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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우리시대의 새로운 생각

2. 인간의 크기 2

by 격암(강국진) 2016. 2. 1.

마을만들기에 대한 검토를 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과학기술 발전의 논리에 대한 비판에서 말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어떤 것을 발견한다. 몇몇 사람들은 점점 더 대규모화되어가는 어떤 토목공사같은 것을 하는 것을 진취적인 행위라고 단언한다. 있는 집들을 싹 밀어버리고 새 집을 짓는 재건축이 바로 개발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런 투자에는 실패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계속 해서 투자하다보면 큰 이익이 나서 이제까지의 모든 실패를 다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는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꼭해야하고 성공하면 많은 도움이 될 투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투자의 규모는 점점 커지기만 하고 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국가의 재정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이제 어떤 공사가 벌어지면 그 공사가 유사이래 최대의 공사라는 말을 듣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다. 4대강 공사같이 거대한 공사는 한번 하면 되돌릴 수 없을 정도의 재정적 환경적 변화를 일으킨다. 성공한다면 얼마나 좋을지는 둘째치고 조금만 더 규모를 키우면 실패의 댓가는 한반도에서의 삶 그 자체가 될 판이다. 이건 너무 엄청난 도박이다. 그런데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같지 않은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은 금리를 0으로 만들고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양의 돈을 풀어왔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세계 각국 사이에서는 자유무역 협상이 진행되어 더 넓은 지역이 더 큰 단일 시장으로 통합되는 흐름은 계속 되었다. 지금 세계는 과연 미국 연방준비위원회가 다시 금리를 인상할 것인가, 올리면 얼마나 올릴 것인가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 그 여파가 너무 커서 세계 경제가 다시 어디로 굴러갈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금리를 무조건 안올리기만 하면 문제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한 인간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의 흐름에 대한 결정을 던지는 그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의 사람들은 과연 뭘 알고 있을까? 길을 걷다보면 우리는 이따금 개미같은 벌레를 밟아죽이게 된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우리가 그렇게 한 것도 모르지만 그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매 걸음 걸음을 신경쓰면서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시스템의 규모가 한없이 커지면 연방준비위원회같은 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개인이 아니라 아예 작은 나라나 작은 지방같은 것이 개미로 보이게 된다. 나는 연방준비위원화의 미국인들이 매우 지적이며 매우 선량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심지어 그들이 미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고 까지 믿어 준다고 하자. 하지만 그런 가정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세계의 개미 하나 하나를 다 신경 쓸 만큼의 에너지와 지식을 갖췄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그 개미들에게 불행한 일이 생겨도 그런 거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가항력적인 일로 생각 될 것이다. 하지만 깔려 죽는 개미에 해당하는 개인이나 지역이나 국가들도 그 사건들을 그렇게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이런 모든 예들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크기나 규모를 엄청나게 초월하여 너무나 거대해진 시스템이 만드는 문제들이다. 그 시스템은 너무 거대해졌기 때문에 인간에게 봉사하는데 있어서 무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더구나 설사 99%의 인간에게 좋아도 1%의 인간에게는 회복과 보상이 불가능한 피해를 준다면 우리는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다. 99명을 위해서 한명을 죽이는 것은 윤리적으로 올바른가? 특히 그 한명의 동의도 없이 말이다. 때로 시스템의 피해자들에 대해 그들도 위험을 알고 있었고 동의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길고 긴 인터넷이나 전화 서비스 가입 계약서도 다 읽기 힘든 시대에 작은 개미들이 안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가? 그들이 정말 그들이 처한 위험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었을 때 그 시스템이 우리에게 더 많은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많은 경우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스템의 예민한 조종사가 필요하다. 그런 것이 없어도 인간의 인위적인 조정과 합의가 필요없이 저절로 위험을 피해가면서 움직이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 즉 이상적 자유시장의 꿈은 착각이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시장 경제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틀린 신화라고 논증한다. 시스템은 언제나 인간의 개입을 요구한다. 즉 아무리 거대한 기계라고 해도 그것에는 언제나 인간의 조정과 가치판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정책이 있고 노동자 파업에 대한 법규가 있다. 그런데 어떤 시스템이 한 인간이 이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 버리면 우리는 뭘 기준으로 시스템에 수정을 가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 거대한 시스템이 완전히 망하게 되면 그 손실이 감당가능한 것일까? 인간의 반응속력으로 운전할 수 없는 자동차를 가지고 도로로 운전을 나간다면 그것은 자살이나 살인행위가 아닌가?

 

물론 우리는 더더욱 거대한 데이터를 수집해서 인공지능을 갖춘 시스템이 일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판단을 기계에게 넘길 수 있는지에 대해 합의가 없다. 누군가는 그런 시대를 인간이 기계속에서 사육되는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따위 없어도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도 던질 수 있다. 더 많은 풍요는 왜 필요한가. 그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 많은 풍요가 있어야 인간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믿는가. 설사 총량규모에서 더 풍요로워져도 부자만 더 부자가 될 뿐 극빈층은 오히려 빠르게 증가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뭘 위한 풍요이고 뭘 위한 양적 성장이고 뭘 위한 효율화인가.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경제학은 결국 경제학의 전제가 되는 메타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가치의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면 그런 토대에서 자라나온 경제학이 만드는 거대 시스템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몬산토라는 거대한 종자회사가 있다. 이 종자회사의 문제는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것과 살아있는 생명에 지적재산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회사는 더 큰 수익을 추구한다. 결국 사람들은 이 종자 회사의 종자를 사야만 농사를 지을 수가 있고 그렇게 산 종자에서 씨를 받아서 다시 뿌릴 권리도 없어진다. 이 종자회사는 유전자가 조작된 우수한 종자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보상 받아야 종자개량에 있어서 진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온 세상에서 같은 종자만 쓰게 되고 농사짓는 농작물의 종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미래의 위험도 커질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새로운 종자를 백년 이백년동안 실험하고 나서 판매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의 의미를 잘 모른다.  

