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1
이세돌과 알파고의 역사적 바둑대결은 1,2국 모두 이세돌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앞으로의 경기에 따라 충격은 좀 희석되겠지만 이세돌의 두 경기는 딥마인드의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굉장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같은 현실에 대해 불안해 하는 사람도 많은 것같다. 중요한 것은 불안해 하는 가 안하는 가가 아니다. 불안해 할 것을 불안해 하는가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을 불안해 하는가에 있다.
우선, 여러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뛰어나게 되어서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스카이넷처럼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것은 오해다. 인공지능은 계산기나 자동차처럼 인간의 도구로 남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도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계산기나 자동차는 생각못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우리를 바꾼다. 인공지능도 세상을 바꿀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바꿀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계속 다시 답해야 하는 세상을 살게 되었다. 세상의 변화가 빠른 시대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등에서는 우리가 우연히 어떤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을 상상하곤 한다. 확실히 우리는 우연히 치명적인 위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연히 인간을 뛰어넘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만들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내 컴퓨터를 발로 세게 찼더니 하드디스크에 윈도우의 다음버전이 생겨났다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우리가 기계화한 인간의 능력은 인간의 모든 능력이 아니다. 인간은 어쩌면 영원히 인간을 진정으로 능가하는 존재는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고 기계화한 어떤 능력은 일단 그렇게 되고나면 기계가 인간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메뉴얼화가 잘 되는 것은 프로그램으로 자동화되기 쉽다. 그래서 이미 그렇게 된 분야도 많다. 굳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아니라도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그런 일들을 매우 잘 수행해 주고 있다. 그런데 메뉴얼화는 잘 안되지만 어디에 답이 있는지에 대해 테두리를 쳐줄 수 있는 분야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또 학습하는 기계들을 통해서 더 빨리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일단 이 백과사전안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걸 기계가 더 빨리 검색해서 답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뭘 하는 기계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보다 더 빨리 어떤 일을 수행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계산기같이 우리가 익숙한 기계를 생각해보자. 계산기보다 산수가 느리다고 충격받거나 자존심상해하고 계산기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금방 익숙해 질 것이고 인공지능은 그저 친숙한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무인자동차가 인간보다 더 운전을 잘하는 날이 온다거나 컴퓨터 의사가 인간 의사보다 진단을 더 잘 내리는 날이 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 질 것이다. 인간이 기본적인 취향 몇가지만 말해주면 기본적인 것은 기계가 알아서 설계하고 3차원 프린터로 집을 찍어내고 기계가 그걸 조립하는 시대가 와도 우리는 그것에 금방 익숙해 질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인공지능이 들어간 기계를 쓰는 일에 매우 익숙해져서 그것을 우리몸의 일부처럼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단축키로 전화거는 사람이 원래 전화번호를 점점 잊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한 사회와 지금의 사회의 차이는 지금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는 사회와 지금의 사회와의 차이와 비슷할 것이다. 컴퓨터나 인터넷때문에 현대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빨리 변하는 사회가 되었다. 현대인은 더 외로워졌고 자살률이 올라가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월든 같은 책을 읽으며 숲속의 자급자족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컴퓨터고 인터넷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금지하자고 주장하는가. 그냥 나무와 풀과 산을 벗삼아 살아가자고 주장하는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기에 그런 주장은 없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지구상의 어떤 특정 그룹이 인공지능기술을 독점할 수도 없겠지만 독점한다면 그것은 마치 그들이 지구를 정복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비슷해 질 것이다. 예를 들어 4차산업혁명에 대한 프로그램에서 이런 예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남자가 자신의 10대 딸에게 유아용품 광고가 배달된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 10대 딸이 임신한 것이 사실로 들어난다. 그 회사는 10대인 딸의 소비패턴을 통해 이런 사람이라면 임신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서 광고를 보냈는데 그것이 사실로 들어났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 세상에 정보는 넘쳐날 것이다. 만약 어떤 인공지능이 그 수많은 쓰레기 정보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답을 뭐든지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는데 그걸 특정 그룹이 독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어 특정 그룹이 회사 매각을 고려하고 있다는 정보를 아무도 모를 때 혼자만 알아낼 수 있다던가 한다면? 그들은 금방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지 않을까?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핵무기가 전지구에 퍼져있듯이 인공지능기술도 전세계에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그렇게 했듯이 사회를 매우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곳으로 바꿀 것이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그 복잡함을 헤쳐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예를 들어 일단 인간의 생체데이터를 집어넣으면 인간보다 더 진단을 잘 내리는 기계가 나오면 금새 의료 데이터의 복잡성은 크게 증가해서 이제 인간으로서는 그 데이터를 봐도 뭐가 뭔지 알기 더 어렵게 될 것이다. 지금도 뇌파 신호를 다채널로 받아들인 신호나 MRI신호는 인간이 눈으로 직접 봐서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프로그램이 그걸 재구성해줘야 한다. 