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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우리시대의 새로운 생각

1. 불안의 시대

by 격암(강국진) 2016. 1. 29.

우리 시대의 새로운 생각

 

1. 불안의 시대

 

지금 당신은 불안한가?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다. 그 불안의 내용은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당신이 불안하듯이 나도 불안하다. 불안이란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결과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요즘 시대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현대의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 하면서 살기 쉽다. 

 

우선 우리가 불안한 이유중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먼저 생각해 보자.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인간의 본성때문이다. 인간은 호기심을 가지고 매사에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이유만 충분하다면 사람은 자기 목숨을 던져 버리는 일이나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는 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를 때 때로는 새치기를 당했다던가 누군가가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정도의 사소한 것도 참지 못한다. 우리는 매사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고 느낀다. 어느 날 이웃집 철이엄마가 나를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면 이유를 알고 싶다. 때로 그 이유를 모르면 미칠 것같다. 우리는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을 보면 그걸 그냥 넘길 수가 없다. 그걸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끄집어 내서 만지작 거린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사는 것은 바로 인간의 이런 특징때문이다. 

 

인간은 이유를 위해 산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살고 싶다. 삶의 의미를 알고 싶다. 자기 자신과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서 하나의 그럴 듯한 체계를 이루기를 원한다. 자신의 생각이 딛고 설 바닥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의 일들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서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내가 직장에서 해고당한다면 그것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불구하고 인간은 이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다. 세상은 너무 크고 너무 복잡한데 우리는 적어도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이유를 모른다. 몇몇 사람들이 아는 척 할 뿐이다. 물론 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얼마간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걸로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는 없다. 충분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오히려 세상에 대해 알면 알 수록 더 불안해 지기도 한다. 인간은 잘 모르는 곳에 던져진 존재다. 누구나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던져지면 불안하다. 얼떨떨해서 바보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가 부모에게 각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 근원적 불안 때문일 것이다. 부모는 나라는 존재가 탄생한 원인이며 근원적 불안을 최초의 단계에서 견딜만한 수준까지 내려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가 어딜까,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일까하고 무서워 하는 아이에게 웃는 얼굴과 따뜻한 손길과 먹을 것을 제공하는 최초의 존재가 부모다. 우리는 부모는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어릴 때에는 아이는 부모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부모는 사랑때문에 아이를 지켜 줄거라고 믿는다. 약하고 아는 것없는 아이가 불안 때문에 미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부모가 주변에서 보이질 않아 불안해 하고 우는 경험은 모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그 체험과 지식은 우리가 힘들고 불안할 때마다 부모를 그리워 하게 만든다. 

 

우리의 불안은 시대의 영향도 크다. 인류 전체로 보았을 때 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는 있지만 낡은 생각이 그 한계를 들어 내기 시작한지 이미 한참 되었다. 돌아보면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구에서 살아온 이래로 지금처럼 자신이 진화한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사는 때도 없었다. 인간은 지구를 개조했고 지구를 채웠다. 지금처럼 지구가 좁아진 적이 없었다. 이제 새롭게 개척할 신대륙은 없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진부해졌고 영원한 성장의 약속은 점점 더 허무맹랑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환경변화의 진폭도 너무 크다. 예를 들어 원시인이 길을 걷다가 거대한 죽은 공룡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운의 사건은 당연하 아주 드문 일이다. 신문이나 라디오가 없었던 시대에는 그런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났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에 대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온갖 종류의 극단적 성공과 실패를 직접 경험하거나 그에 대해 들으면서 산다. 예를 들어 정부의 올해 재정적자가 50조니 100조니 하는 말을 들으면서 산다. 지난 정부가 해외자원개발에 투자해서 손실본 돈이 50조니 100조니 하는 말을 듣는다. 그 숫자들은 압도적인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실감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에베레스트산처럼 큰 공룡이야기를 듣는 것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숫자들을 듣고 투표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걸 결재도 한다.

