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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우리시대의 새로운 생각

4. 다원화 시대의 자기 찾기 1

by 격암(강국진) 2016. 2. 15.

4. 다원화 시대의 자기 찾기

 

우리는 누구인가? 계몽의 꿈의 시대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과학적 진리찾기와 비슷해 지기 쉽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마치 자연의 법칙들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밖에 없는 이 객관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나의 정체성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어딘가에 있는 비밀의 책이나 창고안에 혹은 은행계좌의 숫자나 책상위에 놓은 명패위에 나의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내가 설사 스스로가 왕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것을 몰라도 나의 혈통이 그러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식이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나 말고 전 세계가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사실상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라는 개념이다. 과학적으로는 하나밖에 없는 객관적 세계는 것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만 의미를 찾는 인간으로서는 그것은 그렇게 쉽게 삼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훨씬 더 자세하게 세상을 봐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세계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세계다. 그 세계란 이 방안을 의미하거나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을 의미하거나 천명쯤으로 이뤄진 사회를 의미하는 유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자들이 밝혀낸 우주공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세계다.

 

그런데 영원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영원의 시간에 비하면 호모사피엔스가 살아온 몇십만년도 그저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데 우리가 결혼을 했다던가, 취직을 했다던가, 한국에서 유명하다던가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도 계몽의 꿈에 따라 자기 정체성을 찾을 때 우리는 어떤 절대적인 것을 찾게 된다. 우리는 나는 부자다같이 변할 수 있고 상대적인 답을 찾는게 아니다. 자연의 법칙처럼 시공을 초월해서 옳고 변하지 않는 진짜 답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세계는 파악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란 여전히 제한되어져 있다. 우리는 기괴하고 소박한 고대인들의 우주론을 보고 때로는 웃게 된다. 거대한 코끼리나 거북이가 등장하기도 하는 그 우주들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개념의 한계를 몰랐다. 고대인들은 추운 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북쪽이라던가 태양이 뜨는 동쪽이라는 개념이 온 우주에서 통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달표면이나 태양 근처 같은 우주공간에서 북쪽이라는 개념은 소용없으며 지구의 회전축위에서 동쪽이라는 개념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동서남북의 방향은 지구의 표면에 사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이기 때문에 어떤 한계를 넘어가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는 어떤가. 우리는 고대인들의 소박한 우주론을 보고 비웃으면서 우리의 우주론을 종종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역사와 시간의 마지막에 도달했다고 믿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우리의 우주론도 고대의 우주론과 다를 리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가진 개념들도 유한한 의미만을 가졌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 역시 어떤 관점에서 보면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는 개미에 불과하며 다가올 미래에는 우리가 가진 세계에 대한 관념들은 비웃음의 대상일 것이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는 유한한 양만큼 세계를 파악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무한의 무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를 적어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우리의 무지를 제한하게 된다. 그럴 때 동서남북이라는 방향이 오직 지구표면이라는 제한 된 곳에서만 임시적으로 쓰는 개념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세계는 결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을 이용해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쉽게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무지란 종종 이런 것이다. 하나의 질문에 대해 세 개의 답이 가능하다. 진짜 답은 이들 중의 하나겠지만 나는 어느 것이 답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나의 무지라는 식이다. 그러나 진짜 큰 무지는 그 답의 후보들 내부에 있는게 아니라 그 답이 존재하는 세계가 품고 있는 암묵적 가정들에 있다. 그 가정들은 너무 당연해 보여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최근에 한 티비 드라마 속에서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쪽은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나머지 한쪽은 인간은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답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얼핏보면 답은 논리적으로 말했을 때 인간은 이렇다와 이렇지 않다는 두 개의 답중에 하나 일 수밖에 없는 것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런 질문은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란게 뭔지 알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익이 뭔지 모른다면 그것을 추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개도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개와 인간의 행동방식은 비슷한데도 있지만 크게 다르기도 하다. 뭐가 이익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부분의 개는 미래에 좋은 직장에서 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매일 매일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주장은 그 바탕에서 그 이익이라는게 뭔지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어떤 객관적이고 단일한 세계를 가정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세계를 가정하고 그 세계가 객관적이고 유일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세계에서는 어떤 질문에 대해 A나 B중의 하나만이 답이므로 우리는 둘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당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둘다 답이 아닌 것 같이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런 상황은 탈출구없는 감옥과 같다. 우리는 절망적으로 탈출구가 될 새로운 답을 찾는다. 그것이 이 세계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탈출구는 종종 그 세계에 숨겨져 있지 않다. 어떤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이 그 세계안에 있다는 스스로의 생각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

