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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무협소설과 글쓰기

by 격암(강국진) 2014. 5. 26.

2014.5.26

나는 무협소설을 써 본적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둘째형님의 영향으로 무협소설을 많이 읽은 편이다. 둘째형님은 시중에 나온 무협소설이란 소설은 모두 읽는 무협광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협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싸움이나 무공의 세계보다는 글쓰기의 세계를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때가 많다. 

 

어쩌면 세상일의 이치란 서로 연결되어 여기에 붙이며 이렇게 그럴듯하고 저기에 붙이면 저게 그럴듯하기 때문일테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점점 더 그럴 듯한 생각으로 여기게 된 것에는 한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무협소설의 작가들은 프로작가이므로 당연히 글쓰기에 대해서는 잘 알것이다. 그러나 그들중에 진짜로 싸움을 해보고 무술을 익힌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물론 그들도 책을 읽거나 참고삼아 무술을 배워본 사람은 있겠지만 그래봐야 현실에서는 잘해야 건강한 남자고 대개는 창백한 건강미 제로의 남자들이 쓴 것이 무협소설이다. 그러니 그들이 쓴 것은 결국 글쓰기의 세계를 변조한 가공의 격투기세계일 거라는 주장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럴듯하다.

 

예를 들어 무협소설에 거듭되어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형을 초월한다던가 초식을 초월한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무공이 어느 경지 이상이 되면 정해진 대로 손발을 놀리는 초식을 따라하는 경지를 넘어서 그때 그때 자기마음대로 손발을 놀려도 위력적인 무공이 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아. 그러나 이거야 말로 정말 뻔한 글쓰기의 이야기가 아닌가. 사람이 책을 감명깊게 읽으면 그 책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적어도 책을 읽고 난 직후에는 그 책의 저자처럼 말하고 저자처럼 글을 쓰게 된다. 그러다가 다른 책을 보면 그 영향이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지만 어떤 때는 그 영향이 상당히 깊다.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글쓰기는 적어도 처음에는 모방인 것이다. 책한권읽지 않고 글부터 쓰는 사람은 없다. 잘 쓴 사람의 글을 보고 흉내내는 것에서 글쓰기는 대개 시작된다. 그렇게 해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쓰다가 또 언젠가 다른 사람의 글을 만나 감명을 받으면 저런 식으로 글을 쓰다가 하는 식이 된다. 그런 일을 많이 겪은 연후에야 우리가 도달하는 세계는 바로 초식을 초월하는 세계 즉 어떤 누군가의 문체를 흉내내지 않고 마음가는대로 쓰는 데도 읽을 만한 글이 나오는 경지가 되는 것이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공의 기본은 내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술은 내공이 필요하고 내공이 없으면 그 위력이 거의 없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 설정이다. 이 세상에 진짜 내공이라는 걸 쓰는 무공이 있는지, 그런 무술의 이론이 실재하는지는 알지못하나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공에서 쓰는 내공이라는 것은 단순히 문체같은 형식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철학적 문화적 배경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글은 잘써지지 않거나 아주 피상적이고 단순한 글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교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거나 기독교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야 그런 인생관의 기본위에서 여러가지 세상일에 대한 해석이 가능하고 그런 해석과 느낌위에서 글은 써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협세계에 여러가지 신공이 등장하고 여러가지 내공이 등장하듯이 현실도 보면 세상을 보는 데에는 여러가지 문화내지 철학이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이런 부분을 담당한 것은 당연히 불교나 도교일터인데 중국무협의 세계에서 천하제일 고수로 등장하는 두개의 방파가 달마대사의 소림사와  장삼풍의 무당파라는 것, 이외의 방파들도 대개는 도교나 불교의 일맥들이라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대개의 경우 신공을 통해 내공을 연마하는 방식은 불교의 선승들이 좌선하는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다. 

 

결국 천하의 방파, 강호의 세력이라는 것은 어떤 철학적 문학적 종교적인 힘 즉  정신적 힘을 지닌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무협소설의 세계에서 마교로 등장하곤 하는 명교는 명나라를 세운 종교세력이니 왜 명교가 그리도 강력한 무공을 지닌 천하제일의 방파로 기술되는지 이해할만하다. 명교는 본래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이니 중국에서 명맥을 현대에까지 이어내려온 도교나 불교 유교등에 비해 중국사람입장에서는 마교로 부를만한 이질성을 가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무협소설에서는 공자를 최고 고수로 생각하는 방파가 등장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도 보면 불교나 도교가 신화적 세계와 잘 어울리는 반면 유교는 그러지 못한 편이다. 유교에는 죽으면 간다는 저세상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도 없다. 귀신같은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공자님은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 그것은 부처님도 어느정도 마찬가지인데 불교는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중국남방의 도교와 뒤섞여 거의 구분할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스님들도 노장을 읽는 일이 많은 것이다. 

 

아뭏튼 이렇게 내공을 쌓다보면 무협의 인물들은 소위 임독양맥을 뚷는다던가 하는 새로운 경지에 오르게 되는데 그것은 내공의 수련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수도 있고 천하의 영약을 먹는 기연을 만나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대개의 경우 임독양맥이란 임맥과 독맥을 말하는 것으로 태어날때는 뚫려있다가 자라나면서 탁기가 쌓여서 내공의 순환을 막는 일이 있는데 이 임독양맥이 뚫리면 내공이 자연스럽게 순환되어 내공의 힘이 마르지 않는다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이 믿는 그 문화적 정신적 전통속에서 자기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전체를 조망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른 것을 말하는 것같다. 우리가 어떤 문화적 종교적 배경속에서 살게 될때 처음부터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해 답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는 그저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맞겠지, 예수님이 그랬다더라, 부처님이 그랬다더라하는 식으로 어떤 권위에 의존하여 그것을 그냥 외우게 된다. 따라서 그 문화적 배경속에서 예절과 전통을 지키더라도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이해가 없는 것이다. 그러던 사람이 자기성찰을 통해서 자기 인생관과 종교에 대해 전체적인 이해가 일관적 흐름을 만들어 내게 되면 갑자기 세상이 뻥뚫려 보이고 세상일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보이게 되는것이다. 이걸 가르켜 임맥양독을 뚫은 절세고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당연히 무협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을 글을 쓰지 못한다던가, 무협소설작가가 말하는 글쓰는 법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옳은 것이라던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소설을 읽고 그것이 무술의 세계가 아니라 글쓰기의 세계에 대한 것이라는 내 생각도 그저 어설픈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어느정도까지는 그럴듯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내공을 길러야 하고 임독양맥을 둟은 고수가 되어야 하며 초식을 잊는 경지에 까지 도달한 고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길은 무공의 고수가 되려면 날마다 연습을 반복하고 실전속에서 싸워봐야 하듯이 글쓰기를 많이 연습하고 뭔가를 진지하게 쓰는 일을  여러번 겪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일 것이다.

 

단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절벽에서 떨어져서 전대의 고수가 남긴 비급과 영약을 얻고 천하제일 고수가 되는 기연을 얻고는 하지만 난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에 천하제일의 문장가가 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그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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