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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들

by 격암(강국진) 2012.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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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27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욕망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둘을 합치면 우리는 결국 인간을 이해를 하고 싶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뭐가 있을까? 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인간의 예술은 인간이 뭘 표현하고 싶어하는지를 말해준다. 심지어 동물을 연구하는 것도 인간에 대한 연구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건 에드먼즈 모리스의 털난 원숭이 같은 책을 보면 분명하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것을 연구함으로서 인간이 뭔지를 알게 되고 인간을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바로봄으로써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편견을 제한할 수 있다. 

문학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소설은 가상적 인간이 등장하는 실험장이다.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변하고 부딪히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그의 유명한 짧은 소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하느님이 천사에게 준 세가지 질문을 논한다. 그것은 각각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은 무엇이 없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인간은 사랑을 가지고 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를 보는 능력이 없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은 살아간다고 결론을 내린다. 언뜻 들으면 사랑이 소중하다는 흔한 이야기지만 톨스토이같은 대문호가 책몇권 팔자고 아무렇게 글을 쓰겠는가. 나름대로 진지하게 인간에 대한 고민을 압축시키고 답하는 과정을 나열한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과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의 소중함을 절감했기에 그런 글을 썼을 것이다. 실제로 부유했던 그는 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경제학이나 사회학이나 문학같은 것이 인간에 대한 거라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결국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인간이 뭘 원하는가, 인간은 이러저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과학은 종종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중력의 법칙은 인간눈에는 이렇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벌레나 악어에게도 참인 법칙이니까. 즉 자연법칙을 다루는 과학은 객관적이고 시간에 무관한 진리를 다루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닌것 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결국 과학은 인간의 논리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다. 하나 하나의 부속품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걸 조합해서 스포츠카를 만들지 아니면 패밀리카를 만들지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욕망이 없었다면 과학이 발전했을 리 없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욕망하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는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제한되어 있게 된다. 누구도 그런걸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연구가 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

결국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의 속에는 인간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것이라는 말은 자명하게만 들린다. 그런데 너무 자명해서 우리는 이 말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것이 이 자명한 말들을 적어도 가끔은 반복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우리의 행동의 적어도 상당부분은 인간을 이해하고 싶은 즉 남들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이해가 없는 자신이 불만족스럽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결국 저 친구는 왜 저럴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런 생각들을 할까라는 질문에 의해 저 깊은 곳에서 움직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걸 의식하지 못할 때도 말이다. 그래서 연애심리에 대한 글들이나 어느 부부의 부부싸움 이야기같은 것들이 언제나 인기가 좋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그 안에서 나와 너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뭔가를 배우고 나면 금새 인간을 잊어버린다. 우리는 어떤 권위나 어떤 시스템이나 어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추구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우리는 금새 이런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본래 관심있었던 달은 잊어버리고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게 된다. 

역사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짜장면을 먹는가 짬뽕을 먹는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어떤 법칙에 대한 추구는 짜장면을 선택하게 하는 법칙이 우리 개인으로 하여금 짜장면을 선택하게 했다는 식으로 우리의 선택을 설명한다. 역사적 사회적 법칙이 국가와 공동체의 흥망성쇠를 설명하고 그런 설명속에서 인간이란 어떤 법칙의 제약에 따라 갇혀있는 존재, 선택의 자유가 없는 존재다. 

과학자는 인간을 잊어먹기 가장 쉬운 부류다. 결국 과학논문을 평가하는 것은 대중이전에 전문가 집단이니까 전문가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점점 더 인간세상에서 멀어지기 쉽다. 과학자만 그럴까 법관도 그렇다. 법관도 법은 법이라면서 기계적인 인간이 되기 쉽다. 결국 이렇게 따지다보면 경쟁이 치열하고 배워야 할게 많은 분야는 어디나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장 코앞의 논문이나 시험이나 경쟁이 중요한데 인간이니 뭐니 하는 것따위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하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수십년을 아주 바쁘게 살았는데 뒤돌아보고 어느날 질문을 던진다. 나는 사실 내가 누군지. 다른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그게 궁금한거였는데 코를 땅에 처박고 뛰다보니 그저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는 일로 수십년이 지나가 버렸을뿐 그 질문에 대해서 쥐뿔도 더 알게 된 것이 없다. 우리는 오히려 더 무지해진 것같다. 나는 도대체 뭐하러 이렇게 바쁘게 뛰어다녔던 것일까. 뭘 위해 인생을 그냥 날려버린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인간을 잊어버리는가

어떤게 과연 우리에게 인간이 뭔지를 가르쳐 줄까. 이 질문은 가장 중요한 질문중의 하나다. 그럼 여러 학문들은 이 질문을 목적지로 삼고 거기에 매진하는가? 그렇지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여러분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을 발견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인간이 뭔지를 가르쳐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누구나 조금씩은 그런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또 뒤짚어 보면 거의 대부분은 그런 일을 하지 않고 그런 일에 지원도 없다.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바라보고 살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개 인간을 느낄 수 없는 것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다. 

