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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소설 쓰기

by 격암(강국진) 2014. 12. 19.

2014.12.19

나는 이따금 소설이나 긴 연작 에세이 형태로 글을 쓸 때가 있다. 그런 글은 자 이제 한번 써볼까 하는 식으로 써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뭔가가 안에서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하는 답답함이 느껴질 때 쓰게 되는 글이다. 예를 들어 한번은 나는 합리적 사고의 근거라는 연작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을 쓸 때는 사실은 내가 뭘 쓰는지나도 처음에는 몰랐다. 지금은 내가 쓴 것에 앞에 서문을 달고 합리적 사고의 근거라는 제목까지 붙여서 글을 정리했기 때문에 마치 어떤 기획을 가지고 차근 차근히 글을 써 나간것 같지만 실제로는 뭔가를 쓰기 시작했더니 10여편의 글을 쓰기 전까지는 멈출 수가 없었다라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다 쓰고 내가 다시 읽어보니 고쳐야 할 문장도 많았고 중간에 한두마디를 써 넣어서 이게 이래서 쓰는거라고 설명을 붙이는 쪽이 좋아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글은 마치 처음부터 어떤 기획을 가지고 쓰게 된 것같은 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원본을 수정해 버렸기 때문에 원본은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같아서는 원본을 그대로 따로 가지고 있을걸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도 그렇다. 때로 닭도 병아리도 아닌 어떤 것이 세상바깥으로 나오려고 한다. 그걸 무시하면 찝찝하고 그걸 살려보려고 하면 사실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길을 걷다가 혹은 목욕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그녀석이 사라질 때도 있지만 어떤 녀석들은 사라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를 이렇게 만들어 줘라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은채 나를 조른다.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란 글은 시리즈로 4편이나 썼는데 그 글을 쓰게된 계기는 어떤 글을 쓰다가 철학을 할 줄 모르는 닭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을 할줄 모르는 닭이라는 표현을 보자마자 닭장 속에 있는 그 닭은 나를 졸라댔던 것이다. 

 

내가 식견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세상에 더 멋진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며 마음이 평화로운 남자며 새빨간 거짓말이며 하는 몇가지의 글들이 탄생되는 것들을 보면서 스스로 놀라곤 했다. 알을 품어주는 쪽이 어설퍼도 알은 어찌저찌 세상에 형태를 가지고 나온다. 스스로 생존의 노력을 하는 것처럼. 

 

당연한 거지만 이러한 부화와 탄생이 언제나 성공이었던 것은 아니다. 잘났건 못났건 일단 글의 형태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 내보내주는 나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우그러진 것은 아예 부셔버린다고 한다. 전문적인 작가들은 자신들의 습작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정말 왠만하면 살려준다. 어디 책에 출판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블로그에 공개하는 것이지만 못나도 살아 있을 권리가 있지 않은가 해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녀석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오랜간 알속에만 있을 뿐 알이 깨지는 소리가 없어서 아무래도 안에서 죽어버린 것같은 녀석이다. 나는 한동안 어떤 술집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그 술집에 대한 이미지만 있고 그 술집에 대해 뭘 써야 하는지, 내가 그걸 왜 써야하는지는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석은 태어나지 못한 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 글은 물론 기본적으로 내가 읽기 위해 쓰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그 형식에 어떤 제약은 없다. 굳이 있다면 내가 읽고 재미있을 것정도일까. 요즘은 더 뻔뻔해 진 것인지  글이란게 한페이지를 쓸 것인가 열장을 쓸 것인가 백장을 쓸 것인가에 따라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규칙을 가지고 정보를배분하고 사건이 전개되고 하는 어떤 형식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좀 희미해진다. 한 문단을 읽어도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다. 어떤 공주가 호화로운 호텔의 침대에 나체로 밧줄에 묶여 있다라고 내가 쓴다면 많은사람들은 그래서 그 공주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다음 문단에서는 당신은 왜 그 문장에 주목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예 그 다음 설명따위 없을 수도 있다. 뭐든 쓰면 된다. 뭐든 쓰면 거기에는 생각의 흐름이 있고 소통이 있다. 소통이 있으면 사람들은 거기서 어떤 게임의 법칙을 느낀다. 글이란 그 내용보다 오히려 그 형식이 더 중요하다. 어떤 식으로 사고가 흘러가는가를 공유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에 그런 사고방식이 적용되어서 결과가 이러저러하게 나왔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과학적 논문이 아니라면 말이다. 

 

과학논문은 객관적 현실에 대해 쓰는 것이지만 비과학이라고 할수 있는 글들은 각자의 현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야기보다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혹은 메타 이야기를 듣는 쪽이 진짜 소통이 아닐까. 어차피 삶의 선택과 결론이 구체적으로 뭐였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다른 입장에 서있으니 같은 원칙속에서도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요즘에는 가게를 만들려고 하는 두 남자에 대한 글을 써보고 있다. 이 녀석들도 그냥 놔주지는 않으면서 쉽게 세상에 나와주지도 않는다. 이러다가 또 묻혀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글은 절대로 끝나지 않았을 것같은데도 끝나곤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날지도 모르겠다. 그걸 모른다는게 글을 쓰는 재미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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