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오늘날 우리는 뭘 써야 할 것인가.

by 격암(강국진) 2015. 4. 26.

2015.4.26

최근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여행에세이를 읽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보통은 훌룡한 이야기꾼으로 책은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보통이 말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으로 자꾸 빠져들어갔다. 그것은 세부사항을 얼마나 쓰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작가는 비행기가 뜬다라고 하지 않고 ‘A340기가 뉴욕을 향해 이륙한다. 스테인스 저수지 상공에서 보조 날개와 바퀴를 접는다.’ 라는 식으로 쓴다. 그저 거기에는 단층휴계소가 있었다라고 하지 않고 ‘유리와 빨간 벽돌로 지은 단층 휴계소는 밋밋한 넓은 평야를 가로지르는 런던과 맨체스터간 고속도로를 굽어보고 있다. 앞뜰에 내걸린 커다란 코팅 간판이 운전자들과 옆 들판의 양떼에게 달걀부침, 소시지 두개, 반도 모양의 구운 콩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었다.’라고 쓴다. 이 예들은 비교적 간단한 것들이다. 찾아보면 이것보다 더 세세하게 어떻게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알고 있는지 모를 세부사항을 나열하는 부분은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예로 들었던 것들을 말해주면 역시 작가는 보는 눈이 달라라던가 눈에 보이듯 현실을 그대로 표현했다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세부사항을 쓰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한가지 문화에 중독된 사람에게만 당연히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이 문화에 중독되어 있다.

 

먼저 말해두자면 나는 책을 읽었지만 위에서 예로 든 것들을 외워서 쓴 것은 아니다. 내 글을 읽은 사람은 내가 저것들을 외우듯이 금방 알아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은 책을 다시 펼쳐서 여기저기서 보이는 대로 그런 부분을 베껴썼다.

 

보통을 포함한 대부분의 작가들도 비슷한 일을 한다. 그들은 글을 쓰면서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이 돌과 나무의 종류며 가구의 브랜드, 꽃의 이름이며 옷의 종류와 색깔의 이름들을 말하고 비행기의 종류며 형식에 대해 말하고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마치 머릿속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실은 조사를 통해서 지식을 모으고, 자신 만든 기록을 참조하고, 자료를 보면서 쓴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은 계속 사진기 같은 기억력을 가질 수 없고 모든 것에 대해 박식하지 않으며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늘상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고 기억해두며 살지 않는다. 의심된다면 눈을 감고 지금 당신의 방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기억하는지 생각해 보라.  매일 보고 자기가 꾸민 방의 세부사항에 대해 나는 얼마나 길게 쓸 수 있는지. 그런데 작가들은 온 세상에 대해 다 많이 아는 것처럼 쓴다.

 

지식의 시대,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세부사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훌룡한 것이다라는 원칙에 지나치게 노출된다. 따라서 과학논문이 아니라 여행기를 쓸 때도 꽃하나에 대해서 과학논문을 쓴 것처럼, 마치 손으로 사진을 그리듯이 엄청난 세부사항과 지식을 나열하는 사람들이 있고 독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개 칭찬하게 된다. 그런 글을 읽으면 뭔가 머리가 묵직해 진다. 그러면 아 좋은 글을 읽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개 오백페이지짜리 책은 백페이지짜리 책보다 다섯배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점에서의 값도 종종 그렇다. 그래서 출판사는 일부러라도 양을 늘려야 한다. 출판사는 작가에게 그렇게 쓸 것을 주문할 것이다.

 

그러나 세부사항을 많이 가진 글은 글과 필자를 멀어지게 만들어서 창조의 과정이나 경험을 오히려 숨기게 될 수가 있다. 최대한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하는 노력이 오히려 현실의 어떤 측면을 감추고 글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과학논문이나 교과서를 써 본 사람은 논문을 쓰는 작가가 하나의 오해를 유도하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경험 이후에는 그들이 어릴 적에 읽었던 논문의 저자들에 대해 좀더 인간적인 이해를 하게 된다. 아 그들도 인간이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 오해는 대개의 경우 고의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글을 논리적으로 간결하고 더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만들고 싶은 자연스런 목적때문에 논문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끝없이 논리적인 구조의 앞뒤를 맞추면서 글을 쓰고 고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문의 시작부분에서 혹은 책의 시작부분에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라고 그저 아주 당연하고 평범한 선택인듯이 말했던 것들이 나중에 보면 논문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 결과는 ‘이런 것들은 지극히 자명한 것이니 이런 걸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멍청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과학적 이론이란 그런 식으로 만들어 지는 법이 없다. 실은 연구자는 아주 단순한 결론을 만들기 전에도 수없이 많은 가설을 생각해 보고 시도해 본다. 아주 종종 생각들은 논리적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이게 아닐까 싶은 생각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장점이 있으면 나중에 설명을 할 때는 거꾸로 거기에 이유를 붙인다. 실패했던 수없이 많은 시도는 지워진다. 그저 이러저러하기 떄문에 이런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한다. 마치 한번에 답에 도달한 것 같다. 그래서 처음 어떤 분야의 책을 읽고 논문을 읽는 학생들은 그들의 저자들을 거의 비인간적인 천재처럼 느끼게 될 수 있다.  

