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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미친 광인과 삶의 형식

by 격암(강국진) 2016. 8. 23.

16.8.23

살다보면 참 자유로운 사람들을 본다. 물론 자유로운 사람이란 애매한 표현이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소박한 의미다. 즉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얽매이는 형식이나 관습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들을 말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그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종종 불안해 진다. 그 한가지 이유는 유명한 선사라던가 정치가, 예술가중에는 유달리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선종계열의 불교가 전통적으로 있어왔고 거기에서 형식을 깨라는 원칙에 따라 파계승처럼 행동했던 전설들이 많이 이야기되다보니 그런 것도 있는 것같다. 어찌보면 고기먹고 술 안먹는 중은 득도를 못해서 그런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깨달음을 얻은 중이 파계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흔하다. 

 

옛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한국인의 일상에서도 이 문제는 자주 등장한다. 술 많이 먹고 니것내것 가리지 않는 남자가 멋진 남자이며 바람도 피고 사창가에도 드나드는 남자가 멋진 남자라는 이미지는 항상 통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 진하게 남아 있다. 게다가 여자도 질 수 없다면서 여자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습이며 규칙을 깨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같다.

 

규칙에 대한 파격은 매력적이다. 내가 길에다가 똥을 싸면 법적으로건 도덕적으로건 문제가 되겠지만 어떤 이상한 논리에 의해서 길에서 똥을 쌌더니 사람들이 깨달은 사람 취급을 해준다면 매력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된 습관에 의해서 배변을 정해진 곳에서만 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사회적 훈련마져도 집어던질 수 있고 거기에 대해 칭찬까지 받는다면 거기에는 어떤 통쾌함과 쾌감이 있을 것이다.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는 예나 지금이나 가짜로 깨달은 엉터리가 차고 넘친다. 둔감함은 호쾌함으로 둔갑하고 도덕적 패륜은 통이 큰 것으로 포장된다. 내용물은 일등병이면서 장군껍데기를 쓰고 살려고 하니 한달 구걸해서 모은 돈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한끼 식사에 날리는 식이 되기 쉽다. 식사를 하면 선배나 상사가 식비를 턱턱 낸다. 모르는것을 아는 척하기 위해 큰 소리 치다보니 후배나 부하직원앞에서는 세계적인 석학이나 나라를 구할 구세주처럼 허세를 떠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동기들이나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어린애처럼 변하는 사람들이 아랫사람이라고 인식될만한 사람들 앞에서면 갑자기 대담한 사람인 척 한다. 술을 먹어도 개처럼 먹는다. 그렇다고 개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니까 이 모순이 시스템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더 큰 권위주의를 키우는 수 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면 모일 수록 집단으로서의 한국인은 더 비합리적이 되어가는 경우도 많은 것같다. 위아래를 나누고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잘난 척은 끝없이 한다. 이러니 허풍의 폐해가 작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라는 그리스의 수학자는 어떤 문제의 답을 목욕탕에서 풀다가 답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때 벌거벗은 몸으로 유레카라고 외치며 거리를 달렸다라는 이야기로 유명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나체로 거리 한번 안달려 본 사람은 수학자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오해의 소지가 아주 많은 말이 될 것이다. 특히 수학공부는 안하고 거리를 나체로 달리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이건 엉터리라도 아주 엉터리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은 사람들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다고 믿는다. 무형식의 삶이라던가 궁극의 깨달음 같은 헛소리에 기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는 궁극의 깨달음도 없고 무형식의 삶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느 날 깨달음을 얻어서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식의 이야기는 신화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는 유한하다. 그것은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어떤 깨달음을 가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유한하므로 인간의 삶은 형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듣고 추측한 유한한 정보에 기초해서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욕망이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이고 욕망이 있다는 것은 부족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미친 광인의 행동이 언제나 모두 나쁘고 의미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관습이나 역사, 개인적 성장배경등에 의해서 어떤 것을 보고 듣지 못하도록 된 사람이 그것을 보고 듣기 위해서 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미친 행동을 한다던가 깨달음을 얻고 괴상한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이것 일 것이다. 예술가들이 자기만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고생하는 것도 그렇다. 이차원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날 3차원을 보려고 한다면 그리고 보게 되었다면 그런 괴상한 행동들을 할 법도 하다. 다이아먼드의 가치를 높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게 뭔지도 모르고 불로 다이아먼드를 계속 태우고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 본다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무형식의 삶이라던가 궁극의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자기의 삶이 가지는 형식을 사랑하는 것과 그것을 의심하는 것 사이의 건강한 긴장상태에 머물 준비를 해야 한다. 신과 같은 무한의 존재에게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은 세상 일이 쓰레기 처럼 무가치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형식도 우리는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품을 수가 있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작디 작은 사람에 불과하며 우리의 삶은 찌질해 보일 때가 있다. 나는 찌질한 인간이 아닐까 라는 불안에 단 한번도 빠져보지 못한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정신병자가 아니면 너무나 수준이 낮아서 자기 성찰이란 것을 해 본적도 없는 사람일 것이다. 성장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부족함을 느끼고 부끄럽게 느끼니까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포장마차도 내가 애정으로 운영해온 것이라면 거대한 회사 이상으로 내 애정을 받을 수 있듯이 대단한 깨달음따위 없었어도 내가 키워온 내 삶을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리 멀리 오지는 못했어도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걸은 길이다. 물론 계몽주의자들은 내가 인생의 진실을 가르쳐 주겠다면서 당신의 삶따위 다 던져버리고 이 진리를 받으라고 외치겠지만, 물론 작고 한심한 인생들은 오늘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가 도달해야할 최종적 목표라는 것도 없으며 이번 선거나 올해안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세상이 망한다는 주장은 아주 아주 대부분의 경우 맞지 않다. 오히려 지나고 보면 자기만 깨달은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겨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에 전부 집어던지라고 했던 그 사람때문에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답답하고 배고프다고 싹을 집어 당긴다고 해서 큰 나무로 하루 아침에 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싹을 죽일 뿐이다. 

 

여기 답이 있다고 하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한 번 보라고 하는 쪽이 좋다. 세상을 욕하고, 누군가를 욕하고, 자기가 가진 것에 눈이 팔리는 것을 약간 밀쳐두고 자기가 누군지를 한 번 보라고 하는 쪽이 좋다. 특히 깨달은 사람인 척, 통큰 사람인 척하는 것을 그만두고 어디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곳에 가서 홀로 자기가 누구인지 한 번 보라고 하는 쪽이 좋다. 뭉쳐만 다니지 말고 가끔은 외로워도 보는 것이 좋다.  그럴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제공하는 쪽이 좋다. 산책도 좋고 골방에서 혼자 일기를 쓰는 것도 좋다. 집단으로 모여서 무슨 종교집회처럼 떠들어 대고 있으면 자기를 보게 되기 어렵다. 

 

깨달았다는 미친 광인에 대한 생각도 잊고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에 대한 열등의식도 잊고 절대가 있다는 생각도 잊고 그냥 자기를 보다보면 우리는 삶의 고통을 하나 둘 쯤은 줄일 수 있을 지 모른다.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수 하나 둘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운이 좋다면 우리도 나체로 길을 달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가지는 형식을 넓히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를 흉내내고 껍데기에 신경썼기 때문이 아니다. 괜히 호쾌한 사람이고 진리를 안 것같이 자신감에 넘쳐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미친 짓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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