 

이런 현대 사회의 특징때문에 현대인들은 한발 한발이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긴장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번의 실수가 줄 수 있는 피해가 너무 엄청나다. 언제나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 사람이 이렇게 지속적인 유혹과 공포속에서 살아가는 이런 시대에 불안증이 생기지 않는 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동물로서의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상은 점점 더 큰 규모로 변하고 흔들리고 있다. 

 

요즘에는 세상이 지나치게 빠르게 변해서 부모와  자식은 대화하기가 힘들다. 자라난 환경이 이미 상당히 다르다. 부모는 종종 그저 돈을 낼 뿐인데 그나마도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전문가라는 사람이 이러니 저러니 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일뿐 과연 아이를 이러저러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야할 세상이 과거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젊은이는 과연 기성세대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불안하다. 왠지 그들은 자신과 너무 달라보이고 그들의 말은 진부하다. 그런 삶은 보람도 재미도 성취도 없을 것같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부모도 사는게 불안하고 자식도 사는게 불안하다. 그리고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아이들은 커서 부모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옆집 사람도 직장 사람도 학교동창 친구도 점점 대화하기가 힘들어진다. 우리는 정말 그들에 대해 알고 있을까? 한 때는 그렇다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바뀌었고 세상이 바뀌었다. 그들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이 뭘 관심을 가지는 지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같은 데 당연하지 않다. 그 결과가 대화가 힘들어지는 것이고 때로는 대화가 완전히 중단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같은 박자로 춤을 추고 있지 않으므로 같이 춤추기는 자꾸 파탄을 일으키고 어색한 침묵을 만들어 낸다. 때로는 그것이 언성을 높이는 싸움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점점 군중속의 외로움을 느낀다.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열린 곳에 있는데도 폐쇄공포증이 느껴질 것같다. 기회와 연결이 하나 둘씩 닫히고 있다. 

 

물론 우리는 어느정도까지는 애써서 이런 불안을 지워버릴 수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우리의 호기심을 억누르는 것이다. 질문하지 마라. 호기심을 가지지 마라. 이렇게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떤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변하고 만다. 사람이 부속품처럼 움직여주기를 기대하는 거대한 조직은 그런 변화를 권장하기도 한다. 

 

호기심을 억누르는 것이 반드시 나쁜 조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과론에 너무 중독되어 있다.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너무 생각하다보니 자기를 소모해 버리고 필요없는 분란을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불안증과 우울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늘상 그렇게 한다. 모든 말이 그렇듯이 올바른 문맥에서는 이런 조언도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빨리 변할 때 질문하지 말고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는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무모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변화를 무시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먹고 살 돈이 있는 사람이 어디 빈방에 가서 그걸로 먹고 살면서 조용히 늙어간다면 모를까 이 세상과 소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런 태도를 가졌다가는 어느 순간 순식간에 망하기 쉬울 것이다. 그 사람이 무시하고 있는 변화가 누적되어서 어느 순간 조선시대쯤에서 갑자기 현대로 날아온 꼴이 되면 당연히 위험하지 않겠는가. 어느 직장에 완전히 적응했는데 정년퇴임할 때까지 근무하기는 커녕 40살도 되기 전에 회사의 바깥으로 나와버린다면 그 사람은 조선시대에서 날아온 사람같이 행동하기 쉽다. 바깥세상은 무섭기만 하다. 질문하지 말라는 목소리에 너무 순응하는 것은 결국 위험하다. 

