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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이기적인 사람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16. 10. 5.

16.10.5

이기적이라는 말은 나만 안다는 뜻이다. 이기적이다라는 표현만큼 세상에 흔한 것이 없지만 실상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이기적인 사람이란 세상에 하나도 없거나 정신병원에나 가야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가 아주 중요하면서도 아주 쓸모 없는 잘못된 단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기적이라는 말의 현실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 행복의 원이라고 하는 개념을 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인식의 테두리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그 원안에는 우리가 우리의 행복에 관계된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그 테두리 안에는 대개 육체의 즐거움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아프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자기 얼굴이 잘생기거나 몸매가 형편없거나 젊거나 늙거나 하는 것에 모두 무관심한 사람은 드물다. 

 

그 테두리 안에는 친구들도 있고 재산도 있으며 명예도 있고 꿈도 있고 추억도 있다. 문자 그대로 이기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 행복의 원은 아주 작을 것이며 그 원안에는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것이 무한정 크지는 않다고 해도 상당한 크기를 가지고 그 안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그 원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흥미없는 사람이나 흥미없는 물건이라고 부를 수 있다. 흥미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아주 많은 경우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흥미가 더이상 없다. 그 사람을 모른다기보다는 이미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 혹은 그 사람은 더 이상의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흥미없는 사람은 이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 혹은 내 행복에 큰 관련이 없다고 판정된 사람이다.  

 

일단 그렇게 판정받고 나면 사실 처음 본 사람보다 그 사람이 진짜 낯선 사람이 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대개 초기의 흥미가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해 관찰하고 배우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흥미없는 사람의 경우는 아무 관심이 없으므로 매일같이 만나도 내가 아는 것이 늘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같이 비참한 얼굴로 사는 이웃의 앞을 지나가도 그 사람에 대해서는 뭐하나 알지 못하는 일상을 살 수 있다. 누군가가 죽었다거나 누군가가 진학을 못하게 되었다거나 누군가가 이혼을 했다거나 하는 소식도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인식의 테두리 저너머에 살고 행복의 원 저 너머에 살기 때문이다.

 

이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하자. 그런데 한 사람의 행복의 원안에 두 번째 사람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두번째 사람은 첫번째 사람이 자기에게 흥미없어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경우 두번째 사람은 첫번째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당신이 편의점 알바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고 하자. 당신의 행복의 원안에는 편의점 알바들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임금이 얼마인지, 근로조건이 어떤지,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당신은 관심이 전혀 없다. 그런 당신이 편의점에 가서 어쩌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당신이 무심코하는 말들은 그 편의점알바에게 지독히 이기적인 것으로 들리게 될 수 있다. 그 편의점 알바는 상대방이 나에게 악의 조차도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죽건 살건 그는 아무 관심이 없어서 길을 걸으면서 개미를 밟아죽이듯 편의점 알바의 삶을 산산조각내는 일을 해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같다. 그는 그런 차가움과 무관심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방을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기적이다라는 말에 그저 나만 안다라는 간단한 설명을 붙이는 대신 이렇게 행복의 원이라던가 흥미없는 사람의 개념을 동원해서 설명하는 것에는 그 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어떤 사회적 규약을 지키는 가하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문제로, 태도와 정보의 문제로 만든다.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을 단순히 나쁘다라던가 좋다라고 딱지 붙일 수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이기적인가 아닌가는 그보다는 공동체정신의 문제다. 당신이 일본인에 대해 혹은 우간다 사람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는 한국인이라면 당신이 주변 한국인들에게는 제 아무리 다정하고 사려깊은 한국인이라도 일본인이나 우간다 사람은 당신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느낄 것이며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우주 삼라 만상의 모든 것을 행복의 원안에 가져야 한다. 그건 적어도 나를 포함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것이 나쁜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며 나쁘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니까 좋다 나쁘다는 개념은 별로 도움이 안되고 혼란만 만든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매순간 아주 많은 것들에 대해 이기적인 존재다. 우리는 작은 만큼 이기적이고 유한하다는 의미에서는 누구나 작다. 나는 그래서 우리가 이기적일 수 밖에 없으니 이기적이어도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은 마치 내가 세상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므로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는 논리나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니 지금 죽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이기적인 것은 당신에게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혹은 아래에 설명하는 것처럼 당신이 착각해서 그렇지 당신도 그 사람에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겸손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 가지는 당연한 태도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따라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알지 못한 채로 그 누군가에게는 이기적으로 살고 있다. 언제나 그것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최소한 그것을 기억은 하면서 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이기적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이기적이라는 것과 이해는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아주 흔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세상에는 자기 할 도리는 다 하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왠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다. 

