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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우리시대의 새로운 생각

5. 그래보이는 것과 그런 것의 사이에서 1

by 격암(강국진) 2016. 2. 20.

5. 그래보이는 것과 그런 것의 사이에서

 

예뻐 보이는 것과 진짜로 예쁜 것, 똑똑해 보이는 것과 진짜로 똑똑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것이 진짜 중요할까? 우리는 표면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이러저러해 보이는 것과 진짜로 이러저러한 것을 구분하는 습관이 있다. 이러한 습관은 지동설 같은 추상적 이론들이 더 진실이더라는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즉 혼란스러운 감각 자료의 너머에는 진실이 되는 원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지구는 우리 감각에 움직이는 것같지 않다. 태양은 하늘을 가로 질러 움직이는 것같다. 하지만 세계를 잘 살피면 우리는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혼란스럽고 주관적인 우리의 감각과 판단 너머에는 객관적이고 유일한 진리의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진리를 찾아내고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우리안에서 끓어오른다. 이것이 계몽주의 시대의 우리다. 

 

표면적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것과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의 차이는 검증가능성에서 나온다. 칼 포퍼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서 검증가능성을 강조했다. 과학이론이 아닌 것이 검증될 수 있는 과학이론인척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아무리 그럴듯해도 검증될 수 없는 것 다시말해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은 과학적인 주장이라고 말해져서는 안된다. 하지만 검증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누구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부터 검증을 시작할 수는 없다. 뭔가의 길이를 재려면 기준점이 필요하다. 이때문에 하나의 진리는 더 강력하고 기초적인 진리로 뒷받침되고 그것은 다시 더 기초적인 것으로 뒷받침되는 일이 반복된다. 

 

어떠한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있으며 이 공간에서 시간은 독립적으로 흐른다라고 누가 말했다고 하자. 많은 사람에게 이 사람은 지금 뭔가를 가정하고 있는 것같지 않다. 그것은 그냥 당연히 그런 것같다. 그러므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타나기 전에는 뉴튼 이론이 가정하는 이 절대공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서 그래 보이는 것이 그런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로서는 어떻게 검증할 까도 몰랐겠지만 검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인쉬타인에 이르르자 그것은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며 적어도 어떤 극한에서 옳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비슷한 예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아주 오랜동안 인간이 진리를 발견할 수있다는 예로 여겨져 왔으며 유일한 기하학으로 생각되어 졌다. 하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견됨에 따라 현실의 공간에서 삼각형을 만들었을 때 그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당연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내각의 합은 180도가 넘을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 인 것은 근사적으로 그런 것이다. 

 

통상 우리는 더 기초적이고 미시적인 원리를 통해 더 거시적인 세계를 설명해 낸다. 그리고 인간들은 여러가지 원리들, 법칙들, 지식들을 찾아낸다. 여러가지 추상적인 개념들을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해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단지 원칙 차원에서 이 세상의 것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주는 기초적 원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목성위에서 야구공을 던져본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도 야구공은 뉴튼의 법칙에 따라 날아갈거라고 믿을 강력한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과학자들이 가진 세상 속의 어떤 수수께끼 혹은 세상속의 어떤 현상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려진 그 원리에 기반하여 풀린다. 아무리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물론 언제나 우리의 수수께기 풀기 실력을 의심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던 그 원리를 확장하거나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이따금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 논리적 혹은 과학적 세계의 분석과 검증은 이렇게 한 층, 한 층 더 깊은 심층으로 세계의 깊은 곳을 파고 드는 활동이다. 이것이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기술한 과학 패러다임의 변화고 인간의 지식이 자라온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몽주의와 충돌한다. 

 

계몽주의는 최소한 두가지의 가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다른 사람에게 전파할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찾아낸다던가 그것을 전파해서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둘째로 그 진리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라는 것이다. 진리가 존재해도 그것이 너무나 엄청나고 이해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을 전파하는 것은 이성적인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불가능한 신을 전도하는 종교인이고 신비주의자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비록 이해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아주 소수의 천재들이 아니면 범접도 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형태라면 계몽주의는 매력을 잃는다. 실질적으로는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소수의 종교적 지도자를 가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전파할 진리가 단순하면 단순할 수록, 더 즉각적으로 이해가능한 것일 수록 계몽주의는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지 못하면 사람들은 차라리 종교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계몽주의의 이상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뉴튼 물리학이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도 많은 사물들이 있는데 우리에게 감각신호를 발생시키는 그 사물들의 너머에는 자연의 법칙이 존재했다. 더구나 그 자연의 법칙은 수학적으로 표현했을 때 이렇게 간단할 수가 있을까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다.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말도 안되게 복잡할 수도 있었다. 뉴튼 이래로 과학자들은 수학적 단순성을 가진 자연법칙의 존재를 종교적 신앙처럼 믿고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양자역학의 초기는 물론 21세기의 초끈 이론에 대한 이야기에도 이론의 수학적 단순성이 우리가 그것을 믿고 더 연구해야 할 이유로 제시된다. 