 

불안을 지우는 목소리에는 이런 것도 있다. 사람이 불안한 건 언제나 그랬다. 50년전에도 100년전에도 심지어 천년전에도 불안해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인간은 아직도 살아있고 심지어 예전보다 더 잘 살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요즘 젊은이들은 문제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니 걱정은 쓸데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매일을 열심히 살면된다. 더구나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고 해도 그 변화가 언제나 재앙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혁명적 변화의 코앞에 있다. 복권당첨 바로 앞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우리는 얼마가지 않아 천국같은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불안해 하지 말아야 한다. 계속 전진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소심해져서는 안된다. 기괴한 미래를 상상하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같은 목소리들은 우리의 불안을 재우는 자장가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던진 답을 서둘러 답으로 인정해 버리고 이런 자장가에 귀를 귀울이면서 우리의 정신을 잠재운다. 그래야 불안하지가 않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다 괜찮을 것이다. 걱정은 부질없는 짓이다. 세상은 원래 이렇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것은 정말 소심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도처에 있다. 2016년현재로부터 30년쯤 전의 한국에서는 맹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웃기는 농담중에서도 농담이었다. 그건 지금 세상에서는 이런 말과 비슷했다. 앞으로 올 미래에는 "막내야 공기떨어졌다. 슈퍼에 가서 공기 10리터만 사오렴" 하고 심부름을 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게 허무맹랑하게 들려서 웃는다. 맹물을 사먹는다는 말도 불과 30년전에는 이렇게 들리는 말이었는데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은 변했다. 당신이 만약 일본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능 물질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 대지진으로 파괴된 원자력발전소는 앞으로 수만년간 방사능을 뿜어낼 방사능물질을 통제할 수 없이 유출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표를 흐르는 강물을 정수해서 만든 수도물에 대해 걱정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일본 대지진 때 일본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에 생수 품귀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에도 일본을 떠나는 그때까지 나는 계속 생수를 사먹지 않을 수 없었다. 생수는 그나마 외국에서 온 물이거나 지표가 아니라 방사능이 아직 닿지 않은 깊은 지하에서 온 물이기 때문이다. 

 

공기를 사먹는다는 것은 정말 농담인가? 얼마전에는 공기오염이 심한 중국에서 맑은 공기를 판매했는데 아주 인기가 좋았다는 말을 들었다. 캐나다나 히말라야 지방의 맑은 공기를 담아서 중국인들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공기를 판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또 이런 기사가 내 눈을 끌었다. 2050년이 되면 무게로 따졌을 때 바다에 물고기보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이 더 많아질거라는 예측이다. 플라스틱은 썩지 않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플라스틱을 삼키고 인간은 그런 물고기를 먹어야 할 판이다. 기괴한 미래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경제를 보라. 우리는 아주 기괴한 세상을 살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 한국등 여러나라는 아주 엄청난 빚을 가지고 있다. 그 빚이 너무나 커서 국민의 세금의 상당부분이 그걸 갚는데 쓰는게 아니라 단지 그 이자를 내는데에만 쓰이고 있으며 빚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그것도 초스피드로! 국민들의 노후를 위해서라면서 연금을 모았지만 그것을 다 써버린다. 연금이 고갈되면 후세의 사람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서 노년층을 먹여살려야 한다. 더 많은 빚도 내야 한다. 

 

사람들은 애써 돈이란 실질적인 것이며 무의미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걸 믿으려고 하지만 국가가 허공에서 돈을 만들어 뿌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래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치울 수 없는 만큼의 눈이 자기 집의 지붕에 쌓여있고 그걸 치우기는 커녕 엄청나게 빠르게 그 눈이 늘어만 가는데 집이 무너질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소심한 사람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일까? 

 

우리는 과학기술의 기적적인 발전이 우리를 구원해 주리라는 주장을 듣는다. 상온핵융합처럼 마술의 기술이 나타나서 인류를 구원해 줄거라던가 줄기세포나 3D 프린팅, 전기자동차 같은 새로운 분야의 발전이 거대한 산업으로 자라나서 세계 경제를 구원하게 될거라는 말들이다. 지금은 좀 경기가 안좋지만 IT붐 같은게 또 일어나서 경기가 좋아질거라는 전망이다. 머지않아 더 많은 수의 드론과 무인자동차 그리고 더 뛰어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다. 