 

다원화 시대의 자기 찾기는 나를 보는 것이상으로 내가 어떤 세계에 있는가, 내가 어떤 환경속에 있는가를 봄으로서 행해진다. 프로야구리그의 존재를 당연시하면서 자신을 뛰어난 야구선수로 이해하는 것은 그 세계 즉 프로야구리그가 변화하는 것을 무시하게 만든다. 일단 세계를 변하지 않고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면 우리는 인간을 중요하지 않게 보게 된다. 인간은 세계를 선택하고 창조하고 만들어 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냥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객관적 세계를 지배하는 이치와 법칙이다. 

 

이러한 생각은 유교의 경전인 대학에 나오는 문구인 격물치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유교의 주요학파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따랐던 주자학이외에도 양명학이라는 것이 있다. 주자는 유교의 경전인 대학의 주석을 달면서 말하기를 격물치지란 사물의 이치를 궁극에 이르도록 탐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한 탐구를 해서 지식에 이른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이 세계, 이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에 대한 탐구가 알려준다. 알려져 있듯이 주자학은 엄격하고 객관적인 윤리를 강조해서 이를 따르던 조선시대에는 예법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사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정인보는 양명학 연론에서 이를 지적하면서 조선이 망한 것은 양명학을 배척하고 주자학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명나라의 왕수인에게서 시작된 양명학에서는 격물치지를 자기의 마음을 바로 잡거나 탐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먼저 지식을 달성하고 행동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주자학과는 달리 양명학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정인보는 진정한 실용주의자와 애국자는 양명학을 따랐던 선비들이라고 지적하고 주자학은 서구의 과학처럼 실용적 학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도 아니라서 조선을 망하게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인보의 지적은 계몽의 꿈에 대한 문명적 비판의 일부로 사용되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론 대개 주자학을 공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정인보가 지적한 주자학의 해악에서 우리 사회는 자유로울까? 조선의 주자학을 비판하는 현대의 지식인도 문제는 지식이 틀렸던 것에 있다고만 생각한다면 그는 현대의 주자학자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계몽의 꿈은 객관적 세계안의 진리, 따라서 모두에게 전파되어야 하고 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면서 거꾸로 인간을 단일한 세계안에 가두기도 했다. 그럴 때 이제 답은 유일하고 확실하게 보인다. 이데올로기의 맹신자처럼 어차피 세계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으므로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그 미래로 빨리 가는 것이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약육강식의 세계라면 빨리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쪽이 옳고, 세상이 공산혁명을 미래로 가지고 있다면 빨리 공산국가를 완성하는 쪽이 옳으며 부동산 시장의 정의가 뭔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독재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세상을 바꾸는 쪽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사실 세계는 유일하지 않고 변한다. 싸움과 욕심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 부모나 형제나 친구와 싸웠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중에는 시간이 지나 그때의 기록들을 보면 어리둥절해지는 경우를 만난다. 일기같은 것에 써있는 스스로의 생각이 잘 이해가 안되고 뭘 그런 사소한 것때문에 섭섭해 하고 분노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는 하나인 것같지만 그 어린 아이가 인지한 좁은 세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다. 예를 들어 잘생겼나 못생겼나만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세계에 사는 사람에게는 외모에 대한 문제가 절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이고 미의 기준도 여러가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자신이 다른 측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외모의 문제에 대해 덜 신경쓰게 된다. 대개 세계가 달라지고 커지면 싸움은 덜 절박해 진다. 

 

어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른도 세계에 대한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이해에 도달한게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분노와 기쁨의 이유는 과거에도 지금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꼭 하나 이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마도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세계는 우리가   없는 것인데 우리는 은근슬쩍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 바꿔치기 한다그리고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세계안의 것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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