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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6. 11. 5.

%넷플릭스는 이 영화가 23년 1월 31까지만 볼 수 있는 영화로 공지했습니다. 

16.11.5

전인환 감독의 다큐 무현 두도시 이야기를 봤다. 이 다큐는 기본적으로는 노무현과 백무현 두 사람의 과거 선거운동들 자료를 교차 편집하고 그 사이에 팟캐스트 이이제이의 진행진이나 노무현의 사진사등 몇몇 사람들의 인터뷰나 대화를 집어 넣은 형식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영화가 순수히 영화의 완성도로 봐서는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라고 느꼈다. 만약 10년이나 15년쯤 뒤에 이 다큐를 본다면 그때는 그때나름의 느낌이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을까. 특히 노무현과 단순비교되기 어려운 백무현이라는 인물은 서로 교차편집되어 나열되기에 부족함이 있어 보였다. 이름이 같다는 것을 제외하고 백무현의 그것이 노무현에게 연결되는데 있어서 조금은 무리한 면이 있게 느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잘봤다. 아내와 함께 봤는데 아내의 지인은 가서 보면 울 것같아서 못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도 사실 그렇게 느꼈다. 가서 보면 울 것같았다. 그리고 역시 가서 보고 울었다. 화면속의 인물들이 울 때 나도 울었다. 노무현이 고생하고 무시당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이 슬펐고 나중에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가를 알았기에 슬펐다. 노무현이 어린 아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보는 것이 특히 슬펐는데 거기에는 어쩔 수 없는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벽이 말이다. 그 벽은 물론 알고 있는 지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라기 보다는 문화의 벽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고 상식의 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속에서 눈물로 노무현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과연 노무현이란 무엇이었을까하는 질문과 자꾸 부딪힌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를 보는 가장 큰 미덕인 것같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노무현이란 인간 혹은 현상 혹은 사상은 뭐였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눈물로 추억하는 사람인데도 노무현이 무엇인지는 도대체 분명치가 않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상식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끝이 나거나 그냥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으로 노무현을 기억하거나 하는 식이다. 심지어 노무현이라는 이름에 대단한 걸 가져다 붙이지 말자라는 주장에서 그는 이상주의자였다는 말까지 명백히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이상주의자란 흔히 현실을 모르는 사람을 지칭할 때 하는 말이 아닌가. 

 

나는 노무현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사실은 그만큼 노무현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몇만명 앞에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능력을 가졌던 지도자. 뭐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이야기하고 기억하기는 쉽다. 반면에 노무현은 그런 식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노무현이 누구고 무엇인지는 상당부분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나 일반 책 안에 있다. 하지만 책속의 세계에서는 노무현이란 사상은 그저 상식처럼 배경에 있는 단순한 것들에 가까워서 때로 알아보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책안에는 죄없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써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억울하게 감옥가는 사람이나 해고 당하는 사람, 갑질을 당하는 사람, 차별을 받는 사람, 법을 어기는 사람, 여성으로 태어나 생리대 살 돈이 없어서 곤란해 하는 아이에게서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노무현은 우리 상식대로 삽시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의 상식은 책속의 상식이지만 말이다. 

 

현실 세계속의 한국에서는 몰상식이 상식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지지자조차 그를 이상주의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현실론이란 비겁하고 추하며 무지하고 심지어 악하기조차한 인간들으로 채워진 세상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과 그의 상식은 다르다는 것이 그를 이상주의자라고 부르게 된 이유일 것이다. 영화속의 노무현도 사실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대충 시류에 맞춰사는 거, 그게 나라냐고 그는 외치고 있다. 그걸 바꾸자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책속의 상식이라는 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 그중에서도 서구가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만들어 낸 합리주의, 자유주의를 바탕에 주로 깔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지금의 세계는 서구의 문명이 세계로 퍼지고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만들어 진 측면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같은 것만 서구가 앞섰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헌법같은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서구의 것을 베낀 것에 가깝다. 

 

책바깥의 상식도 당연한 것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처럼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 전부터 이 우주에서 변하지 않고 있어온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라는 땅위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이 쓴 시간속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인간을 말할 때 인간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것은 쉽사리 할 말이 아니다. 인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여러가지로 변할 수 있는 존재다. 

 

게다가 세상 사람이 다 같은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들이 착하고 헌신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이 악하고 사기만 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이 만나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소통속에서 사람들은 또다르게 행동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현실의 세계란 이렇다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어떤 선언도 모두 진실의 한 측면일 뿐이지 변할 수 없고 정확한 현실인식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세상에 대한 현실론도 하나의 주장, 하나의 문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속의 상식이 책바깥의 상식과 충돌하는 것은 어떤 이상주의가 진짜 현실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관념과 또하나의 관념, 하나의 주장과 또하나의 주장, 하나의 문화와 또하나의 문화가 충돌하는 것이다. 책 안이든 바깥이든 인터넷 안이든 바깥이든, 재벌 가문 안이든 바깥이든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인간이 만들고 선택한 관념이고 문화다.

