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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우리시대의 새로운 생각

7.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2

by 격암(강국진) 2016. 2. 26.

그렇다면 미래는 암울하기만 한 것인가. 나는 이제까지 미래에 대해 비교적 환상적이면서도 비관적인 이야기를 적었다. 그것은 기계의 발전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리고 얼마나 더 대단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환상적이지만 인간의 지위와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점에서 비관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 무서워할 것만은 없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발전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되지만 그걸 과대평가하는 것도 어리석다. 아이작 아쉬모프의 소설 200살을 맞은 사나이는 로보트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는 미래를 그린다. 그 로보트는 재산을 소유하기도 하고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며 지극히 인간적인 희노애락을 가진다. 이런 인공지능이 가까운 시대에 출현할 것인가. 누구도 확실한 것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상상은 자동차가 달리려는 욕망을 가졌으며 미사일이 살인 욕구를 가졌다는 생각처럼 오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자동차를 과속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고 미사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 자체의 존재를 모든 측면에서 대체할 정도의 존재가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지식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신이다. 물론 앞으로 만들어질 인공지능이 잠재적 위험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핵폭탄이나 생화학무기가 그러하듯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현미경과 다르지 않은 인간의 도구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인간 스스로에게 다 이해되지 못하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인간은 지금도 많이 무지하다. 이렇게 무지한 인간이 모든 측면에서 인간같은 존재를 만들어 낼까봐 겁을 냈었다는 사실은 미래에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별걸 다 걱정한다고 말이다. 만약 그리스나 중국에 살던 고대의 학자가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다면 현재를 사는 우리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인간이 뭔지에 대해 거의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그걸 자기가 만들어 낼까봐 걱정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200살을 맞은 사나이 같은 소설에 나오는 로봇은 미래의 로봇을 대표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시대에 뒤져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인간성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인간을 대표한다. 밭을 잘 가는 농부가 곧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트렉터가 나온 시대에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 이상이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것뿐이다. 미래에도 기계는 여전히 인간보다 못할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기계 보다 우수한 그게 뭔가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많은 직업이 사라져가고 있고 우리는 전자매체의 시대에 인간은 과연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는 시대에 의해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 볼 것을 강요받고 있다. 시대의 변화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도 나가서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아오는 것이 남자라고 믿고 있던 원주민들은 시대의 변화에 의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집앞에 슈퍼가 있어서 얼마든지 먹을 것을 살 수 있으며 수렵이 금지되는 시대에 남자란 무엇일까? 그 답은 대개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제 시대가 또한번 바뀌었다. 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사람은 무엇일까?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어떤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며 인간은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하는 질문과도 같다. 우리 시대에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낡은 생각에 바탕한 가치와 그것에 의존하는 인간의 정체성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인간이 만들어 낼 가치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기계는 적어도 오랜동안 인간의 추상적 사고를 쫒아 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예쁜 문양을 만들어 낸다거나 바둑을 두는 일을 컴퓨터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과학의 도구가 되는 게 아니라 과학 자체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던가 철학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세계관을 창조해 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인공지능은 가치있는 소설을 써내거나 음악을 작곡하지도 못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진정으로 가치있는 가게를 만들어 내지도 못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농담을 들려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꽃을 고르는 것을 도와줄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인간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친구나 배우자를 대신 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계속 흉내만 낼 것이다. 흉내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미국 가수 였던 마이클 잭슨의 모창을 잘 할 수는 있다. 심지어 때로는 기존에 녹음한 노래라면 마이클 잭슨보다 더 마이클 잭슨처럼 노래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모창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마이클 잭슨이 될 수 없고 마이클 잭슨을 능가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은 자기를 초월해서 새로운 나를 창조할 수 있지만 흉내만 내는 사람은 이미 과거가 된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최대한 그대로 재생산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면서 과연 합리적인 판단이나 이성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하게 된다. 다시 말해 기계가 인간의 상식과 다른 결정을 내리면 그것은 기계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어떤 정형화된 인간상, 어떤 평균적 인간을 바탕으로 그 인간의 사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계를 설계한다. 예를 들어 대화를 하는 기계를 만든다면 어떤 종류의 문장이 질문으로 들어왔을 때 평균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대답을 한다더라는 식으로 기계가 말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데이터 수집과 빠른 데이터 처리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흉내가 완벽해 지는 것도 어렵지만 설사 그 흉내가 완벽하다고 해도 그 기계가 흉내내고 있는 것은 정형화되고 이미 과거가 된 인간이다. 편리한 기계의 발달로 인간은 이미 새로운 존재로 자기를 초극해 가는데 말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자기도 몰랐던 자기를 발견하는 데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무지한 세계를 홀로 걸어가며 성장하지만 기계는 기본적으로 그런 인간을 흉내내며 따라올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장없이는 기계의 성장도 없다. 

