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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나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by 격암(강국진) 2014. 10. 3.

2014.10.3

어머니가 한번은 아내와 통화하시다가 일때문에 보건소에서 자주 만나는 어떤 직원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사람은 착한데 머리가 좀 둔해."

 

나는 얼마전까지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 말을 의외라고 생각했다. 나이든 분들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쉽게 넘어가는 일이 많아서 곤란하고 불안하다. 나는 이렇게 아내에게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생각하니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관련하여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몇 생각난 것들을 일부 적어 두기로 했다.

 

우리는 그 사람은 마음은 착한데 머리가 좀 둔하다라던가 그 사람은 참 사람은 똘똘한데 사람이 나빠같은 말을 하곤한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정말 다른 것일까? 물론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어머니의 태도변화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말 그게 어떻게 다른 건지 알고서 그 말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일단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걸 2차원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악함과 어리석음을 각각 평가하여 점수를 매기고 이 사람은 이렇기 때문에 이렇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말들은 우리의 무지를 숨기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은 절대 두개의 차원에서 평가되어지고 설명되어 질 수 없다.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살고, 그 스스로가 더 복잡한 존재다. 그걸 뭐라고 부르던 우리가 행동을 이러저러하게 하는 이유는 적어도 수백 수천 아니 거의 무한대의 차원에서 평가되고 분석되어져야 한다.

 

그 모든 성향들에 대해 일일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사악함과 어리석음이라는 두개의 구분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이름 한개면 된다. 나는 내 개인적 취향에 따라 그것을 어리석음이라고 부르기 좋아한다. 즉 어리석은 것이 사악한 것이고 사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걸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던 사악함이라고 부르던 문제는 그게 뭔가를 더 생각해 보는 일이다. 그리고 특히 분리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분리시킴으로써 우리는 어떤 환상에 빠져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이런 문제들에서 본질적 질문은 간단하다. 도대체 우리는 왜,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선택하고 왜 그렇게 말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사악함, 나쁨 같은 말을 만들어 내고는 그가 혹은 그녀가 사악한 사람이라서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고서 마치 자신이 뭔가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악한 것과 어리석은 것의 차이는 뭘까. 우리가 사람이 나쁘다던가 사악하다고 할 때는 생각해 보면 종종 그 이유가 없다. 그 말로 끝이다. 한 나쁜 사람이 지나가는사람을 폭행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그냥 그 내적인 성향이 나쁘니까 그렇게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음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지만 그 말은 조금 더 외적인 영향에 대해 말하는 경향이 있다. 어리석음이란 능력의 한계라는 말과 같이 이해된다. 즉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지만 그것은 본인의 의지때문이 아니라 능력의 한계때문에 외적인 영향에 의해서 혹은 외적인 영향을 잘못 해석한 결과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사악함이라던가, 어리석음이라던가 하는 말들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그 말들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무지와 우리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으며 알려고 하는가하는 것에 대한 무지고 의지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나 던질 때,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물론 어떤 정보를 전달한다. 말에는 의미가 있다. 때로는 아주 많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의미를 전달해도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가 정보를 전달하는 동시에 행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행하는 것은 어딘가에 벽이나 이정표를 세우고 이 너머로는 더이상 생각하고 보고 듣지 않겠다, 나는 그것에 관심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왜냐면 사실 우리는 끝없이 왜를 물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우리는 어디선가는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나빠서 혹은 어리석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그 나쁨이 그 어리석음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왜 나쁜 사람일까 혹은 그 사람은 왜 어리석을까를 물을 수 있다. 우리는 거기 대해 인간의 욕심이나 질투나 애정이나 개인적 성장의 역사에 이르기 까지 여러가지 설명을 붙일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면 말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욕심에 패배한 사람은 사악한 것일까 아니면 어리석은 것일까.

 

다시 그 사람은 착하지만 머리가 좀 둔해라는 말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통상 이런 말을 들으면 거기에는 뭔가 문제의 그 사람에 대한 어떤 정보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표현에 들어있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의 주관적 태도고 의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의 말이 변했을때 실제로 변한 것은 주로 그 직원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의 마음상태다. 그 말들은 그 사람에 대한 것 이전에 어머니가 세운 무시와 무관심과 무지의 이정표가 서있는 자리에 대한 정보들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표현속에 뭔가 단단한 객관적 실체가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악함이나 어리석음이 뭔지 우리는 알고 있고 느낀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욕심이나 질투나 애정같은 다른 말들까지 첨부하고 나면 이제 하나 하나의 사람들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인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이 가지는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고 보통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것은 휠씬 더 그렇다. 문제는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는 대개 스스로가 모르는 것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

 

여기 상자가 하나 있다. 당신은 방안에서 어떤 안내원과 마주보고 서있다. 그 안내원이 말하기를 이 상자에는 사과가 아니면 배가 들어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당신은 당신이 이 상자안에 사과가 들었는지 배가 들었는지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당신의 무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내원이 말한 것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고려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이미 무의식중에 당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당신은 박스안의 무지만을 생각했지만 박스 바깥에도 무지는 펼쳐져 있다. 실은 그 방바깥에 제3의 인물이 있을지 모른다. 그 안내원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그 안내원이 뭘 그 상자안에 넣건 그 사람이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방의 바깥에도 무지는 펼쳐져 있다. 우리의 무지는 무한하다. 우리가 놓여져 있는 상황은 무한의 박스가 중첩되는 가운데 무한히 펼쳐져 있다. 스스로 내가 뭘 모르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개 우리가 무지하다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말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 환각을 만들어 내어 결국은 스스로에게 나는 뭔가를 알고 있다고 설득해 내는데 성공하고 만다. 직업적인 철학자도 그렇게 한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도 자신이 모르는 것은 전부 마음이란 것에 집어넣고는 오히려 반대로 마음속에 있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결과 우리는 이런 상태에 빠진다. 개를 보고 있는데 우리는 뭘 보던 그걸 고양이가 아니면 사람으로 본다. 개라는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안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고양이네 라고 하고 나서 조금 있다가 다시 보면 고양이가 아니다. 고양이가 아니면 사람이 틀림없으니 이번에는 사람이네 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니까 또 그게 틀렸다. 사람이 아니면 고양이니까 이제는 고양이로 보인다. 이렇게 사람과 고양이라는 답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끌어모아서 이게 고양이인지 사람인지 답을 내려고한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둘 중 어느쪽이 답인지를 확고히 가르쳐줄 정보라고 생각한다. 실은 고양이와 사람 둘중의 하나밖에는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데 말이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으로 하고 싶다. 나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정말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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