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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고전의 이해

by 격암(강국진) 2014. 8. 25.

2014.8.25

고전에는 몇백년이 된 것에서 몇천년이 된 것도 있다. 고전이란 그토록 오랜간 꾸준히 읽힌 것인데 그렇다보니 고전의 해석이라는 것이 더더욱 큰 문제가 되었다. 고전을 어떻게 이해할까에 대하여 여러가지 다른 의견이 있다. 게다가 책이 가만히 있어도 그 의견들이 시대에 따라 변해간다. 

 

 

 

 

책을 이해한다는 것의 핵심은 그 책을 어떤 문맥에서 읽어야 하는가에 있다. 공화문에 있는 사람이 서울시청 가는 길은 직진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신촌에 있는 사람이 직진하면 서울시청 갈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문제는 이것이다. 대개의 고전은 아무리 길어도 그 책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지식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냥 당시의 상식이 가정되어 있다. 오직 수학책만이 시대를 초월하여 문맥을 분명히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에 가까운데 그것은 수학은 일반언어대신 엄격히 정의된 기호를 쓰고 그 출발점을 극단적으로 분명히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심지어 그 수학이론조차도 그 의미를 다시 따지는 시대이니 다른 책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고전을 쓴 본래의 의도를 이해하자면 대개 우리는 그 고전이 씌여졌던 과거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완전히 문화가 다른 나라에 가면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의 의미를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오래전 사람들이란 오늘날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에는 같은 지역의 사람이라고 해도 문화적 이방인이다. 하물며 그 고전을 고대 중국이나 고대 유럽의 작가가 썼다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것이 끝이 아니다. 꼭 고전을 쓴 작가의 본래 의도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랜 간격을 두고 그 책을 읽고 있다. 작가는 당연히 미래의 일을 모르니 자신이 쓴 글이 미래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어떤 문맥으로 읽히게 될지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고전이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이란 왜 고전인가. 그것은 꼭 그 고전의 작가가 책을 잘 써서 고전이 아니다. 아무리 책을 잘 써도 사람들이 그 책을 보지 않았고 잊혀졌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다. 고전이 고전인 핵심적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고 그 책을 계속 읽었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책을 읽을 만한 가치를 후대의 사람들이 거듭 발견했다는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이 발견한 그 책의 의미가 과연 원저자가 의미한 것 과 꼭 같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같아야할 이유도 없으며 생각해 보면 꼭 같을 리가 없다. 애초에 각자의 경험의 내용이 너무 다른데 말이다. 

 

공자님이나 부처님의 본래 의도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분들은 어떤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후대로 갈 수록 그분들이 의도한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고전이란 일종의 화석과 같다. 원시시대의 공룡이 추워서 죽었다고 해도 추워서 죽는데 무슨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추워서 죽었다는 그 사실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과거의 어떤 분은 그저 자신을 솔직히 표현했는데 그 말이 후대에 의도한 것보다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애초에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 없다. 불과 몇십년전의 일이나 옆 나라의 일도 완전히 아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데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아야 그 시대의 책을 이해할 수 있다면 고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책이 씌여진 본래의 의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책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고전의 의미는 오히려 왜곡되고 축소된다. 다시 말하지만 고전이란 후대에 많은 사람이 봤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에 고전이다. 

 

결국 우리는 과거에 대해 알고, 그 책의 저자에 대해 알려고 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해야 한다. 책은 객관적으로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책의 의미가 그 책을 읽는 독자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좀 이상해 보이지만 이 부분은 어떤 의미로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책을 왜 읽는가? 결국 그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설혹 내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 책을 읽어서 객관적으로는 그 책을 오독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만약 그 책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달해 줬다면 그건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무시하고 객관적 의미에 몰입하는 일이 지나쳐지면 책을 읽는 의미가 사라진다. 그냥 남한테 나도 그 책을 읽었다고 자랑이나 할 수 있다는 의미정도밖에는 없어지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논어를 읽고 이 논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논어의 맨 첫구절에 나와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 문장 자체의 뜻 이상으로 그 문장이 논어의 첫구절이라는 사실이 논어의 메세지의 핵심을 이룬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논어는 결국 인간이란 배우는 존재라는 정체성, 인간이란 구도자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란 여러 의미를 가지지만 모르는 것을 계속 배워서 알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배우는 존재,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다. 그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고, 그래서 수신하는 것과 제가하는 것과 치국하는 것과 평천하 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 큰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계속 배워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무지는 다 소진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까지 배우고 나면 더 배울 것이 없는 상태가 있다면 그는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메세지일까. 나는 그렇게 믿지만 사실 공자의 어록집인 논어는 당연히 공자가 편찬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논어의 맨 첫마디에 이 말을 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공자는 나만큼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사람이 공자가 아닐까? 그래서 논어는 이렇게 쓰여지지 않았을까? 나는 이런 해석이 마음에 든다. 

 

결국 책을 읽는 것은 나의 세계를 그 책의 세계와 연결시키고 서로 겹쳐서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관점, 나의 세계,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질문이 없을 때 고전은 의미있게 해석 되지 않는다. 어떤 고전의 해설서를 달달 외워서 이 고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누가 물었을때 멋진 대답을 할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고전에 대해서 내가 진심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 없다면 나는 그 고전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이다. 외운 것과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안다는 것은 마치 자전거 타기를 배운 것과 같다. 설사 어떻게 하는지 설명을 잘 못해도 적절한 선택과 행동이 나온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를 찾는다면 우리는 응당 당대에 집필된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고전은 보다 더 해석하기 위해 체험하기 위해 읽는 책이다. 정확한 지식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읽고 다시 읽으며 그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고전을 이렇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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