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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우리시대의 새로운 생각

7.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1

by 격암(강국진) 2016. 2. 26.

7.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우리 시대에 인간은 불안하다. 그리고 적어도 한동안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이다. 세상은 어떤 곳인지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미래가 어떤 곳인지를 예측하는 일도 더 힘들어 진다. 이런 것은 다만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의 교육이나 본인의 진로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미래에 대해 알 수 없어지는 만큼 우리가 치뤄야 할 댓가는 더 커진다. 국가적 규모나 지방자치의 규모에서 어떤 정책을 실시하는데 예측이 비참하게 틀리다면 치뤄야 할 댓가는 너무 엄청나고 그것은 다시 세금의 형태로 개인들에게 돌아온다. 이 세계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일 수록 노인들은 더 많은 노후 자금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교육비와 보험비와 상담료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을 돈을 써서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거나 가능한 미래가 아주 여러가지니까 그 모든 미래에 대해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우리의 미래를 예측 할 수 없는 지에 대해 완전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불안이 증가하는 한가지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차원의 저주다. 차원의 저주란 어떤 것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독립변수의 수가 증가할 때 그에 따라 가능한 경우의 수가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동전 한개를 던진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올 수 있는 결과는 앞면과 뒷면 둘중의 하나다. 그런데 서로 다른 동전 3개를 던지면 나올 수 있는 결과는 8개이며 서로 다른 동전 10개를 던지면 나올 수 있는 결과가 1024개가 된다. 동전 하나가 더 추가 될 때마다 나올 수 있는 결과는 2배로 늘어난다. 그래서 동전이 10개 더 늘어나면 가능한 경우의 수는 1024배나 늘어나게 된다. 게다가 이 것은 동전이 가지는 경우가 앞 뒤 두가지 뿐이기 때문에 그렇다. 주사위의 경우는10개가 더 늘어난다면 가능한 경우의 수는 60466176배 다시말해 6천만배가 늘어나게 되는데 하나의 차원이 단지 2개의 가능한 경우만을 가진다는 것도 실은 아주 단순한 경우에 속하니 차원의 저주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가능한 경우의 수는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세상을 이해하기 어려워 지고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는 이 세상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몇개의 독립변수가 작동하는가의 문제때문이다. 무인도에서 펼쳐지는 한 드라마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떤 무인도에 단 한명의 인간을 집어 넣고 그 사람의 삶을 관찰한다면 우리는 그 한 사람의 행동을 여러번 관찰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 사람의 매일 매일을 보고 그 사람의 평균적 하루를 이해하는 식이다. 과학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양을 여러번 측정하여 그 평균값으로 그 양을 추정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제 한명의 인간을 더 집어 넣는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는 것에는 두 사람의 상호작용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이 싸웠다던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던가 하고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을 볼 때보다는 좀 더 많은 관찰이 있고 나서야 그 두사람으로 이뤄진 사회를 잘 이해했다고 느끼게 된다. 경우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더 많은 관찰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을 한명 더 집어넣고 또 한명 더 집어넣어보자. 사람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이 무인도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훨씬 더 많은 관찰 즉 훨씬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차원의 저주는 시작된다. 사람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 이제 똑같은 자료를 두고 다른 해석이 나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너무 많아서 아주 많은 자료를 가지고도 어떤 이유로 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가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료가 부족한 것이다. 

 

인간의 인지적 착각도 문제다. 인간의 뇌가 몇개의 독립변수를 다룰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의 답은  고려하는 경우마다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7개 정도의 숫자까지만 잘 기억한다. 그래서 전화번호가 끝없이 늘어날 수 없고 누군가에게 숫자를 불러줄 때 숫자를 끊어서 불러줘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한번에 열개씩 번호를 불러주면 그 사람은 그걸 외울 수가 없다. 우리는 좌파와 우파라던가 사회적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따위의 분류에 익숙하다. 이렇게 2개나 3개등 대개 5개 미만의 숫자로 세상일들을 분류하는 것은 세상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 12개나 25개의 분류를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는 250명 정도의 규모에서만 친밀도를 유지하고 그 인원수를 넘어가면 갑자기 친밀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그 이상 규모에서는 친밀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것도 인간의 기억력과 인지능력의 문제일 것이다. 인간의 뇌는 21세기 사회에서 살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작 몇천년만에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인간이 원래 살던 세상은 주변에 훨씬 작은 수의 사람들이 있고 환경이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변하던 곳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뇌가 가진 능력에 한계가 있고 그것이 인식의 왜곡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하다. 즉 실제로는 더 복잡한 세상을 봐도 거기에 이해가능한 단순한 이야기를 자꾸 덧붙이려고 한다. 

