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20
돌아보면 어린 시절에 나는 진짜로 산다는게 뭘까 하는 생각을 가끔했던 것같다. 누가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꿈많은 청춘은 이따금 이렇게 사는 것은 아직 진짜가 아니며 진짜로 살아가는 것이 뭔지 알고 싶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혹시 그걸 아직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인생의 핵심을 써두기로 했다.
나는 나이가 들었다. 나는 적어도 내가 10대거나 20대였을 때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경험했고 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새 불손하게도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부모님에게 이따금 충고하듯이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말이란 대단한 말은 아니다.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인생은 즐겁게 살아가기도 바쁘다. 맛있는거 먹고 좋은 데 구경하는 데 쓰기도 바쁘다."
아마도 나는 부질없는 행동으로 이런 저런 문제를 실제로 만들거나 쓸데 없이 없는 문제를 상상해서는 걱정에 빠지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럴 필요는 없다. 유명한 팝송 가사에도 나오지 않는가. 돈 워리 비 해피.
그런데 자꾸 자꾸 반복되는 일이지만 나는 내가 쓴 것에서, 내가 말한 것에서 때로 배운다. 마치 그것이 어떤 스승님의 말인것 처럼. 말하고 보니 정말 그렇다. 인생은 즐겁게 살아가기도 바쁘다. 맛있는거 먹고 좋은 데 구경하는 데 쓰기도 바쁘다.
만약 내가 위에서 한 말을 어머니에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삶의 핵심적 진실을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먹고 섹스하고 좋은 곳을 구경하는 것이 인생의 진실이라고. 그게 전부라고. 아무래도 어머니와 이야기하면서 섹스를 이야기 할 수는 없으니 그건 빼먹었을 뿐이다.
그러나 물론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짧은 이야기에는 뒤따라 붙는 말이 있고 약간의 함정이 있다. 인생의 진실, 진짜로 사는 것의 핵심은 먹고 섹스하고 좋은 곳을 구경하는 것이 맞지만 그것은 생각보다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험이 필요하고 배움이 필요하다. 먹고 섹스하고 좋은 곳을 구경하는 것이 삶의 핵심이기는 단세포동물도 마찬가지다. 다만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다. 그것들이 삶의 핵심이라도 그렇게 하는 방식은 무한하다.
먹는 것만 해도 그렇다. 피자를 먹건 프랑스요리를 먹건 혹은 한정식을 먹건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건 먹는 것은 당연히 영양분을 입안에 집어넣는다는 것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똑같은 맥주나 와인 심지어 맹물 조차도 멋진 컵에 담아 먹으면 맛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진짜로 사는 것의 핵심이 먹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뭐야 겨우 그거야 나는 먹는거라면 자신있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먹는 것에 지나치게 흉한 미사어구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항상 좋은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먹을 때 우리는 단순히 물질을 몸에 집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지식과 이미지를 먹는다. 아는 만큼 먹고, 아는 만큼 즐기게 된다. 그러니까 풍요로운 식사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들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풍요가 있어야 즐길 수가 있는 것이며 마치 몸에 맞는 옷이 있듯 우리만이 즐길 수 있는 식사가 있는 것이다. 너무 복잡하지도 않고 너무 단순하지도 않게 우리의 내적세계에 맞는 식사가 즐거운 식사다.
우리는 매일 같이 라면이나 소면따위를 먹고 보리밥에 채소 반찬 몇가지만을 먹으면서도 그것을 가장 맛있고 행복한 식사로 여길 수도 있다. 곰발바닥이니 양의 골이니 하는 나로서는 엽기적인 음식을 먹으면서도 물론 그렇게 느낄 수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우리 삶을 어떻게 꾸미는가, 어떻게 만들었는가의 문제다.
허름한 재래시장의 풍경은 그 재래시장이 있는 골목을 평생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지겨운 풍경일 수 있어도 세계를 여행한 사람에게는 가장 자극적이고 정겨운 풍경일 수 있다. 보는 것이든 먹는 것이든 그 즐거움은 거의 대부분이 의미에서 나오고 문맥에서 나온다. 가장 맛있는 코스 요리도 그 모든 것을 합치고 믹서에 넣어서 갈아 죽으로 만든다면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두사람이 평생 다녀본 곳이 꼭 같았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를 언제 어떻게 누구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다녔는가에 따라서 두 사람의 감상과 즐거움은 천양지차가 되기 마련이다.
섹스도 물론 그렇다. 인간의 감각 특히 촉감은 둔하기 짝이 없다. 흥분되고 즐겁고 황홀한 섹스란 99%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나라와 그렇지 못한 두개의 나라가 있다고 하자. 성적으로 개방적인나라의 한 젊은이는 이십대가 끝나기 전에 수십번의 연애를 하고 그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섹스를 하며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와의 첫키스 따위는 십대를 넘긴지 얼마 안되어 해치워 버렸을지 모른다. 아니 아예 한번쯤은 결혼했다가 이혼한 경력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성적으로 보수적인 나라에 태어나서 연애는 별로 해본적이 없고 떨리는 가슴으로 첫사랑인 여자친구나 남자친구와 첫키스를 하고 손을 잡았던 사람보다 더 성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던가 하는 것은 절대 확실치 않다. 아무 생각도 없는 어린 시절에 이미 육체적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이런 저런 연애와 깨어짐을 반복한 나머지 20대 초반이 되면 사람을 만나는데 있어서 이미 헤어짐을 대비하는 그런 사람이 될 때 인생은 사실 이미 지루한 것이 되기 쉽다. 벌써 해 볼것 다 해보고 인생 별거없다는 느낌에 빠진 것뿐니까 말이다.
진짜로 산다는 일에는 초등학생이나 개나 고양이는 모르는 어떤 미지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그런 것을 찾아서 세상을 뒤지고 어려운 철학책속의 난해한 단어를 삼키며 명예와 권력을 찾아 헤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생의 핵심은 단순하다. 맛있는거 먹고 좋은 섹스를 하고 좋은 곳을 구경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회적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사실 나를 포함한 세상사람들이 맛있는거 먹고 좋은 섹스하고 좋은 곳을 구경하는 그런 세상에 살자는 것이 핵심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미지의 가치를 위한게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그 단순한 핵심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단세포동물이나 바퀴벌레나 개처럼 살면서 나는 인생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건 단세포동물의 삶이고 바퀴벌레의 삶이고 개의 삶이니까. 우리는 시간을 들여서 경험을 쌓고 배움을 얻어서 삶의 방식을 배운다. 배워도 그것은 여전히 결국 먹고 섹스하고 세상구경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세상의 현인들도 성인들도 석학들도 죽을 때가 되면 그런 것을 잘했는가를 회고할 뿐이다. 진짜로 사는 방법을 배워 간다는 것은 그 단순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어떤 것인지를 배워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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