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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사람의 일

by 격암(강국진) 2016. 7. 22.

16.7.22

우리는 법이니 윤리니 철학이니 정치니 하는 분야에서 여러가지 말들을 만들고 세상일을 논하려 하지만 만가지의 말이 한순간의 체험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계속 경험한다. 우리는 시민의 법을 따지고 자식과 부모의 윤리를 따지지만 사람의 행동이란 참으로 비논리적이다. 우리는 따지고 보면 만난지 얼마 안된 사람에게 사랑을 느껴서 죽니 사니하고 집착을 하지만 수십년을 알고 지낸 친 혈육도 인연이 끊어질 때는 한 순간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지만 죽을 병에 걸려서 투병하는 환자가 있어 본 집에서는 그런 극한의 체험은 우리의 내부를 파괴한다는 것을 안다. 3년 병수발에 버티는 효자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겪어보면 경우에 따라 3년이 아니라 3주를 버티는 것도 대단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픈 환자가 있는 집안들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어지곤하는 상황이 있다. 정작 그 환자를 돌보지 않는 노인의 딸이나 아들 혹은 이웃의 누군가가 와서는 그 환자를 보고서 이런 저런 불평을 하거나 심지어 화를 내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렇게 환자를 대우할 수 있냐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암투병이나 치매로 누워있는 배우자가 있는 남자나 여자가 불륜이나 그에 거의 가까운 일을 저질렀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을 돌을 던질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도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부모를 욕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 한쪽에는 있는 체험이 다른 쪽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균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체험이 어떤 행동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몇가지의 말을 더할 수 있다. 첫째로는 과연 우리가 그런 극한의 체험을 얼마나 자주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여전히 이런 저런 방법을 써서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거나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런 저런 메뉴얼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런 체험은 예측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실은 앞에서 말한 종류의 상황은 우리의 기억과 느낌보다는 훨씬 자주 오며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그런 엄청난 상황만 극한의 상황이 아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혹에 지고, 폭력에 진다. 고통에 지고 지루한 것에 지고 만다. 그런 패배의 순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자체, 우리라는 인간 자체가 파괴되는 것을 경험한다.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척한 그 한 순간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도둑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둑질을 처음으로 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복종해서는 안되고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에 대해 복종하고 무시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그런 순간들은 어떻게 말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고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지는 순간이기도 하며 실은 어떤 다른 사람이었던 우리가 파괴되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순간들은 고통스럽다. 종종 우리는 그런 기억때문에 악몽을 꾸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편리한 변명들을 많이 만들어 내고 대개의 경우 우리가 그런 체험을 통해 변했다기 보다는 우리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인식을 만들어 내면서 우리의 존재가 연속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겪었던 극한의 체험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날개가 뜯겨져 나가는 극한의 고통의 순간은 인간은 본래 날개가 없다는 인식으로 채워지고 그래서 애초에 날개는 있었던 적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전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어떤 체험이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일이 되고 급기야 그게 뭐 원래 그런거지라고 말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극한의 체험은 평생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데 성공한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인간은 다 그렇다라고 말하거나 그런 경우에는 누구나 어쩔 수 없다거나 그래 나도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같은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이것은 이런 과정이 여러번 우리를 지나쳐 갔다는 흔적이다. 

 

실제로는 우리는 그런 순간들을 통해 우리 존재의 테두리에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종종 무지의 벽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벽의 반대편은 통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소다. 우리의 환상세계는 가능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같지만 실은 이런 존재의 테두리 안쪽으로 이뤄져 있다.  체험은 이 테두리를 확장할 때도 있지만 축소시킬 때도 있다. 어떤 체험들의 결과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도 있다. 

 

모든 인간들은 이런 다양한 체험의 총체이며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 법이나 윤리나 정치나 철학은 한 개인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논의된다. 그래서 철학은 종종 죽어 있다. 우리는 보편성을 잊지 말면서 특수성도 존중해야겠지만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가 언제나 도움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어떤 보편적인 개념이나 원리에 대해 많이 알수록 그들은 뭔가를 더욱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들은 종종 인간을 바꾸는 체험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변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이래로 지금까지 항상 같은 세계를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환상에 빠져있다. 누구나 무지의 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지의 벽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의 일이란 이렇다. 이래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스스로하고 괴롭다고 운다. 그들은 이런 일은 안되고 저런 일은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관습과 상식과 두려움과 자기 이미지의 포로다. 그래서 돕기가 어렵고 대개 자신을 도우려는 사람을 비웃고 멸시하고 오히려 미워하며 즐겁게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뛰어간다. 사람의 일이 이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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