 

노무현이 누구인가는 바로 이런 전망속에서 파악되어야 하고 그의 좌절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는 합리주의와 자유주의를 믿고 살았고 그걸 믿지 않는 다수의 대중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합리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말과 논리의 힘을 믿으며 인간의 평등을 믿는다. 그리고 그게 우리 헌법에 써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수의 시민들은 말은 어떻게 할지라도 그걸 믿지 않는다. 고용인을 하인과 구분하지 못해서 각종 갑질이 난무한다. 상사의 부인이 부하의 부인을 하대하거나 집안일을 돕게 하는 것은 자유주의안의 평등이념과 절대적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안에서 인간은 어떤 직업인이기전에 그냥 하나의 인간이며 다른 사람과 평등하다. 그러니까 직업적 이유로 거래를 하고 고용을 할 수는 있지만 그런 거래와 고용의 틀 바깥으로 가면 대통령이든 대기업총수든 노숙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 오히려 노무현이 누구인지 말하기 쉽지 않다. 그건 마치 물안에 앉아서 물이 뭔지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래서 상식적인 세상을 만들자고 말한다. 우리는 대단한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노무현이 대단한게 아니다. 그냥 최소한의 상식이 지켜지는 세상에 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수의 시민들이 박근혜를 뽑을 때 그들은 그걸 믿지 않았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뭔가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받고 수많은 테스트를 거친 다른 대권주자들과 나란히 설뿐만 아니라 제대로 비교 검증도 받지 않는다. 토론회 따위는 무시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다수의 시민들은 말과 논리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인지 믿기 힘들정도로 일관성이 없다. 이명박이나 박근혜 정권에서 부패나 부실정책으로 몇천억 몇조 아니 몇백조가 사라진다는 말을 들어도 그저 담담하다. 그들은 언론이 엄청나게 때려댄 덕분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대가 얼마나 부패가 적고 투명한 시대였던가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노무현과 나란히 놓곤 한다. 

 

나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 있었던 검사와의 대화를 잊지 못한다. 그토록이나 무례할 정도로 당당했던 검사들이 지금도 있다면 그들은 애써 국민들이 대통령을 수사하라고 하지 않아도 그 비리를 일찌감치 파헤쳤을 것이고 법적인 기소가 불가능했다면 언론에 알리기라도 할 것이다. 그들 역시 합리주의적 사고의 기본인 일관성의 유지라는 점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노무현은 시스템을 강조했다. 판사는 재판을 하고 검사는 기소를 하고 경찰은 범인을 잡는 일만 하는 사회 말이다. 식품 안전은 담당공무원이 책임지고 의사는 자신의 전문가적인 지식을 전문가의 권위를 가지고 행사하는 사회말이다. 그 모든 것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동안 무너졌다. 사법부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식품안전이나 병역은 대충 대충하다보니 구멍이 뚫린다. 전문가인 의사는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노인이 병사했다고 말한다. 수많은 다른 전문가가 부정해도 그 의사의 주장에 따라 백남기씨는 병사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은 물론 부패때문이기도 하고 무능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노무현이나 김대중 시절의 범죄나 악과 동등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착각이다. 왕조속에서도 충신이 있고 간신이 있다. 공화국에도 강직한 공무원이 있는가 하면 부패한 자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을 같은것으로 놓고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근원을 숨기는 것이다. 

 

문제는 문화와 정신의 차이다. 이것은 현대와 전근대의 싸움이다. 공사 구분이 없고,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 지금의 사회를 고정밀 기계로 말한다면 사회가 소달구지같았던 시대의 망령은 아직도 한반도를 채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사구분을 못하는 것은 대통령이 뭔지 몰라서 그렇다.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 여왕이나 공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각료에게 우리 꼭 대면하고 보고 받아야 하냐고 묻는 다는 것은 훗날 길이 길이 기록될 희극적 발언일 것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대통령의 담화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일국의 대통령이란 설사 형장에 끌려간다고 해도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부인 할 것은 부인하는 태도로 시스템의 최종 수호자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아이가 어른에게 애교떨고 간청하듯이 '아니 나 힘들단 말이야'같은 투정식의 이야기를 할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 9분간의 대화를 분해해 보면 정확한 의미가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있는 것은 정서적 메세지 뿐이다. 아직도 우리가 봉건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지지자들에게 왕이 눈물을 흘리다니 얼마나 망극한 일인가 같은 메세지를 보낸 것만 있을 뿐이다. 그럼 외국과 협상하는 자리에 가서도 그럴 것인가. 일본이나 미국이나 중국지도자와 만나서 내용도 없는 말이나 늘어놓다가 제가 여자이고 어릴 때부터 외롭게 크다보니 일이 힘들다고 간청하면서 잘 봐달라고 할 것인가? 그러면 그들은 봐줄까? 

 

물론 노무현이 인간적이고 실용주의적 인간이라는 것은 노무현을 기억해야 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점이다. 우리는 정확히 규율을 지키고 논리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노무현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젊어서 이데올로기를 듣고 큰게 아니라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법률가를 하다가 사회서적을 읽은 사람이라 많은 사회적 경험위에 이데올로기를 쌓아올렸다. 그런 사람은 드물다. 

 

이런 노무현도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열과 마찰은 기본적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서 생기고 있다. 언젠가 우리는 무현 두도시 이야기 같은 영화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올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를 보면서 노무현을 추억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그날이란 바로 봉건시대의 망령이 끝장나서 책속이나 이 나라의 일부 시민들의 마음속에만 있는 상식이 너무 상식적인 때가 되는 날이다. 자유 민주주의 따위는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도 상식으로 통하는 시대다. 

 

그러나 그런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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