 

예를 들어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를 생각해 보자. 그 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매우 제한된 숫자다. 중국이나 미국의 어느 시대 혹은 조선이나 한국의 어느 시대를 그리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마치 소수의 사람들이 그 시대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결국 이 사람이 이런 저런 야망을 가졌기 때문에 혹은 저 사람이 이 사람과 헤어졌기 때문에 역사는 이렇게 저렇게 흘렀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히틀러에게 역사적 실제와는 다른 어떤 일이 생겼다면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히틀러만 보고 있으면 우리는 히틀러가 먹고 마신 것들, 히틀러가 만난 사람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기 쉽다. 그때 히틀러가 식중독에 걸렸다면 역사는 달랐을 것이다, 그때 히틀러가 연애에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세계는 다를 것이다라는 식이다. 마치 히틀러의 모든 사소한 인생 경험만 중요하고 그 이외의 지구인간들의 경험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같다. 인간의 의식의 한계가 이야기를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화의 문제는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되 주인공은 다른 영화를 보면 잘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이 정치가인 영화를 보면 그 시대는 정치가가 모든 일을 결정하는 독립적 주체같지만 주인공이 과학자인 영화를 보면 정치가들 따위는 그저 광대나 쉽게 조종당하는 허수아비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시대는 그대로 흘렀을 것이다. 시대를 바꿔온 것은 과학기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두개의 시대가 같은 시대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다시 오늘날의 세계로 돌아와 보자. 과거의 시대는 어쩌면 몇명의 사람들이 그 시대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날에는 그것이 훨씬 더 사실이 아닌 것같다. 정보가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해석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훨씬 더 높은 수준에서 상호작용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지구반대쪽에서 테러가 난 것이 바로 그 날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리는 더 많은 독립변수를 우리의 예측에서 고려해야 한다. 뉴욕이나 마드리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빼고 우리 세상을 보면 세상은 설명 불가능하게 혼란스럽다. 그런다고 미래를 반드시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고려하는 독립변수의 수를 늘린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차원의 저주와 만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육안으로만 보면 세상이 도무지 알 수 없게 느껴진다. 모든 게 로또복권 사기같다. 왜 누가 성공하고 실패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규모의 데이터로는 답이 보이질 않거나 애초에 데이터가 부족하다. 

 

우리의 불안은 상당부분 인간의 전통적 역할이 사라져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사회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낡은  인간 혹은 정보화되지 못한 인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사회가 고도로 정보화되어감에 따라 유통과 생산의 혁명이 일어났다. 돌아보면 산업혁명 이후, 하나의 잠재적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것은 어떤 것의 위치가 그것의 가치를 바꾼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들이 제대로된 위치를 가지는 것이 더 좋은 세상을 달성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바꾸려고 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말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더 극명하게 들어나는 곳은 상업이다.

 

산 너머에 있는 쌀 한포대를 산 이쪽에 있는 소비자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상인이 하는 일이다. 그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서 공장을 발달 시키고 유통산업을 발전시켰다. 한때 상인들이란 아무런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조선시대에서는 사농공상의 구분에 따라 사회적 신분중 가장 천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물건의 위치를 옮기는 그들은 점점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의 생산지 가격보다 유통비가 훨씬 비싼 경우가 아주 많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종종 상인이지 반드시 생산자가 아니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은 이런 상업의 근본, 이런 이데올로기의 근본을 뒤흔들고 있다. 사물 혹은 인간의 제대로된 위치를 발견하고 결정하는 일이 점점 더 자동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정보다. 내가 망치가 필요한데 어디서 망치를 구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면 마침 나를 방문한 망치장사에게 나는 꽤 큰 돈을 주고 망치를 구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 망치가 몇 개가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그걸 어떻게 하면 빌려 쓸 수 있는지가 분명하다면 나는 아예 망치를 사지 않을 것이다.