인공지능같은 것이 발달하면 할 수록 세상은 급격히 더 복잡해 질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물론 세상이 더 편리해 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편리한 세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란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계속 다시 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훌룡한 성인 인간이란 숲에서 사냥감을 잘 잡는 존재라는 답은 사냥할 필요가 없어지거나 사냥이 불가능해지면서 소용없는 것이 된다. 인간이란 논밭에서 농사일을 잘 하는 존재라는 답은 산업혁명이후에 소용없는 것이 되거나 크게 변질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직업들이 사라질 것인가. 어떤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 무인자동차가 보편화 된다면 택시기사나 택배서비스 종사자들은 모두 직업을 잃게 될 것이다. 자동차나 스쿠터가 혼자서 물건들이나 사람을 나를 수가 있는 시대에 뭐하러 인간을 고용할 것인가? 그런 미래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다. 어쩌면 미래에는 오히려 인간이 도로에서 자동차를 모는 것이 제한 될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JTBC에서 20년안에 사라질 직업들에 대한 방송을 한적이 있었다 (http://1boon.kakao.com/issue/aifear).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텔레마케터, 스포츠심판,회계사나 택시기사같은 직업은 20년안에 사라질 확률이 아주 높다고 예측되었다. 반면에 레이크레이션 치료사. 사회복지사, 초등교사, CEO같은 직업들은 사라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예측되었다.
이 예들이 보여주는 것은 해야하는 일의 성향이 분명한 직업은 점점 사라질 것인데 고독한 판단을 내려야 하거나 임기응변이 필요한 대면접촉을 해야 하는 직업은 기계로 대체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계는 그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은 추상적인 활동일 수록 더욱 더 인간을 쫒아 올 수가 없다. 바둑이 복잡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 게임의 법칙을 안다. 그런데 인간은 게임을 창조하고 게임을 고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축구를 하다가 축구를 더 잘하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종목을 야구로 바꿀 수도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를 개념으로 포착하고 그것들 간의 관계를 찾아내다가 그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기계는 이런 일들을 잘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인간인 우리가 그런 것을 우리가 왜 하는 지 또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예술을 가지고 있고 과학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어떻게 하면 예술적 영감을 얻고 어떻게 하면 과학적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지 모른다. 그것이 과연 완전히 무작위한 과정 속에서 우연히 좋은 것을 찾아 발달해 나가는 과정인지 아닌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모르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계로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두가지 사실은 좋다는 것의 기준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인간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는 능력은 기계에 의해서 대체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자동차나 내 컴퓨터에게 애정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지구에 홀로 남아 인공지능과만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기계가 인간이 하는 일의 대부분을 해주는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의 가치는 크게 부각될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미래사회에서 소중한 가치로 떠오를 것은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사회는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사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다양성이 부족한 사회는 거꾸로 아무 경쟁력을 지니지 못해서 망하는 시대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이 다양화될 때 기계화가 되지 못하는 창의력이 발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반대로 중앙에서 누가 이저러저하게 하는 것이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전체적인 다양성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순간 그 사회는 기계에게 따라잡힐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산업혁명으로 폭팔적으로 변해가는데 그저 자신이 아는 농업의 창만으로 세상을 보면서 밭을 더 열심히 가는 방법을 찾으라고 다른 건 보지 말라고 하는 지도자는 그 나라를 망칠 것이다.
무한대의 물이 나오는 마술의 병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다면 이제 물값 걱정은 아무도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것이 기계화되는 시대에는 그런 것의 대상이 되는 것의 가치는 떨어진다. 그런 시대에 인간은 창의력을 발휘하고 서로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어야 진짜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세상에는 여러가지 답들이 있겠지만 창의성에 대한 고정된 정답은 있을 수 없다. 그런게 고정되어 있다면 그건 창의성이 아니니까. 다만 나는 남다른 삶이 남다른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남들을 흉내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있는 어떤 아이디어를 가져올 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남과 다르기만을 고집한다면 그것도 문제다. 그런 삶은 대개 엉망진창이 되고 마니까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마치 우리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바라보는 태도로 요약되어진다. 우리가 하나의 그릇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당연히 전통으로 내려오는 검증된 방식을 참고할 것이다. 또한 대칭이나 단순함의 아름다움도 살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딘가에 비대칭이 생기고 복잡함이 들어가고 전통에서 벗어나는 곳에서 예술이 탄생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건 그냥 뭔가의 복제품이 되고말아서 시장한구석에서 싸게 파는 가치없는 상품이 되고 만다.
인공지능의 시대란 이제 복제품 삶은 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예고한다. 우리는 더 창의적인 인간이 되어 예술적인 삶을 만들어 낼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이나 인공지능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인간같지가 않습니다. 마치 기계같군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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