 

이런 논문의 한가지 단점은 간결한 논문은 거꾸로 창조의 과정을 숨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대학원생이라면 제일 배우고 싶은 것은 창조의 과정이다. 그들은 남의 논문을 읽고 싶은게 아니라 논문을 쓰고 싶다. 또 내가 얼마나 논문을 읽었나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논문을 썼나가 현실에서 연구자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은 훌룡한 것이지만 대학원생들은 상대성 이론에 대해 알고 싶은 것 이상으로 그걸 쓴 아인쉬타인에 대해 배우고 그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인쉬타인의 성공이상으로 그의 실패에 관심이 간다. 법칙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많다. 이것은 화가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미술사전공자가 되고 싶은가의 차이와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지식시대의 근본적 원리는 기본적으로 법칙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글에서 인간은 최대한 지워진다. 인간을 가르치기 보다는 법칙을 가르친다. 이것은 과학적 글이 아니지만 그 영향을 받은 글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신문기사는 어떤가. 그것은 과학적 글이 아니지만 육하원칙에 따라 세세한 세부사항을 나열하면서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가? 여행기는 또 어떤가. 글과 묘사에서 탐색하고 고민하는 인간은 사라지기 쉽다.

 

우리가 늘상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는 우리가 이렇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과학 지식 문화다. 그 안에서 인간이 실종되고 창조의 과정이 실종된다는 것은 종종 잊혀진다. 인간조차도 더 많은 데이터 속에 있다고 생각된다. 흔들림없는 단호한 확신과 많은 지식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표로 생각된다.

 

더 많은 정보와 세부사항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허구는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앞에서 말한 과학논문에 대한 오해같은 오해가 흔하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노출하는게 아니라 완벽한 묘사속에서 자기를 숨긴다. 글은 완벽한 객관적 묘사가 되지 대화가 되지 않는다. 작가는 의도했건 의도한 것이 아니건 자신을 실제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격상시킨다. 이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 아닐까?

 

게다가 21세기에는 사진과 같은 글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이 그렇게 된지는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그 소식이 사람들에게 충분히 퍼져있는가는 의심스럽다.

 

나는 세부사항이 많이 들어간 글을 비판하고 폄하하는 것처럼 썼지만 처음 말했듯이 그것 자체는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것도 아니다. 사실 좋은 경우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특히 세상에 정보가 부족한 시대, 예를 들어 신대륙을 처음 방문한 탐험가가 고국에 돌아가서 보고서를 써야 하던 시대에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시대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사진기가 발명되기 이전에 실제로 눈으로 본 것처럼 그릴 수 있다는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어떤 작가의 긴 글보다도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런 그림은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알프스에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 알프스의 풍경을 보여준다. 왕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왕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게 다라면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에는 회화는 사라졌는가? 보통은 반 고호를 이야기하면서 더 현실적이란게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고호의 그림은 실제와 다르다. 나무들이며 건물의 선이 실제보다 구불구불하고 색도 실제로 가서 본 것과 다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 고호는 그런 그림을 더 현실적인 묘사로 보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사진기가 흔한 시대에 실제와 아주 똑같은 그림은 별로 가치가 없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엄청난 양의 사진들이 찍혀지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사진을 찍어 보내는 친구는 세계적인 작가나 화가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가 돈받고 쓰는 영화평론도 그저 한줄짜리 댓글보다 못한 경우가 있다. 세부사항으로 범벅이 된 평론인데 그 안에서 글쓴이가 안보이는 경우다. 그래서 다 읽고 나도 이게 추천인지 재미있다는건지 알 수가 없으며 말은 많은데 이 영화에 대한 감상에 대해 나는 책임안집니다라는 한줄을 읽은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보다는 불광동휘발유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누군가가 아 지루했어라고 한마디 쓴게 때로 도움이 된다. 아이디를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막연하게나마 이미지가 생긴다. 결론도 무척 간단하다. 이걸로 이 영화에 대해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정보는 얻은 셈이다. 게다가 이런 댓글은 수백 수천개가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반면에 어떤 평론은 작가가 자신을 세심하게 지운 나머지 독자가 그것을 읽고나면 뭔가를 많이 배웠는데 오히려 더 무지해진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18세기나 19세기에는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훌룡한 일이었다. 21세기에는 정보는 너무 많고 지금도 정보의 양은 폭증하고 있다. 뉴욕에 안가본 사람도 스트리트 뷰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뉴욕을 걸어다니는 것처럼 둘러볼 수 있다. 세계 아주 많은 곳을 그렇게 돌아다닐 수 있다. 여러가지 사실들은 인터넷 서치 프로그램으로 점점 더 수집되고 확인하기 쉬워질 것이다. 10년쯤 뒤나 20년쯤 뒤에는 도대체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게 될 것인가?

 

우리가 어떤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면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순간 호흡하므로 우리가 호흡한다는 사실을 잊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객관적 정보가 흘러넘치는 세상에서 우리가 지금 객관적 세계로 부르는 세계의 측면들은 점점 더 잊혀질 가능성이 크다. 그것들이 안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호흡이나 공기가 안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잊혀진다는 것이다. 흔하니까. 그렇게 되면 세상은 달라보인다. 지금은 잘 안보이는 것이 매우 크게 보이고 지금은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잘 이야기되는 것이 전설처럼 잊혀질지 모른다. 그것이 21세기에 우리가 숨쉬고 살 정신세계의 공기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현실의 어떤 부분을 말하고자 하는가. 말해야 하는가. 시대는 이미 변했고 더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계몽주의시대쯤을 살고 있는 것같은 사람들은 많다. 그리고 그런 글들의 가치를 너무 크게 느끼는 사람도 많다. 어떤 글의 가치를 평가할 때 그 과거의 잣대에 지나치게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뭘 써야 할 것인가는 이제 당연하지 않다. 나는 뭘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쓸 거리를 찾고 있는가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 > 쓰고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화와 우리들의 세계  (0) 2015.07.23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  (0) 2015.04.28
소설 쓰기  (0) 2014.12.19
고전의 이해  (0) 2014.08.25
독서모임, 함께하는 공부에 대한 단상  (0) 2014.06.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