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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생각들과 여유

by 격암(강국진) 2016. 11. 4.

16.11.4

책장에서 책을 꺼내 20세기 철학의 양대조류인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이야기를 조금 읽었다. 읽다보니 세상을 보는 관점에는 크게 두가지의 방식이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그 두가지 방식이란 시스템 바깥쪽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과 시스템 안쪽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말한다. 이 두개의 방식은 언뜻 생각하면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게 만드는 면이 있어서 서로 충돌하게 되며 종종 오해받고 있다. 

 

시스템의 안쪽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이란 이 세상을 관찰하고 그렇게 관찰된 결과들을 잘 정리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이것은 어떤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유일한 관점처럼 들린다. 예를 들어 관찰하고 정리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가. 그렇다면 과학너머의 무슨 신비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 부분은 시스템 바깥쪽의 관점에서 좀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시스템 안쪽의 관점이 가지는 특징을 몇가지 말해 보도록 하자.

 

시스템 안쪽의 관점은 혼란스러운 우리의 관찰 결과들을 정리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떤 이론이나 질서나 법칙에 도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싸우고 없애려고 하는 것은 부정확한 관찰, 무의미하고 근거없는 개념들, 필요없이 복잡하게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최대한 지식을 압축하려고 하고 동시에 그러면서도 정밀하게 세상에 대한 정보들을 나타낼 수 있는 관점을 추구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현상학과 분석철학 모두 마찬가지지만 분석철학이 좀 더 그렇다. 논리실증주의라고도 알려진 이 체계속에서는 우리는 언어를 분석하고 세상을 꼭 필요한 최소한의 분명한 개념들만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논리적 인식적 환상을 제거한다. 이런 문맥에서 모든 철학문제는 단순히 오해였을 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현상학역시 가장 믿을 수 있는 학문을 만들려는 목표를 가졌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초기에는 이와 다른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실존주의라는 철학이 널리 말해지면서 이야기는 애매해 진다. 예를 들어 현상학의 아버지인 후설은 자신의 제자인 하이데거의 철학은 현상학이 아니라고 했고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실존주의라고 했지만 정작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이 실존주의가 아니라고 했다고 하니 철학이란 쉽게 이름 붙이고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생명적인 것만을 사고 했던 철학이 삶이나 생명에 대해 고민하면서 바로 시스템 안쪽에서의 사고는  흔들거리게 된다. 스스로를 인문학 취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종종 과학같은 지식체계는 이분법적으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는 식으로 분류하고 고정시키는 데 뭔가 삶이나 생명이란 그런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은 거대한 고정된 시스템속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멋져도 인간이 비참해 지더라는 경험에 의해 보다 강해지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시스템 바깥쪽에서의 관점이라는 것을 등장시키게 된다. 시스템 바깥쪽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이란 시스템 안쪽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반대말로서 피하기 힘든 이름이기는 하지만 실은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름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시스템이란 우리가 현재 세상을 보는 관점과 패러다임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뭔가를 보고 듣는다는 것은 모두 이 관점을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가 아니라면 압도적인 다수가 시스템 안쪽의 관점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시스템 바깥쪽의 관점을 가질 수 없다. 왜냐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당신의 패러다임이 변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시스템은 이미 확장되었고 당신은 여전히 시스템 안쪽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시스템만을 바깥쪽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현재의 시스템 바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주 어린 아이를 관찰하거나 시각장애인을 관찰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당신은 그들을 관찰하고 심지어 어른의 삶이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삶을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걸 체험할 수 없다. 누군가가 우리의 5감과 다른 어떤 6감이 있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6감이 어떤 건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의 패러다임, 지금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 우리가 만약 유령을 본다면 당신은 두개 중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유령이란 잘못된 관찰의 결과이며 어떤 인식적 오류라는 것이다. 시스템 안쪽의 관점이 싸우고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런 관찰을 무시하게 된다.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황당한 음모론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므로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위화감을 느낀다. 미친 짓을 한다. 아니 미친 짓을 해야만 할 것같이 느낀다. 다른 하나의 선택이란 바로 이 위화감을 억누르지 않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살아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 이러한 선택은 우리의 삶의 구조를 완전히 바꾼다. 시스템 안쪽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과학적인 증거도 어느 정도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는 이유는 다시 말해 무의식 속에서 숨쉬고 음식을 먹고 배설만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깨어있는 이유는 불확실한 상황에 부딪히고 어떤 선택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부정해야 내일이 오기 때문이다. 자꾸 같은 것만 하고 있어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의 실존이란 우리가 어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인간같은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속에서 특정한 역사를 가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일반론적인 규칙이 무너진다. 인간은 팔이 두개다. 그래서 장갑은 두짝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소수이지만 팔이 세 개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장갑이 세 짝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질문이 나는 장갑을 몇 짝을 사야할까라는 것이라면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두 짝을 사야한다. 그러나 당신이 팔이 세개인 사람이라면, 어떤 특수한 존재라면 그 답은 다르다. 당신은 누구인가. 보편적 존재인가 아니면 특수한 존재인가.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아니면 그냥 일반론만 따라하고 남따라 살고 있는가?

 

내가 어떤 여자와 결혼해야 할 이유는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전혀 없을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아주 바보같은 생각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결혼을 일반론에 의해서 결정하고 있는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다. 반드시 일반론을 어기라는것은 아니지만 나라는 특수한 존재이기에 일반론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을 내리는 존재로 남는 순간이 우리의 실존을 긍정하는 순간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건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그들은 나와는 다른데. 

 

이러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시스템 안쪽의 관점은 시스템 바깥 쪽의 관점을 신비주의같은 사이비로 부르게 된다. 어떤 여자에게 미쳐서 결혼하려고 하는 친구를 말리는 이성적인 친구나 비슷한 입장이라고 할까. 그런데 시스템바깥 쪽의 관점에서 보면 시스템 안쪽의 관점만 있는 사람은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삶이 무의미하다. 

 

이 이야기를 두 개의 관점은 서로 돕는 관계이며 우리는 두개 모두가 필요하다라는 말로 끝내는 것은 지나치게 무책임하다.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그냥 살아야 한다. 다만 우리의 삶이 궁지에 몰릴 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시스템 안쪽의 관점에 매몰되어져서 탈출할 수 없는 패러다임에 빠져 있다면, 삶이 감옥같다면 우리는 우선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해 깊게 의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깊게 의심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바깥쪽의 관점에 이야기가 도움이 될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만약 서둘러 성장하고 서둘러 새로운 것을 보는 것에만 눈이 팔려서 인생이 피곤하고 뿌리가 없는 것같다면 시스템 안쪽의 관점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깊이는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서둘러 정신없이 뛰어다닌 것은 아닐까. 변화에 대한 강박에만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주저앉아서 자기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여유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성급하게 굴지 않고 사리판단을 너그럽게 하는 상태라고 나온다. 여유는 본래 노자 15장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데 길을 건너면서 망설이고 조심스럽게 건너는 모습을 말한다. 여유가 없으면 서로 다른 생각들은 서로에게 보이지가 않는다. 물론 여유는 쉽지 않다. 이것이 쉬운 것같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저런 철학들이 있겠는가.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기 여유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은 더 어려운 것같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꼭 가져야 할 것이다.  여유가 없을 때 우리가 언젠가 뒤를 돌아보면 그때 미쳤던 것아냐라는 말을 하게 될 일을 지금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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