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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종교관련글

종교의 이유

by 격암(강국진) 2015. 3. 16.

15.3.16

얼마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첫번째로 맞는 생신날에 있던 일이다. 어머니의 소망에 따라 우리 가족은 절에 들려서 제례에 참석했다. 나는 천도제 의식을 따라 절을 하고 금강경을 읽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종교의 이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종교비판글을 쓴 적도 있고 어떤 기성종교의 신자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이토록이나 많은 종교가 있고 신자가 있는 것에 아무런 이유도 없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종교인이게 하는가. 비록 내가 그날 떠올린 종교의 이유가 가장 큰  이유는 아닐지라도 나는 이것이 인간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중 중요한 한가지가 아닌가하고 그날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떠올린 종교의 이유란 바로 우리를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존재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라는 유한한 존재가 이 세상과 이 시대에 놓여진 더 큰 문맥을 찾아주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는 본능을 가진 존재이기에 혹은 문명인으로 살려면 그것이 꼭 필요하기에 인간은 종교인이 되거나 그와 비슷한 것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내가 지난 한달간 사색과 글쓰기라는 그 이전의 일상에서 벗어나 이사준비와 정착준비로 바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같은 시간을 즐겼고 매우 유익한 것으로 생각한다. 오랜만의 육체노동도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그것들도 나를 바쁘게 하고 반복이 되면서 나를 그런 일상에 파묻히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의 시야는 점점 더 작아져 갔던 것이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을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은 팔자좋은 사람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팔자가 좋으니 그렇게 살 수있지 우리에게는 그런 여유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 사람도 일이 다급해 지면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본인의 욕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눈앞의 이익에 울고 웃으면서 점점 더 거기에 몰입할 수록 우리는 여유를 잊게 된다. 스스로 여유를 포기한다. 너무 많은 것이 그럴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그만큼 여유는 없어진다. 팔자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착하고 집중하는 일상이란 대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을 계속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은 망가진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육체는 긴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몸을 더 강도높게 긴장상태로 만들어 운영한다. 호랑이가 쫒아오면 일단 살아야 한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감각신호도 영양섭취도 무시하고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늘상 그렇게 긴장상태로 살면 몸이나 정신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과열상태의 엔진을 꺼야 한다. 그것이 종교의 한가지 역할인 것이다. 그걸 종교로 부르건 부르지 않건 정신없이 흥분하고 몰입해서 살던 어느 순간 도대체 산다는 게 뭔가하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 그렇게 삶의 쉼표를 찍는 것이 종교의 이유가 아닐까. 

 

종교적 의식이 뭔가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종교적 의식이라는 것은 대개 메세지와 체험을 포함한다. 메세지란 바로 일상을 넘어서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좁쌀같이만 살아서는 안된다, 이 세상은 이런 곳이다라고 말해주는 메세지다. 체험이란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말한다. 절에서도 교회나 성당에서도 음악이나 리듬이 강조된다. 찬송가가 없다고 해서 절에서도 리듬감이 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염불도 리듬감으로 읽는 것이니까. 목탁소리와 염불소리속에서 그 안에든 메세지 이상으로 우리는 비일상적인 것을 느끼게 된다. 성스러워 보이는 그림에서도 그렇다. 그러면서 일상에 대한 지나친 집중의 스위치가 꺼지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하려고 한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면 종종 차분히 저금을 하기보다는 복권에 돈을 투자하는 일만 하는 것같이 된다. 대박만 노리는 것은 종종 저금하는 것보다 더 천천히 돈을 모이게 만들거나 신세를 망치게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천천히 움직이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비웃음을 날리거나 잘난체 하거나 그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라고 숭배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팔자 좋은 사람들로 우리가 따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말그대로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바쁜 일상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기 전에 조용한 곳에서 산책을 한다던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목욕을 한다던가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거나 글을 쓰거나 악기를 연주해 본다던가 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급할때 오히려 멈춰서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다. 늙은 스님의 할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라고 하는 신자의 고백은 멈추지 못한 정신을 겨우 추스린 사람의 고백일 것이다. 

 

종교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짐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다. 그러나 물론 이런 문맥에서는 과학이나 예술도 종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 의미를 잘 알고 행한다면 말이다. 또한 스스로를 종교인이라고 자부한다해도 마음의 평화와는 반대로 간다면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이 말하기를 삶이 괴로울 수록 우리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도록 빌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종교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 말의 의미는 그 괴로움으로 가득찬 일상을 초극해서 더 넓고 긴 문맥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우리의 괴로움이 사라지거나 괴로움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뜻일 것이다. 괴로움에 집착하여 복을 빌기만 하는 기도, 코앞의 일에 욕심만 키우는 기도는 오히려 반대효과만 낼뿐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때 생각한 것이 잊혀지기전에 글로 남긴다. 이 글도 따지자면 내가 올리는 기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바쁜 일상에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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