 

이런 미래는 단기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본질적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불안도 해결되지 않는다. 요즘 인간들이 말하는 기술의 규모와 강력함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마치 아주 허약한 지구 모형을 철없는 아이가 들고 노는 상황을 보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원자폭탄이 잘 보여주듯이 기술이란 분명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우리가 빠져있는 기술적 과학적 발전의 논리는 대개 발전을 위해서는 실패해도 계속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는 더 큰 성공을 위해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댓가다. 실패없이  얻어지는 기술적 발전은 없다. 발전을 위한 노력은 존경할 만한 것이며 우리는 기꺼이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정말 흠없이 올바른 것일까? 그것이 계속해서 존경할 만한 삶의 태도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 지불해야 하는 댓가가 인류의 존재 그 자체라면 어떻게 되는가. 

 

시장터에서 도박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하는 도박은 승리할 확률이 실패할 확률보다 더 크다. 그러니까 여러번 도박을 하면 평균적으로 꾸준히 돈을 따게 된다는 것이다. 재산은 계속 불어난다. 이렇다고 해도 과연 이 도박은 무조건 해야만 하는 도박일까? 그렇지 않다. 만약 그 도박이 한번에 가진 돈을 모두 잃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돈이 모두 떨어지면 도박을 더 이상 못하게 된다. 이래서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은 카지노에 가면 결국 빈털털리로 나오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돈을 따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결국 빈털털리가 되어 더 도박을 할 수 없을 때까지 도박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기술적 과학적 발전의 논리는 이 도박꾼의 이야기와 매우 닮아 있다. 인간은 기술발전을 통해 엄청난 꿈을 이룰 지도 모른다. 물론 실패해서 지구가 파괴되는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화성에 이주해서 살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지만 심지어 그런 일이 있어도 계속 번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의 실패가 인류멸종이나 1억명의 죽음같은 것을 의미하는 거라면 그런 것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발전에 대한 댓가’일까? 현실을 보면 실은 과학기술의 발전은 1970년대 이래로는 오히려 느려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20세기는 자동차와 티비와 컴퓨터가 보편화되고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발표되고 핵무기가 개발된 시기였다. 지금은 어떤가?

 

다만 기술적 발전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시행착오의 위험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증대했다. 우리는 이미 과학실험에 대해 말할 때 인류의 멸종이 아니라 우주의 파괴를 거론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블랙홀을 인위적으로 지구표면위에서 만들겠다는 실험에 공포에 빠지는 사람들이 나온다. 터미네이터 같은 공상과학 영화의 작가가 아니라 스티븐 호킹같은 과학자가 인공지능의 위험을 경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30년 뒤에는 어떤가. 정말 걱정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까? 

 

이런 것들은 우리가 불안해 하게 되는 이유의 겉표면을 약간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미 어느 정도 진부할 정도다. 지금 당장 지난 1년간의 신문을 펴면 우리는 기축통화의 붕괴니, 유럽연합의 위기니 식량위기, 기후위기, 점증하는 테러등 여러가지 문제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들을 우리가 불안해 하는 이유의 목록에 첨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목록은 아무리 길어도 그냥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그것으로는 우리는 우울증에 걸리도록 걱정을 하던가 아니면 모든 게 괜찮다는 근거없는 낙관론으로 귀를 막아버리는 일밖에는 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낡은 생각이 자기 자신 이외에 대안은 없다고 막아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자세한 관찰을 통해서 낡은 생각이 뭔지, 새로운 생각이 뭔지를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진이 조작된 것인가 아닌가를 깨달으려면 우리는 참을 성이 필요하다. 대충보면 다 당연해 보일 뿐이다. 일단 우리는 어떤 위화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증거를 본다. 그 사진속에 나오는 거울 속의 모습이 불가능한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불안이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런 위화감이다. 이 세상에서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걸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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