 

우리는 이따금 우연히 실수로 인간 이상의 기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자동차 부품들을 빌딩 옥상에서 던졌더니 우연히 부품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조립되어 바닥에 떨어질 때는 제대로 조립된 자동차가 떨어지더라는 생각보다 더 황당하다. 인간의 창조가 스위치 하나 잘못 올리면 생겨나는 그런 일이란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부품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발로 찰 때마다 우연히 그 안에서 괴물이 만들어져서 나올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차원의 저주의 힘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래에도 인간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죽어가고 인간이 불행한 세계는 인간에 의해 극복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계몽주의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인간이 그 안에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은 인간을 주목하고 인간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때문에 설사 한 명의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다 없애버리고 혼자 지구를 차지 할수 있다고 하더라도 압도적 다수의 인간은 그 한명의 선택된 인간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리고 한다고 해도 후회할 것이다. 지구상에 아무도 없는 데 혼자서 왕이건 황제건 되면 뭘 하겠는가. 인간이 만들어 낼 뛰어난 인공지능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은 고양이를 친구로 삼는 것만큼도 위안이 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을 차지했으나 모든 것의 가치는 무한히 하락할 것이다. 혼자남은 인간은 할 수만 있다면 노숙자로 살아도 좋으니 다시 친구들과 길거리에서 싸구려 음식을 나눠먹으며 잡담을 하기 위해 지구 전체를 줘도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가치있게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것은 감상적인 발언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관찰의 결과이며 인간의 능력이다. 인간은 그렇게 진화한 생물이다. 그리고 이 것은 어떤 것이 미래에 필요한 재능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영원히가 아니라면 아주 오랜동안 기계는 이것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금새 그렇게 될 거라는 상상이 들어간 영화나 소설들은 인간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계산기가 우리보다 계산을 빨리한다고 해서 그걸 존경하지는 않는다. 제 아무리 멋지게 인사하는 로보트라도 로보트의 인사란 인간에게 받는 것에 비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컴퓨터와 경쟁하는 게임은 인간이 인간과 협동하고 경쟁하는 온라인 게임보다 재미가 없다. 컴퓨터에게 이기는 것도 성취감을 주지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 의미라는것도 컴퓨터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을 만든 사람이나 그 게임을 하는 다른 사람에게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에 단 한사람만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기억마저 없다면 그 사람은 높은 산을 등반하는 도전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이니까 더 가고 싶은 것이다. 내가 슈퍼맨이 되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나의 경쟁상대가 아닐 때 기록을 세우겠다고 더 더 힘든 일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까? 유일한 인간인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제외하면 그런 생각은 무의미하다.

 

이런 것은 계몽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속적으로 망각되어져 왔다. 왜냐하면 계몽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의 공간, 절대의 세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단 한명의 인간도 없어도 중력의 법칙은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쓴 책속의 진리, 예를 들어 멜더스가 쓴 인구론 속의 진리는 그걸 쓴 저자뿐만이 아니라 그걸 읽을 사람이 이 우주에 단 한명도 없어도 존재할 것이다. 계몽주의는 진리를 퍼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 자체의 객관적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인간조차 그 진리의 그림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해도 진리는 진리라는 식이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그림자를 지워버리고 나면 우리는 다시 인간과 세계를 만난다. 결국 아무것도 없어도 진리는 남을 수 있는 공간이란 허구에 불과하다. 이 세계는 사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공간과 시간 자체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여러 부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환경이란 나이고 다른 인간이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이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고 또 한명의 사람과 내가 존재한다면 우리 두 사람으로 해서 이 세계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기계보다 다른 인간을 더 주목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의 인식이 만들어 낸 세계는 기계보다 인간에 더 의지하여 만들어 진다. 이것은 뒤집어 말했을 때 인간은 기계가 가지지 못한 세계를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만드는 능력이란 문화를 만드는 능력, 따뜻한 가족적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 사물과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지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제 사물의 가치는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여기 낡은 의자와 낡은 시계가 있다고 하자. 이 낡은 물건들은 주변의 환경과 어떤 특정한 문맥속에 놓이지 않을 때 그저 쓰레기일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런 것들을 1960대를 재현한 가게에 가져다 놓았다고 하자. 그런 환경속에서 이 의자와 시계는 보물일 수 있다. 그 의자와 시계가 없다면 그 가게는 향기를 상당부분 잃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가게란 손님을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고 주인은 그것을 파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래가는 가게에서는 종종 그것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오래가는 가게에는 일종의 문화가 있어서 손님과 주인이 모두 그것을 지키며 그 문화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에 의해서도 지켜진다. 사람들이 그 식당이나 가게에 가는 이유는 상당부분이 그 주인이상으로 거기에 오는 다른 손님들 때문이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 즉 문화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가게에서 손님과 주인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서비스를 사고 파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가게를 지키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인간들이 모여서 모두가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하나의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키고 지키는 것이다.