 

계몽의 시대에 우리는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가 세상일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리나 법칙은 소중한 것이며 그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개의 사건들보다 더 그렇게 느껴진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진짜 세계는 그 진리와 법칙의 세계인 것이며 우리가 보고 듣는 세계는 그것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계몽의 이데올로기가 가진 구조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귀결이기도 하다. 자동차를 파는 세일즈맨은 자동차의 효용에 대해 강조하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계몽은 진리를 전파하려는 것이니까 그 진리의 위대함을 찬양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계몽주의자의 꿈처럼 쉽지만은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파해야할 진리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전문가의 시대가 되버리자 이제 진리는 다시 많이 공부하신 분들의 손으로 돌아가버린 것같다. 어딘가 권위에 의존하는 종교 비슷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과학자만 그러는게 아니다. 어려운 철학을 전개한 철학자의 이름이나 두꺼운 고전을 인용하는 지식인들을 통해 계몽주의는 처음의 그 순수함을 잃었다. 이제는 최고의 지식인도 나는 문학을 모른다던가 나는 과학을 모른다고 고백해야 하는 전문화의 시대다. 

 

게다가 계몽주의는 인간의 오만만을 키워서 자신의 무지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 심층의 원리로 다가가기 위해 한층 한층 아래로 더 내려가려고 하는 가운데, 더 추상적인 이론을 개발하고 인간의 지식 체계를 키워가는 가운데, 그런 자신의 지식의 힘에 대해 과신하게 되었다. 일상을 잊었고 중간단계를 잊었다. 우리가 지식과 인식의 더 깊은 심층을 파고 드는 행위는 흥미로운 것이며 사물의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일지 모른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누적되면서 이렇게 깊게 파고 드는 행위 혹은 단순한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가 뒤에 남긴 것이 점점 더 큰 문제를 만들게 되었다. 

 

게르트 기거렌쳐는 생각이 직관에 묻다라는 책에서 공을 받는 야구선수에 대해 논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이론은 물체의 움직임을 분석할 때 뉴튼의 운동 방정식을 넘어서 양자역학의 쉬뢰딩거방정식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뜬 야구공이 나에게 날아 올 때 우리가 쉬뢰딩거 방정식을 풀어서 그 위치를 확인할까? 당연히 아니다. 심지어 뉴튼 방정식도 우리는 풀지 않는다. 그래서 코치는 선수에게 ‘타자가 공을 칠 때 그 공이 튀어 올라가는 방향과 운동량을 잘 살펴 그래서 궤적을 계산해 내고 그 공이 가는 장소로 뛰어가는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야구선수도 그렇게 계산을 할 생각도 없겠지만 사실 물리학자가 계산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거대한 슈퍼컴퓨터를 써도 그 공을 뉴튼 방정식을 써서 제대로 잡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면 그 공은 진공 속을 나르는 게 아니라 공기 안을 날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그 운동장에 존재하는 공기 분자들의 현재 상황을 모두 확인한 후에 그 공이 날아가면서 공기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가를 모두 방정식안에 넣어서 풀어야 한다. 이것을 뉴튼 방정식 수준에서 푼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슈퍼컴퓨터를 가진 물리학자도 어떤 종류의 단순화를 넣고 비현실적인 장비를 동원해서 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 되는 것이다.

 

게르트 기거렌처는 실제로 인간은 경험에 의해서 아주 간단한 법칙을 배운다고 지적한다. 허공에 뜬 공을 바라보는 방향과 지면이 이루는 각도가 일정하도록 위치를 계속 조절해 나가면 공은 자기에게 날아오게 되어 있다. 최고의 엄밀성을 유지하면서 공의 위치를 추적하려는 과학적 이론이 현실에서는 비참하게 실패한다는 것에 비하면 타자가 공을 쳤을 때 그것을 달려가 잡는 다는 일을 야구선수는 너무나 간단히 해낸다. 

 

이 이야기는 더 기초적인 수준에 존재하는 어떤 단순한 진리나 법칙을 안다는 이유때문에 우리가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과신하기 쉽다는 것을 말해준다. 법칙에 대한 논의만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세상을 다 아는 것같지만 그런 때 우리는 일상의 현실 혹은 중간단계를 잊어버린다. 

 

어떤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일상을 잊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 모든 사업자는 자본가가 되고 모든 직장인은 그저 노동자가 되는 식이다. 그들이 모두 부모 자식을 가진 사람들이고 모두 다른 성장배경과 다른 신체조건을 가졌다라던가 그들이 뭘 먹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성격이 어떻다 같은 것은 점점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주식가격을 예측하는 이론을 계속 듣고 있으면 그 주식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당신과 그리 다를 바 없이 머리가 좋으며 각자의 삶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게 된다. 심지어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같은 것은 점점 더 희미해 진다. 

 

한마디로 심층을 파고들려는 우리의 노력은 우리를 우리의 일상적 삶, 일상적 체험과 분리 시켰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개인적 체험이나 감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시적이고 기초적인 원리가  상위의 거시적 세계에 대한 설명을 준다는 믿음때문에 한층 한층  기초적인 곳으로 내려감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많은 지식을 가지는 동시에 조금씩  무능해  것이다우리의 사고는 우리의 일상과 멀어지고 점점  야구선수에게 와서 뉴튼 방정식들을 풀라고 조언하는 물리학자와 비슷해져 간다. DNA 염기서열을 알면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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