 내는 총장이 칭찬받고 있지 않은가? 성공한 학자란 종종 개인적 사색과 연구에 힘쓰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서둘러 어떤 거대 연구그룹의 관리자로 변신하는 사람을 말하지 않던가? 그런 사람들이 학문의 진정한 수호성인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이 시대적 풍경의 유사함은 우리에게 한가지를 묻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화형당한 부르노나 종교재판을 받은 갈릴레오를 양산하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한가? 그런 야만적인 시대와 지금은 다르니까 거대한 시스템을 움직이는데 들어가는 거대한 재정적 기초를 흔들지도 모르는 도전자들은 박해받지 않고 있는 게 확실한가?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나 종자산업, 의료산업들에 관련된 다국적 기업들의 행사에 반대하는 학자와 찬성하는 학자가 있다고 할때 그들은 차별받지 않는거 확실한가? 

 

이미 몇년전에 학자와 오타쿠라는 글에서도 관련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학문이 세속화될 때 오타쿠 혹은 취미적 사상가들은 몰려난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하고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면 당장은 결과가, 특히 논문같은 것이 양산되어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투자대비 생산효율 다시 말해 논문 한편을 생산하기 위해 드는 돈이라던가, 양질의 과학적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드는 돈의 차원에서 상황은 나빠질 것이다. 논문 사기 사건도 터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랬듯이 말이다. 오늘날 교황은 다시 가난하지 않은 성직자는 옳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가난하지 않은 학자는 옳지 않다고 해야 할까? 문제는 주객이 뒤바뀌는 것이다. 문제는 영혼과 믿음이 과학자에게 사소해 보이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게 옳냐는 것이다. 학문은 노벨상을 받거나 거대한 기업을 만들거나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맞는가? 중세교회가 면죄부를 팔았듯이 혹시 오늘날의 대학은 이성적인 것에 대한 면죄부를 팔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는 과거의 종교가 그랬듯 지금의 시스템도 내부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하며 결국 그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비참한 몰락만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의 과학은 어떻게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 것이다. 종교적 고민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인류를 부자로 만들어 줄 화려한 과학프로젝트 이야기만 한다. 개인의 삶의 방향, 개인의 삶의 가치는 종종 망각된다. 이렇다고 할 때 대학의 위기는 어쩌면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굉장히 많이 진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빌 게이츠와 마크 주커버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중퇴했다. 스티브 잡스도 제대로 대학교육을 못받고 리드대학중퇴의 학력을 가졌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가장 많이 떠들어 대는 사람들에 이 사람들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이 아니라도 나는 한국에 대해 생각할 때도 번번이 가장 똑똑한 사람은 혹시 대학을 안 나와야만 하는건가 하는 생각을 한적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교수들이 학생머리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일단 이 망각된 질문 앞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답을 찾지는 못한다고 해도 모두 진리라던가, 삶의 의미, 가치 따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종교도 과학도 실은 모두 이런 질문에 대해 성실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시대를 지배하는 주류적 사고는 어느 새 우리를 그것과 멀어지고 어떤 시스템의 일부로 살게 만든다. 그 시스템의 보상을 추구하는 일에 매몰되는 것이 바로 세속화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먹기위해 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가운데 심지어 대학교수조차도 자유로운 사고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각각의 전문화의 칸막이 속에서 종신계약권같은 당근을 위해서만 뛰는 작은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버린 시스템은 그 관성을 해결할 수가 없고 결국은 철저히 비판받고 대체되어 질 것이다. 사실 시간이 지나도 항상 질문은 같은 데 말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미래의 주인공이다. 그들만이 새로운 시대를 볼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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