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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우리시대의 새로운 생각

5. 그래보이는 것과 그런 것의 사이에서 2

by 격암(강국진) 2016. 2. 20.

이런 분리와 무능이 극명하게 들어나게 되는 곳이 바로 과학과 인문학의 분열이다. 스노의 두 문화에 대한 강연이외에도 월슨의 통섭이라던가 브로노우스키의 인간을 묻는다, 퍼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등 수없이 많은 강연과 책들이 20세기 내내 이 문제를 지적하고 파고 들었다. 그들은 곧 과학이 인문학을 흡수 통합할 것이라고 말하거나 두개의 지식은 서로 다른 형태로 동등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어떤 일원론적인 철학으로 이 분열은 봉합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분열의 원천적 해법이 무엇인가를 제처두고라도 우리의 일상에서 보면 결국 지식의 기초가 점점 더 개인의 일상과 분리되어 멀어져 간다는 것이 그 문제의 시초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애초에 서구에서 낭만주의적 반항이 일어난 것도 이때문이었다. 과학이나 분석적인 지식과는 달리 예술과 인문학은 모두 인간에게 가까이 있다. 소위 순수문학이나 전위적 예술은 보통 사람들로 부터 지나치게 멀어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예술과 인문학 작품들은 보통 인간의 삶과 감정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과학이 더 깊이 원리적으로 파고들수록 과학은 점점 더 예술과 인문학에 대해 무지한 존재가 되어 간다.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어져 간다. 

 

몇백년전만 해도 인간의 지식은 훨씬 통합된 상태였다. 철학자와 수학자는 같은 사람이었다. 예술과 자기수양은 존경받을 만한 지식인이나 신사에게 당연히 기대되는 덕목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지식은 일상으로부터 분리되고 개인은 전체 인류의 지식 시스템에 대하여 왜소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많은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알지 못한다. 

 

우리는 도대체 왜 지적 탐구를 해야 할까? 그것은 개미가 개미집을 만들듯 그냥 본능일까? 지적 탐구의 이유는 일반적으로 말해 보다 좋은 삶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다만 여기서 보다 좋다는 것의 의미는 통상 실용적인 것이라고 말해지는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이제까지 지적한 현대의 지식 시스템의 현실을 보면 일상과 분리된 지적 탐구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 커진다. 우리는 과연 그런 지적탐구를 통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인간적 감정에 대해 무지해져 가기만 하는 거대 지식 시스템이 어떻게 그것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에 대해 무지한 경제학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런 고민때문일 것이다. 20세기에는 비합리적인 경제학이 출현하기도 했다. 노벨상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의 업적은 경제학에 인간의 가치평가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합리적이 아니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인간들이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그 평가가 시간에 대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의 한 직장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이 거기에 들어가기 전과 들어가고 난 이후에 다르기 때문에 가치평가는 자신의 현재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개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고 가정하는데 이때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백만원짜리 금화는 그걸 가지기 전이나 가지고 난 후나 백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애착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이 바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심리적으로 옳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학은 수정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가치는 객관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간은 그렇게 사고해서는 안된다고. 그러나 실재의 인간은 그렇게 한다. 그래서 현실 세계는 그렇게 움직인다. 

 

이쯤에서 우리는 출발점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그래 보이는 것과 그런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로서 우리는 그런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계몽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 그래 보이는 것이고 어느 쪽이 그런 것인지, 다시 말해 어느 쪽이 진리인지는 언제나 확실하지 않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만들면서 동시성에 대해 고민할 때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그것은 어떻게 그것을 측정하는가. 나에게 어떤 것이 동시로 보이는가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시간은 공간에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흘러간다라는 생각이 근거없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과학적 진리라는 것도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보게 되는가에 대한 고민속에서 찾아진다. 

 

보다 중요하게도 우리의 일상에서는 지금 우리에게 그래보이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나의 체험, 나의 느낌은 현실이다. 우리가 무한의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벗어날 때 우리는 오히려 현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현실과 중간단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계몽주의를 극한으로 추구하면서 벌어진 일은 바로 그 현실과 중간단계를 지나치게 많이 잃어버린 것이다. 학습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계속 그런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보이는 것의 소중함을 잃어버려서 지나치게 자기를 위태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 세계는 우리가 인식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 세계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가 하나 하나의 체험을 할 때마다 바뀌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잠을 푹 자거나 직장상사와 다툴뻔했는데 참았거나 혹은 참지않았거나 하는 것에 따라 세상은 바뀐다. 다만 사람들은 세계가 바뀐 것을 자기도 기억하지 못한다. 설사 다르다고 느껴도 그것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믿는데 익숙하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세계에 존재해 왔고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이따금 어떤 체험 이후에 세상이 전과는 다르다고 느낀다. 사랑에 빠졌다가 거기에서 풀려난 사람은 그것을 느낀다. 당신이 실직자가 되었다면 그전과는 세상이 많이 다르게 느껴진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원망과 실망이 가득했는데 탁트인 바다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한두시간 산책을 하고 났더니 세상이 전혀 달라보이더라는 체험은 흔한 것이다. 인문학책이건 수학책이건 책 한권을 몰입해서 읽고 나서, 아니 때로는 그저 한 편의 글을 읽고 나서 고개를 들 때 우리는 때로 위화감을 느낀다. 세계가 변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금방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전과 다를 리가 없다. 우리는 그저 가지지 못했던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일상과 환경의 소중함을 무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당신이 매일 강변을 산책하거나 말거나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둘러쌓여 있거나 말거나 이 세계는 그저 객관적이고 유일하게 존재한다. 당신의 방이 어떻게 정리정돈 되어 있거나 당신이 뭘 먹는가와 상관없이 이 세계는 그저 객관적이고 유일하게 존재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는게 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