어쩌면 이건 질문자체가 너무 어려운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일을 한다. 자동차와 옷이며 영화와 전화기에 이르기 까지 서로 사고 파는 모든 것들이 결국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것이니까. 광고들은 사람들의 욕망을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소비하라고 야단 법석을 떤다. 

그래서 일까. 소비적 사회, 자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 존재하는 욕망들은 분명 인간의 욕망일 텐데 인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술에 취하게 만들어 비틀거리게 해놓고는 저 모습이 저 사람의 진정한 본모습이라고 하면 공감이 가질 않는 그런 느낌이다. 지위나 명성, 성적인 욕망에서 식욕에 이르기 까지 여러가지 욕구가 가득찬 세상을 보면 저건 진짜 인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만들어진 욕망, 착각에 기초한 욕망처럼 보인다. 

우리가 멋진 가수나 여배우에 대한 동경과 욕망을 무럭무럭키워서 그들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상황이 되었을때 이러한 욕망은 실질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즉 그녀들의 손을 잡는 다는 행위자체가 정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그 손을 잡는다고 할때 우리들은 누가 누군지 구분이나 할수 있을까. 구분할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정말 그렇게 간절해질 정도의 욕망을 만들어 낼 수준일까? 그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욕망안에 정말 우리의 본모습이나 혹은 그 가수나 여배우의 진면목이 들어 있는 것일까?

어차피 다 환각같은 것이니 확실한거나 챙기자는 생각에 이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그러다가 보면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인간을 잊어버렸구나 하고. 돈이든 지식이든 뭐든 확실해 보이는 것을 챙겼는데 그러다가 보면 인간을 잊어버린 나는 도대체 그동안 뭘 생각하고 공부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을 감옥이나 틀속에 집어넣고 쥐어짜는 법?

맺는 말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 변화한다. 인간은 거울이나 풍선같은 존재다. 즉 환경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다기 보다는 자신의 내부속에 외부를 비추는 존재다. 똥속에 집어넣어진 거울에는 똥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거울의 본모습이 똥인 것은 아니다. 

내일의 주식시장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면 곧 그 방법은 통하지 않게 되고 주가는 더더욱 복잡하게 변화하게 된다. 그 이유는 주식을 투자하는 사람이 그 새로운 방법대로 투자하기 때문에 그 예측이 빗나가는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것을 안다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도록 노력해서 그 예언을 틀리게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문학이 죽었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뒤짚으면 문학이 인간을 너무나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이 이룩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인간사회에 들어오면 올수록 인간의 행동은 더더욱 복잡하고 예측불가한 모습을 가지게 되서 이제 일상어로는 인간사회를 정리해 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중에 가장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과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글을 통해 파헤치는 인간의 본질, 이 세계의 모습은 우리를 달라지게 하고 우리 세계를 확장시키고 변화시킨다. 그래서 다시 더더더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과 지성을 요구하게 되는데 결국 일상어로 지어올릴 수 있는 건물의 높이에는 한계가 있어서 더이상 문학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된것은 아닐까. 이것은 철학도, 음악도, 그림도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린 일상어로 도달할수 있는 인간이해의 어떤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우리가 아직은 실험실이나 과학자의 연구실에서 인간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는다. 과학의 언어로 우리가 예술을 초월한다고 해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언어의 한계는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예술이나 문학의 한계를 거론하기 보다는 인문학이나 예술이 지향하는 것과 과학이 지향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라는 말을 하고 만다. 

그러나 한 백년뒤에 돌아보면 우리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인문학이나 과학이 사라지는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학이나 음악이나 그림은 그 한계에 도달하였고 과학이 인간을 전과는 다르게 논하는 시대에 도달한것일지도 모른다. 이 새로운 과학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의 과학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문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은 그걸 가르켜 과학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인문학 새로운 예술의 시대가 왔다라고 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 고전적인 과학을 포기한 것이다. 인과론이 부분적으로라도 깨지니까. 즉 일들이 이유없이 생긴다. 이래서 아인쉬타인이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면서 끝까지 반대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양자역학을 과학이라고 여전히 부른다. 미쳐 과학이라는 말의 의미가 적게나마 변화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채. 

미래의 예술가들은 수학으로 소설을 쓰고 조각을 하지 모른다. 그 결과물은 소설이나 조각이라고 불리지 않고 과학적 연구결과라고 불릴지 모르지만 따라서 그들은 과학자라고 불릴지 모르지만 그들의 메세지는 점점 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것에 대한 것이 되며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대한 것이 될 것이다. 

과학이 윤리와 가치에 이르게 되면 과학을 공부하는 것의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들은 문맹들 사이에서 권위를 자랑하던 중세의 성직자같은 위치에 도달하지 모른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혹은 어떤 대단한 시스템만이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는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 시대에 가장 값진 지식일뿐만 아니라 권력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누군가가 열심히 그리고 기꺼이 쉬운 말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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