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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박열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7. 6. 29.

오늘은 이준익감독의 박열을 봤다. 이 영화에서는 이제훈이 주인공인 박열을 연기했고 최희서가 박열의 아내이자 동료인 일본인 가네코를 연기했다. 내가 본 영화중 이제훈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였고 박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제목이 적어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최희서의 역할도 중요한 영화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재미있었고 의미있는 영화로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오락활극영화는 아니지만 잔잔한 코믹요소가 있고 생각할 거리도 남겨주는 영화지만 지나치게 무겁지 않다. 



 


박열은 동거하던 가네코와 함께 황태자 암살모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았던 사람이다. 이 재판은 나름의 역사가 있다. 일단 그 직접적 기원은 관동 대지진에서부터 시작한다. 관동지역에서 큰 지진이 나서 10만명이 사망하는 피해가 생긴 것이다. 보다 최근에 일어났던 일본의 311대지진때도 그랬지만 이런 참사가 벌어지면 대개 정부는 잘못된 대처에 대해서 비판을 받게 되기 쉽다. 당시의 일본정부는 이러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참사로 인한 고통을 조선인의 탓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조선인들을 개인적으로 학살하고 돌아다니는 자경단의 활동을 방관한 것이다. 이때문에 조선인 6천명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박열의 재판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불손한 조선인을 찾아서 본보기로 사형을 시켜보겠다는 일본정부의 의도로 벌어진 조작사건이었다. 그리고 박열은 이러한 조작에 기반한 재판을 오히려 거꾸로 일본정부의 모순을 폭로하고 일본국민과 천황의 반성을 촉구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일제시대에 대한 생각과 함께 우리 시대에 대한 생각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제국주의 일본의 행동은 너무나도 좌파니 종북이니 빨갱이니하는 말을 남발하면서 진보적 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의 행동과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행동이 생겨나는 근본적 기제는 똑같다. 그들은 무능하고 부패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왜 이 세상이 이모양 이꼴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이런 책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두가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는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분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화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들이 정해진 과정에 따라 참여하고 결정을 내리는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중앙정부에 책임을 묻는 것에 한계가 있다. 왜냐면 중앙정부가 모든 결정을 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황을 신처럼 생각하는 제국주의 일본이나 비슷하게 박정희를 가르켜 반인반신운운하던 독재정권의 옹호자들이 지지하던 이 나라의 보수 정치세력은 권력을 분점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는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다. 천황이 신이라서 모든 결정을 천황이 독단적으로 내릴 수 있고 죽으라면 죽어야 한다면 나라에 가뭄이 들건, 지진이 나건 그로 인한 피해도 천황의 책임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책임에서 벗어나는 두번째 방법이 바로 희생양으로서의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중앙권력은 현명하며 성실하게 모든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데 세상에는 이 악이 있다. 바로 이들 때문에 이 세상이 이 모양이꼴이라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택했던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고 이 악으로 지목되어서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 바로 조선인들이었다. 지진이 나니까 화난 일본인들이 6천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나라 그리고 그것을 방관하는 정부란 요즘 기준으로는 상상 불가다. 이러니 일제가 결국 전쟁끝에 망하는 것은 뻔한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제시대를 거쳐서 독립한 우리 대한민국에서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은 제쳐두고 박정희만 봐도 바로 일본 육사에서 훈련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정치를 배운 조선인이 조선인이 당했던 것을 다시 똑같이 동족에게 행했던 것은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반공정부는 끊임없이 간첩과 종북을 찾아냈다. 노무현 대통령때문에 유명해진 부림사건처럼 없으면 빨갱이를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항상 북의 간첩이 넘치고 있으며 이들의 활동에 감화된 사람들이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사회가 왜 이 모양이꼴이며 왜 한국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없는가를, 왜 경제가 이모양인가를 설명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주민주화운동도 간첩에 속아넘어간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였고, 김대중은 북의 지령을 받는 빨갱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해야 했다. 지금도 미국을 방문하는 문재인대통령을 가르켜 북의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현수막을 들고 다니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사람은 미국을 사랑하니 트럼프대통령은 북의 스파이인 문재인을 만나지 말라는 메세지를 영어로 써서는 미국에서 들고 돌아다닌다. 이 정도면 거의 미친 수준이다.



제국주의 일본도 마찬가지로 미쳐있었다. 학살을 방관해서 일이 점점 커지니까 그걸 다시 다른 문제로 덮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거짓말의 크기와 심각도가 점점 더 올라가는 것이다. 사실 박열은 실제로 폭탄을 손에 넣은 적이 있는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고 그걸 황태자에게 던지려고 했는가도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일제는 무리한 재판을 밀어부치고 사형을 언도하려고 한다. 


이 것은 마치 일제가 스스로 자살을 하려고 하는 모습같다. 그들은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 박열이나 가네코를 죽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문제는 일제가 망상에 젖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박열을 죽이고자 한게 아니라 그들이 능력있고 윤리적이라는 망상적인 그림을 억지로 유지시키고 싶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나는 옷을 입고 있다고 모든 사람을 최면에 걸려고 하는 것처럼 무리한 일을 계속한다. 결국은 그 속임수가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제국주의 일본같은 거대한 집단이 박열같은 20대의 한 청년에게 희롱당하는 문제가 생긴다.


역사는 반복된다.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이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유는 그 뿌리를 파헤쳐 보면 결국 박근혜가 무능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숨기려고 했던 것에서 시작된다. 그들도 일제처럼 가짜 그림을 그려놓고 박근혜라는 영웅을 만들려고 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은 박근혜도 벌거벗은 임금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계속 거짓 그림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다가보니 당연히 소통은 없고 폐쇄적이기만 하다. 그리고 그 그림이 무너지는 순간 허무하게 정권조차 몰락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쩌면 이렇게 바보같은 일을 반세기의 시간을 두고 반복할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거짓된 그림에 속지 않는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도 오만일 것이다. 박열은 스스로를 아니키스트라고 부르는 자유인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었기에 거짓과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 나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거짓된 그림에 빠져서 우스꽝스럽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봐야 할 이유가 있는 셈이다. 


영화전체에서 박열은 자유로운 발상과 행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들어난다. 박열이 스스로를 개새끼라고 부르는 시를 쓴 것도 그렇다. 이것은 스스로를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자 하는 제약을 스스로 벗어던지는 모습이 아닐까? 박열과 가네코와의 사랑이야기도 그렇다. 거의 100년 전의 일인데도 박열과 가네코는 감옥에 가기 전에는 동거만을 하면서 남녀평등을 지키면서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자고 한다. 나중에 시신수습을 위해서는 가족관계가 필요하다고 해서 혼인신고를 했을 뿐이다. 두 사람이 재판을 하기 전에 구치소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요즘의 젊은이 이상의 파격이 있다. 박열은 가네코의 유방을 잡고서 사진을 찍는다. 100년후의 이제훈이 재현한 모습보다 박열의 원래 사진이 내가 보기엔 더 노골적이고 불량스러워 보인다. 이것은 마치 세상을 향해 뭐 문제있냐고 도발하고 있는 것같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우리는 어떤 부자유를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거짓된 그림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거짓말을 하고 위선적 행동을 하고 있을까? 줄거리를 생각하면 영화에서는 유독 박열과 가네코가 웃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그들의 웃는 얼굴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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