 

이같은 것은 애플이나 삼성같은 회사가 물건을 파는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은 더이상 물건을 사고 파는 일방적인 관계로는 만족하지 않고 소비자와 회사가 합쳐져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게 되기를 바란다. 그 안에는 단순히 전자제품이 가지는 성능을 넘어서는 신뢰와 적응이, 다시말해 문화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비싼 가격을 감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도 한다. 길게 볼 때 그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낡은 마을은 그냥 낡은 마을이 아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하거나 이야기를 만들어서 심는다. 벽화를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의 배경이 되게 한다. 그 자리에서 오랜 동안 어떤 삶을 추구한 인간의 이야기를 발굴한다. 워낭소리는 그저 소와 같이 살았던 시골 농부의 이야기일 뿐인데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설득력을 가지자 그 소도 그 농부도 그 마을도 이제 새로운 가치를 가진 곳으로 느껴지게 된다.

 

제주도는 한 때 신혼여행지로 유명했지만 그저 소비적인 섬으로만 생각되어졌었다. 그런데 그 섬에 산책로를 개발하고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치유적 이미지를 개발하자 제주도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제주도를 다르게 보게 된다. 하나의 섬이, 하나의 지방이, 하나의 마을이 어떤 이미지를 가졌는가 하는 것은 오늘날 소득에 있어서 아주 큰 격차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유명 작가들에게 공짜로 집을 제공하고 우리 지역에 와서 살아달라고 말하는 곳들도 있다. 그 작가가 이미 성취한 것도 있지만 그 작가의 시선 한번이 그 지역을 더 가치있게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미를 만들고 세계를 만든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그런 일을 하는 효율을 증대시키는 도구가 될 것이기에 앞으로 인간의 이런 능력은 훨씬 더 증대될 것이다. 전자매체의 시대에 자연스럽게 출현할 것은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서 가상공간에 건설 될 수 있는 세계들이다. 이것들을 전자 세계들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 전자 세계들은 지금 우리가 익숙한 통상의 온라인 게임과는 다르겠지만 그 게임들도 전자세계들의 예라고 생각될 수 있다. 또 SNS도 메신저도 전자세계의 일종이다.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사람들을 이어준다. 메신저 프로그램도 텍스트의 형태로 사람들을 이어준다.

 

각각의 전자세계는 다른 규칙, 다른 문화가 있다. 물론 가상현실 기술같은 것이 발전하면 그런 세계를 만들 때 존재할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단순히 컴퓨터 그래픽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형식이다. 메신저 프로그램에서 사람은 이름 옆의 깜박이는 커서로 존재한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움직이는 그래픽으로 존재한다. 페이스 북에서는 페이스 북 홈페이지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 존재들이 말하고 반응하고 정보를 나누게 되어 있다. 그런 관계가 가지는 형식이 그 세계 안에서의 생활을 결정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의미를 발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즐거움과 이득을 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들은 가치들을 생산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온라인 게임안에서 아이템을 팔아서 돈을 번다. 어떤 사람들은 소셜네트웍을 이용해서 사업을 한다. 주커버그 같은 사람은 그런 세계를 창조해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된다. 주커버그가 한 것은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이며 그때문에 그는 큰 부자가 된 것이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고도의 추상적 사고다. 우리는 물건을 만들어서, 밀이나 쌀을 경작해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또 그런 물건들을 조합하고 그 위치를 바꿔서 가치를 창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높은 차원의 가치 창출은 어떤 것들을 혹은 어떤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계몽주의적 이상과 반드시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다. 계몽주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따라서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이 거대한 세계를 한꺼번에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계몽주의는 끝없이 수없는 의미가 그저 환상이며 착각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인간이 일상에서 가지는 의미들은 한없이 약화되어져 왔다. 미래에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은 예술과 과학의 중간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수없이 많은 세계를 창조하게 만들고 우리를 은하계를 방랑하는 여행자처럼 만들 것이다. 이미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아직도 땅은 평평하며 지구가 우주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비옥하지 못한 토지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 로보트의 삶을 살게 되거나 지나간 시대의 잔혹한 착취자들이나 살인마들처럼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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