 

우수한 종자라던가 편리한 환경은 뭘 말하는 것일까. 자기 집앞의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는 것은 반드시 경제적인 계산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즐거움을 얻는다던가 정서적 안정을 위해 혹은 그저 자기가 직접 기른 것이니까 더 믿을 수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대기업이 만들어 낸 소위 편리하고 생산적인 환경은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 그것을 서로 나누는 일도 금지 시킬 수 있다. 생명에 지적재산권을 붙였기 때문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술을 생각해 보라. 지금도 집에서 술을 만들어 이웃에 판매하면 법의 규제를 받는다. 그러니까 농작물에 대한 비슷한 법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은 그들의 수익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는 개미들의 사소한 문제들은 관심이 없다. 언젠가 달이나 태양에도 지적재산권이 붙는다면 우린 달을 쳐다볼때마다 돈을 내야할 지도 모른다. 

 

끝없는 보편과 객관을 지향하는 계몽의 꿈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뭔가를 배움으로서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 이상의 존재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모두가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시스템이 성장하면 문제가 생긴다. 지식은 인간을 오히려 더 어리석게 만들고 집단적 결정은 더더욱 어리석어 질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안간힘을 다해 만들어 지고 유지되는 세계는 인간에게 불편한 세계,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세계다. 더 많은 것, 더 크고 빠른 것이 진보라는 생각은 인간에 대한 생각없이는 진실이 아닐 수가 있다. 누군가에게 자명하고 정의로운 국가는 반드시 다수가 행복한 나라는 아닐 수 있다.

 

계몽의 꿈이 만들어 낸 위대한 바벨탑들은 진리의 수호자내지는 진리의 생산자들을 가지고 있다. 대학과 연구소가 그렇고 관료조직이 그렇고 정치인들이 그렇다. 그리고 다른 우매한 보통사람들은 이들을 부양해야 한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도우면서 단순한 삶을 살고 싶다. 그들은 누가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일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금을 내서 착취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누군가를 선출할 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잘 뽑는다고 하더라도 선출된 그 사람이 이 거대한 시스템속에서 그를 뽑아준 사람 한명 한명의 일을 자기일처럼 생각해 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관료조직은 복잡해져 있다. 그런 관료조직이 모든 자원을 소모해 버리는 가운데 거기에 착취당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세월호 침몰사건같은 것에 충격을 받는다. 단순히 많은 어린 학생들이 제대로 구조되지 못하고 해양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만이 이유가 아니다. 만약 전혀 예측 불가능한 이유로 갑작스런 지진이 일어나서 같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충격을 덜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면서 나는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모르는 것이 많지만 나말고 누군가는, 특히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정부의 누군가는 주어진 문제에 대한 진실을 알고, 합리적으로 대처할 것을 기대한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이유는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고 책임을 질만한 사람들은 누구나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시스템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 

 

똑같은 말을 우리는 세계적으로 경제적 충격을 준 미국의 회계부정사건인 엔론사건 같은 것에 할 수가 있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중심적인 이유는 그토록이나 거대한 부정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때문에 전체 시스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공포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공짜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한다. 세금을 내는 것은 그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법률서비스, 상하수도 서비스, 의료서비스, 통신서비스, 교육서비스등 모든 거대 시스템은 개인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차원에서 돈계산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스템이 무능할 때 사법제도가 불공평한 것같고 의료서비스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경찰은 시민을 보호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협박하는 것같을 때 그것은 착취가 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상인들에게 돈을 빼앗으면서 그것을 보호비라고 부르는 조직폭력배의 행위처럼 된다. 누가 누구로부터 뭘 보호를 한다는 것인가.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지도한다는 말인가. 작은 조직을 모색하게 되거나 새로운 생각에 기대고 싶어하게 되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것을 버리고 작은 것으로 가자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현실적 행동강령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새로운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계몽의 꿈도 단순히 더 큰 것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다. 계몽의 꿈은 말한다. 우리는 진리를 찾을 수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알 수있다. 그 결과로 시스템이 커진 것이고, 그런 가정에 기초해서 시스템이 커진 것이다. 계몽의 꿈은 단순히 시스템을 키우자같은 말이 아니라 더 기초적이고 더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는 오류가 없는 올바른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물론 계몽주의의 성과, 과학발전의 성과가 우리의 자신감을 더 키웠다. 

 

계몽의 꿈과 다른 새로운 생각이 무엇인가가 분명해 진다고 해도 그 둘의 관계가 반드시 서로 부정하는 것이 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뉴튼역학과 상대성이론, 뉴튼역학과 양자역학의 관계와 같은 것이 아닐까? 뉴튼의 이론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러나 뉴튼의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옳다. 다만 모든 것들처럼 그것은 무한한 범위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에서만 옳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극한에 이르면 틀린 것이 되고 그때문에 이 세상에는 뉴튼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이 존재하게 된다. 

 

계몽의 꿈은 앞으로도 옳은 것으로 남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고 그런 시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새로운 생각은 우리에게 겸손해 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생각은 우리에게 인간의 크기를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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