 

정보가 수집되고 가공되는 속력이 빨리질 수록 생산과 유통비용도 떨어지게 된다. 올해는 몇개의 망치가 팔릴 것인지를 미리 안다면 나는 망치를 미리 먼 곳에 있지만 그걸 싸게 만들 수 있는 곳에서 만들어 망치를 사려고 하는 사람 앞에 제 때에 가져다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자동화된다면 그 속력은 더 빨라지고 더 싸질 것이다. 드론이 물건을 배달한다는 미래가 얼마나 빨리 올지 모르지만 그런 미래가 오든 안오든 유통은 점점 더 자동화되고 가속화할 수 밖에 없다. 그 방향의 경쟁에서 이기는 쪽이 큰 돈을 벌기 때문이다.  

 

트렉터로 소수의 인간이 많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농업의 혁신이지만 거꾸로 농업이라는 직업을 약화시킨 면도 있다. 이제 재래식 방식으로 그저 성실하게 곡괭이질을 하는 농부는 농사지어서 먹고 살기 힘들다. 유통의 혁신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이런 변화와 혁명의 극단에서 우리는 아예 상업이 그 의미를 거의 상실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그 과정에 끼어들 틈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것은 하나의 가치혁명의 전조일 수 있다. 

 

과거에도 이런 변화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시기 이후에는 사물의 가치가 그 물건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 사물의 가치는 그것의 위치에 있다는 생각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절 농부가 밀이나 쌀같은 곡물을 만들어 내면 그 곡물은 그 자체가 가치의 기준이었다. 즉 쌀 한포대는 이러저러한 가치를 가진다는 식이고 쌀 자체가 대개 지금의 돈같이 고정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농민의 손에 있는 쌀은 소비자의 손에 있는 쌀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식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 세상의 중심적 산업은 농업같이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산업이었다.

 

그런데 상업이 크게 발달하자 생산 자체보다 유통이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생산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고부가가치 직업을 가진 것이 아니다. 애플이나 나이키는 자기가 공장을 가지고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다. 맥도널드가 주는 장난감도 저소득국가의 노동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물론 돈은 설계하고 유통시키는 사람들보다 생산자들이 훨씬 더 적게 번다. 

 

그렇다면 삼차원 프린터가 물건을 만들고 드론과 무인자동차가 물건을 배달하며 무엇보다 고도로 정보화되어 사물의 유통이 극도로 효율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사회에서 상업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우리 지역에서 가장 휘발류를 싸게 파는 주유소를 검색하거나 자동차 타이어가 가장 싼 가게를 검색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책은 온라인 서점에서 사고 가전제품도 전시장에 가서 물건만 보고 온 후에 사기는 인터넷에서 최저가로 산다. 이것은 이미 많은 사람의 직업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20년전만 해도 용산전자상가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싼 전자제품을 사려고 모여들었지만 지금은 오프라인 가게에 가서 전자제품을 사는 사람들은 몇몇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시대에 뒤진 사람들뿐이다. 단순한 상업의 기반은 이미 붕괴되었다. 

 

공유경제의 발달은 아예 물건을 사는게 아니라 소유한 사람들이 서로 바꿔쓰거나 같이 사서 공유하거나 쓰지 않는 물건들을 교환하는 일들을  쉬워지게 만든다이제 컴퓨터는 점점  우리 개인 하나 하나의 행동패턴을 기억해서 우리가 필요할거라고 생각되고 우리가 유혹될거라고 생각되는 정보들을 선택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이런 변화의 궁극에서도 아직도 생산자들이 존재하듯 상업은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더이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만 여겨지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1차산업에서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지금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있을 것이고  과정에서 그들  소수는 아주 부자가 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직할 것이다. 기계화로 농민의 수가 줄어들었듯이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도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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