 

객관성을 강조하니까 우리는 자신의 직접적 느낌을 무시하게 된다. 두 사람이 모두 어떤 책을 읽고 그 안의 지식을 외웠다면 그것으로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책이란 그저 세계의 작은 일부이며 그것은 우리가 가진 관점 혹은 문맥속에서 해석되고 파악된다. 결국 우리가 그 책을 읽으면서 뭘 느꼈는가가 중요하다. 특히 그것이 과학책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은 매우 제한된 의미만을 가진다.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라는 관점은 우리의 느낌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그 관점은 애초에 그걸 위해서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이 똑같은 문맥속에서 세계를 보도록 만들고 그 안에서 지식을 퍼뜨리겠다는 것이 계몽의 꿈이다. 

 

물질적으로던 정신적으로던 우리는 끊임없이 마모되고 붕괴되며 또한 재구성되고 있다. 물질적으로 말했을 때 우리는 먹고 마시고 우리몸의 세포는 죽어서 교체된다. 물질 혹은 세상은 우리를 관통해서 지나쳐 간다. 우리는 진공 속의 돌멩이 처럼 놓여진 그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마치 솥에 물을 넣고 끓일 때 생겨나는 대류세포처럼 소멸과 생성과정의 균형속에서 존재한다. 단순한 물질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과 개와 똥은 모두 같은 것들이며 별들의 찌거기일 뿐이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처럼 물질의 바다에 일어난 파도물결이지 물질 자체가 아니다. 

 

전통이 빨리 바뀌고 세상의 복잡성이 증가하는 오늘날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붕괴와 재구축의 과정속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있다. 한 명의 어부와 학자는 오직 정신적으로 자신이 어부나 학자라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혹은 그렇게 삶을 구축함으로써만 어부나 학자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게 된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살아지는게 아니라 어부나 학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런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삶의 일관성이 사라지면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기 쉽다. 생각이 없을 때 이런 저런 것이 관습처럼 보이고 자기를 경찰이라고 생각하는 범죄인, 자기를 여왕이라고 생각하는 가정부가 되기는 쉬운 일이다.  

 

이런 이야기들의 핵심에는 인식의 한계가 있다. 우리의 무지가 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서 우리의 기억력과 인식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집단으로서도 개인으로서도 그렇다. 특히 개인의 경우 그 인식과 기억의 한계는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밖에 없다. 제 아무리 추상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학자나 작가라고해도 그 사람도 자신의 일상이라는 현실을 살아야 한다. 그 사람에게도 친구와 가족이 필요하고 산책할 곳이 필요하고 따뜻한 스프가 필요하다. 물리학자라고 해도 일상생활을 할 때는 땅은 움직이지 않으며 탁자는 딱딱한 실체라는 상식에 의존해서 생활하고 적어도 대부분의 물리학도는 물리학에 기반해서 야구를 하지 않는다. 

 

새로운 생각이란 자기에 대한 존중이고 타인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계몽의 정신으로 충만했던 19세기 사람들에게 기술적으로 뒤져있던 식민지의 사람들은 부자나라 사람들에게 아둔하고 불행하며 공부를 하고 발전해서 자신과 똑같아 져야만 하는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으며, 그들의 계몽과 원조가 오히려 혼란과 비극만을 만들어 내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애초에 열등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생각이 바뀐다. 물질적으로 더 풍족한 나라가 더 행복한 나라도 아니며 어떤 나라가 어떤 나라를 일방적으로 계몽하겠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오만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것이다. 각자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선택대로 살아야 하고 자기의 호흡으로 변해야 한다. 여기서 저기로 간다고 꼭 더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니다. 부자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고 싶을 때는 종종 낡은 기술, 느린 기술이 더 도움이 된다. 가난한 나라에 비싼 기계를 쓰는 공장을 세우면 일자리가 없어지고 그 공장유지때문에 그 나라가 부자나라에 종속되는 결과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보이는 것과 그런 것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깊이만을 추구한 인류는 옆을 보는 것을 너무 오래 잊었다. 뼈에 살을 붙이고 사람들에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게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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