 

 당신은 매우 성실한 배우자요 부모이거나 자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내심 이해를 포기하고 앞으로는 그 방향으로 더 이상의 노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혹은 그들에 대해 당신이 이미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를 혹은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부모를 어떤 의미에서 흥미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그저 의무의 대상이고 내 할일을 다했다면 나에게 뭘 요구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로 사실 나는 그들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기를 포기하면 그 사람도 내가 이해가 안되게 되고 결국 나를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흥미없는 사람이 된다. 우리가 만난지 얼마나 되었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은것을 알고 있건 우리가 서로를 사귀기 포기한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흥미없는 사람 즉 이기적이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이 된다. 상대방이 소중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상대방이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그저 의무적인 관계란 쌍방 모두를 즉 의무를 다하고 있는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통상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흔하다. 그러나 의무를 다해도 이기적일 수 있다. 이 것을 사람들은 종종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종종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이유로 혹은 그저 관습에 의해 혹은 취향과 재능과 능력의 문제로 스스로를 이해불가능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것은 꼭 의도된 것은 아니다. 세상이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주 많지 않은가. 그런데 의도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그것은 우리를 다른 누군가의 행복의 원 바깥에 있게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기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어떨 때는 어떤 사람에게는 온 세계가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이해할 수 없다. 그 어려움이 너무 지나치면 부모는 흥미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부모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청소기나 자동차처럼 어떤 기능을 가진 존재일 뿐 더 많은 이해가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면 부모는 아이들이 이기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부모가 아파서 쓰러지려고 해도 밥과 돈만 찾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고 할 때 이런 문제의 책임이 아이들만의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아이도 그렇게 느낀지 오래다. 부모가 모든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경우 아이는 논리적 비판을 가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부모가 이기적이라고 느낀다. 그 의무속에 사랑이 포함되어져 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랑을 느끼지는 못한다. 부모가 이해불가능한 존재이거나 부모에 대해 알 것은 다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진정으로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기능을 다하는 전기밥솥이 나를 사랑해서 밥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ATM기계가 돈을 준다고 그 기계에 고마워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런 기계들을 점점 잊어간다. 기계들이 정상작동할 때는 대개 그 기계들이 뭘 한다라는 것 자체가 인식의 저너머에 있다. 오직 그런 기계들이 고장이 나면 왜 안돼냐고 화를 낼 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흥미없는 사람, 더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 그 사람에 대해 알 것은 이미 모두 알았다고 느끼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를 이기적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과 이해받는 다는 것은 복잡한 문제다. 도서관에 있는 많은 책들은 대다수 사람에게는 이해불가능하고 재미없는 책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책은 언제나 펼쳐 볼 수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인데도 그렇다. 그러니 사람을 이해한다던가 이해받는다던가 흥미를 지속한다던가 하는 일이 간단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 우리에게 흥미를 가지기를 원한다. 어느 날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종종 그것은 누군가의 악의 때문도 아니고 피할 수도 없으며 어떤 특정한 사람의 잘못만도 아니다. 또 우리 스스로도 사실은 그런 일을 많이 저질러 왔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으며 그것이 부모를 상처주는 일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이 철없는 꼬맹이가 아니라 할도리를 다 하는 중년이상의 어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할도리를 다한 것으로 자신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사 알아도 언제나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귐이란 쌍방의 의지가 모두 필요하고 능력과 환경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갑자기 부모님과 흥미로운 대화가 절로 이어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이기적인가 하는 질문은 그래서 생각하면 할 수록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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