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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종교관련글

종교와 과학 그리고 진리

by 격암(강국진) 2015. 10. 22.

내가 가끔 하는 생각인데 얼마전에 글을 하나 써볼까 하다가 다시 생각난 것을 몇자 써볼까 한다. 그 생각은 이렇게 시작한다. 몇백년전에 당신이 신부나 스님같은 종교인이라면 당신은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여겼을까? 어떤 면에서 그렇지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금의 지식인이 자기를 보는 것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것이다. 즉 자신은 종교를 믿는다기 보다는 이 세상에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본래 믿는다는 것이 어느 이상이 되면 믿는다는 느낌자체가 없다. 예를 들어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나는 과학을 믿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과학은 증명된 것이고 지식의 대상이지 종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논리적인 것에는 함정이 있다. 어떤 논리적인 체계도 다 정의되지 않는 단어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그게 뭔지 모르면서 그 뜻을 발견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그게 뭔지는 확실히 안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시간이라던가 물질이라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것이 뭔지 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의 발전역사를 들어본 사람은 그 질문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종교인들은 신을 믿거나 부처가 되려고 하지만 신이 뭔지 부처가 뭔지 모른다. 그걸 안다면 그것이 가장 고귀하고 기본이 되는 개념이 될수가 없다. 그것들이 다른 더 성스런 개념의 하위개념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자가 신이 뭔지 모른다는 사실이 21세기에도 기독교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그들이 세상을 볼 때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잘 설명이 안되는 부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정의되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신의 개념이 변하고 복잡해짐으로써 현실과 종교를 양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과학에서 시간이나 물질의 의미를 변형시켜가면서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전자는 물질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말같은 것에 익숙하다. 이런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찰된 사실을 과학의 시스템안에서 흡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들은 결코 과학과 종교가 같은 것이며 따라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든지 믿어도 좋다고 말하기 위해 한 것은 아니다. 자동차에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고 해서 좋은 자동차와 나쁜 자동차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듯 여러가지 사고의 틀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동등한 것이 될 수 없다. 종교만 해도 아주 엉성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종교도 많다. 그것들이 모두 동등하다고 할수는 없다. 


과학과 종교를 모두 철학적 체계 혹은 신념의 체계로 보았을 때 종교라고 우리가 파악하는 것들은 대개 복잡하고 많은 양의 정보를 다루지 못한다. 그것은 고작해야 몇십권, 몇백권의 책으로 이뤄진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다. 과학체계처럼 아예 수학을 쓰거나 수학에 가깝게 엄밀하게 정의된 의미의 연쇄로 세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때문에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종교적 신념을 지키려면 신의 의미가 엄청나게 복잡해져서 신비가 늘어나도 혼란은 남는다. 이런 업무를 해내는 분야도 있다. 그것이 신학이다. 그러나 신학은 요즘 별로 인기가 없고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적 신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개 택하게 되는 것은 보고 듣는 것을 줄이는 것이다. 정보를 무시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종교를 포기하기 전에는 내적 혼란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할수는 없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와 과학을 평온하게 양립시킬수 없다. 고작해야 어떤 위대한 과학자도 종교인이라더라 그런 것을 보면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있는 것같다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나는 과학은 과연 어디까지 정보를 다루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고 재미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복잡한 정보를 다룰 수 없다는 지적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일종의 과학만능주의에 빠져서 과학은 무한히 많은 정보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과학의, 적어도 현대과학의 핵심은 수학적인 체계다. 그런데 세상의 복잡함이 커지니까 수학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뉴튼의 위대함은 미적분을 만들어 그것을 통해 아주 많은 것을 수학적으로 설명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만 그래봐야 세상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뇌과학이나 경제학에서 수학은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우리는 물론 언제나 그런 분야에서의 막스웰방정식이나 뉴튼방정식을 발견하여 그 분야의 과학적 발전이 크게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있고 그렇게 하려는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다만 우리는 한가지 다른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신학이 매우 발달하면 세상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이 과학의 체계에 의해 밀려났듯이 인간이 정보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뉴튼은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그는 과학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그런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고 해도 먼 미래까지 그 사람은 스스로를 과학자로 생각하며 이러한 사고방식의 존재는 과학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건 말장난에 불과하다. 


더 많은 정보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이란 논리적인 설명을 포기하고 확률론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기계학습의 분야는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신이 컴퓨터에게 어떤 질문을 한다. 그럴때 그 답은 뭐가 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 과학적인 방식이란 질문과 답사이에 논리적인 한줄기 선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1은 2다. 3이나 4는 틀린 답이다. 


그런데 일상의 질문은 그렇게 처리가 안된다. 그래서 컴퓨터 프로그램은 방대한 데이터를 이용해서 비슷하거나 같은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답하는 가를 참조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관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논리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보다는 확률적이다.   


법칙의 존재를 추구하는 과학의 세계에서 진리란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확률론적인 사고방식에는 그런 법칙은 없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찾기를 기본적으로 포기한다. 그보다는 우리는 학습하려고 하고 적응하려고 하고 반응하려고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중요한 질문은 왜다. 이유고 법칙이다.   확률론적 사고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학습이고 지금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즉 우리의 편견이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편견 혹은 프라이어를 바꿔갈 것인가 그리고 그결과는 어떨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확률론적 사고방식에서 추구하는 것은 결국 자아찾기와 연결이다. 


우리는 우리가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우선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가를 봐야 한다. 엉터리 신문을 보면서 그 정보를 바탕으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만들려고 해서는 소용이 없다. 올바른 말을 들어도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자신을 바꿔갈 것인가 그리고 바뀌건 바뀌지 않건 그렇게 존재하는 자기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야 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신에게 기도를 할 수도 있고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서 그 안에서 안전함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엄청난 정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깨어있는 사람들의 네트웍을 조직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것말고는 행복과 자기를 지킬 방법이 없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세상에 눈을 감고 미신에 빠져서 살거나 과학이 정치에 패배하여 실패하는 것을 계속 보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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