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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스승과 교육에 대한 영화 디테치먼트를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7. 9. 15.

이 세상에는 스승과 교육에 대한 영화가 많이 있다. 홀랜드 오퍼스, 라자르 선생님, 뮤직 오브 하트, 코치 카터, 모나리자 스마일 같은 영화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쪽 분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언제나 마음은 태양 (to sir with love, 1967)과 고독한 스승(lean on me, 1989) 그리고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같은 영화들일 것이다. 




세상에 스승과 교육에 대한 영화가 많은 것은 교육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교육영화의 무대는 당연히 학교다. 그리고 그 학교를 이끄는 선생님은 대개 아이들에게 줄 메세지가 있다. 이것은 이중적으로 희망적인데 우선 첫째로는 교육으로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고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다. 두번째로 교육영화는 계몽주의적으로 희망적이다. 교육 영화속의 전체 세상인 학교라는 장소가 뛰어난 리더이자 지식인인 선생님의 메세지로 계몽되어 바뀔 수 있듯이  학교 바깥의 사회도 마찬가지로 계몽되어 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도 저런 선생님이나 리더가 있었으면 한다는 말을 한다. 학교에도 그리고 사회에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승에 대한 영화는 계몽주의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다. 진리로 행하는 계몽은 세상을 바꾼다. 우리는 단지 올바른 선생님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이번에 본 디테치먼트(detachment, 2011)는 나에게는 캐딜락 레코드와 피아니스트로 친숙해진 애드리언 브로디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다. 참고로 말하자면 디테치먼트는 분리, 초연, 무관심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를 감독한 토니 케이가 감독한 영화이며 상파울로 영화제를 비롯한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디테치먼트는 문제가 많은 학교의 임시교사인 헨리가 목격한 절망적인 교육현장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디테치먼트는 앞에서 소개한 세개의 영화에 나란히 설만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시간이 흘러서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 마치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세상의 무엇이 바뀌지 않았을까? 그것은 여전히 학교는 학생을 그저 가둬두는 감옥이고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영화들은 다 좌절한 학생들을 그리고 있다. 디테치먼트가 앞에서 소개한 영화들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이 영화에서는 학생들만 절망하고 있는게 아니라 교사도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영화들에서는 주인공인 교사 이외의 다른 어른들은 마치 감정없는 로보트처럼 그려진다. 주인공교사이건 동료교사이건 모두가 학생에 비하면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다. 즉 그들은 그것이 옳은 답이건 틀린 답이건 어떤 답을 알고 있고 그것을 주장한다.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교사조차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세상은 이런 거라고 말하는 식이며 그들이 괴롭게 산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연약한 학생들에 비하면 바위같이 단단한 어른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디테치먼트에서는 많은 교사들이 오히려 학생들 이상으로 상처입고 정신적 붕괴의 직전에 있다. 영화는 이들을 우울증에 걸리고, 가정은 붕괴직전이며, 심지어 스트레스로 죽을 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그린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을 도와야겠다는 선의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그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오늘날의 사회는 사회 전체가 가지는 모순을 학교로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학교바깥에서 먼저 이뤄진다. 사회와 부모가 학생들을 어떻게 취급하며 그들에게 어떤 미래를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 학교바깥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행동할까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도 가정도 붕괴한 나라에서 학생들을 학교라는 테두리에 밀어넣고 그 학생들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모두 교사들의 문제로 말하곤 한다. 


왜 교사들은 더 잘 가르치지 못하고 왜 교사는 더 잘 학생들을 통제할 수 없냐고 우리가 교사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냥 그게 그들의 직업이라고 말하면 된다. 불만인 것은 사회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교사는 종종 사회가 보낸 교도소의 간수처럼 보여진다. 교사는 학생의 친구이며 협력자가 되고 싶어할지 모르지만 사회의 배신에 분노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학생들을 속이는 어른들의 대표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사실은 문명적 사회적 문제인것을 우리는 그저 교육의 문제라는 말로 축소하고 만다. 문제는 교사선발이나 학생선발에 있거나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평가하는 데 있다. 그것만 고치면 세상은 잘 돌아갈텐데 저 무능한 교사들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수능 수학시험의 3번째 문제가 잘못된 것이 혹은 상대평가나 절대평가의 문제가 한국이 이 모양 이꼴인 이유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것은 사회적 무능을 교사의 무능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물론 그 목적은 분명하다.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사회전체에 있지 않다. 그저 무능한 교사가 문제다. 


이런 현실에 교사들은 상처입고 좌절한다. 결국 교장은 부동산 가격이나 걱정하는 이사회에 의해서 해임되고 학생들을 돕고자 하는 많은 선생님들은 부질없고 소모적인 싸움속에서 교직을 포기하기  직전이다.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선생님은 학생들이 무엇을 배워야 할지 알고 있고 비록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싸우다가 쓰러지지만 디테치먼트에 나오는 교사는 어디까지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없는 유한한 한 명의 인간인 자신을 계속 느끼면서 괴로워 하고 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고전적 교육영화들은 세계 경제가 팽창하던 시절에 나왔고 미국이 슈퍼파워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때 나왔다. 지금은 미국도 한국도 얌전히 대학나오면 앞길이 마구 열리는 시대는 아니다. 21세기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앞으로의 발전이 무궁할거라고 확신에 차서 말하기 어렵다. 전과는 달리 부모들보다 아이들이 더 못사는 시대가 다가올 것같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헨리는 여전히 앞에서 말한 영화들에 나오는 슈퍼 선생님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솔직히 다가가고 말 몇마디로 아이들의 마음을 산다. 그러나 현실의 불량아나 창녀들이 과연 그렇게 쉽게 마음을 열고 선생님에게 동화될 수 있을까? 그들의 불신과 상처의 깊이가 고작 그정도 일까? 그래서 영화는 마지막까지 대부분 우울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헨리는 다시 희망의 끈을 잡지만 사실 이걸로 모든게 잘 될꺼야라고 낭만적인 메세지를 던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만 주인공이 싸움을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상징정도일 뿐이다. 어쩌면 영화가 너무 우울해지니 제작사에서 넣자고 해서 넣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영화를 되돌아 보면 이 영화는 앞에서 말한 계몽주의에 저항하고 있다. 결국 슈퍼맨 선생님도 세상을 다 밝힐 지도자도 없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좌절한 개인에 불과하며 그렇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어서 좌절한 대중을 구원해 줄꺼라는 메세지는 사기다. 우리는 그런 낭만적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영화는 마치 다큐처럼 인물을 클로즈업해서 찍거나 비참한 장면을 보여주곤 한다. 그것은 꿈깨고 현실을 보라는 감독의 목소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깨어나서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 이 영화는 거기까지 말해주는 친절함은 없다. 그러나 계몽주의 다음이 무엇인가는 이미 상당히 분명하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 서는 것이다. 세상이 끔찍하고 앞날이 암담해도 남이 주는 환상의 메세지가 아니라 내 관점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작고 유한한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무한하고 절대적인 진리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안전한 존재가 되는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일단 그것들을 인정하고 나면 또다른 희망의 메세지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작고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지금 미래가 절대적으로 절망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완전히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절망은 완벽한 오만이기도 하다. 우리의 한계와 무지가 또한 우리의 절망에 대한 우리의 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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