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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장혜영의 세상을 바꾸는 십오분 강연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8. 1. 27.

18.1.17

오늘은 장혜영이라는 분의 강연을 감명깊게 봤습니다. 그래서 그 감상을 몇자 적어둘까 합니다. 

 

장혜영이라는 분의 동생은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오랜동안 산속에 있는 고립된 시설에 있었죠. 그러다가 최근에 장혜영씨는 동생을 사회로 데리고 나옵니다. 동생과 더불어 살기 위함입니다. 이런 장혜영씨의 행동에 대해서 장한 행동이지만 무모하다고 말할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사리 무모하다던가 그저 장한 행동이라던가하고 말하기 전에 그런 행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입니다. 

 

장혜영씨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은 단순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보다 보편적인 차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발달장애인은 우리와 살 수 없어, 그들을 위해서도 그들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에서 사는 것이 좋지'라고 말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차별받고 격리당할 논리를 수긍하고 있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한 일이 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분양아파트 쪽을 통과해서 학교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분양아파트쪽의 사람들이 벽을 만든 일이었습니다. 그때문에 어린 초등학생들의 등교 거리가 훨씬 늘어나게 되었죠. 그런데도 분양아파트의 사람들은 임대아파트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기를 원했습니다. 

 

분양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논리와 생각은 사실상 장애인은 격리되어 따로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분양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 우리는 우리끼리 살고 싶을 뿐이야. 우리는 그럴 권리가 있지 않아?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단히 부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분양아파트라고 해도 한국사회에서 그다지 부자로 행세할 곳에 있는 분양아파트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부자라면 다시 그 분양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격리시키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격리당하고 차별당할 때 분해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격리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위선을 억누르고 현실을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는 두가지를 모두 다 인정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장애인을 격리하고 싶은 이유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이나 직급이 낮은 사람들을 격리하고 싶은 이유는 그들이 우리 옆에 있을 때 우리가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길가다가 불쌍한 거지를 보면 우리는 불쌍한 생각도 하지만 동시에 되도록 그런 거지를 안보고 살았으면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 연민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개념의 보편성에서 나옵니다. 즉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당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다른 인간이 굶주리고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왜 내 것을 나눠줘야 하는가하는 생각도 들고, 왜 저 사람은 나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가하는 생각도 들기 마련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선없는 현실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근슬쩍 그것은 나의 권리라던가 그것이 그들에게도 더 좋은 일이라는 핑게를 만들어 격리의 벽을 쌓습니다. 그들을 안보이는 곳에 치워버리려고 합니다. 자신이 격리당하고 차별당하는 것은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남들에게 그런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벽의 너머에 대해 잊어버리는 것이죠. 그것이 현실이라고 자꾸 말하면서 말입니다. 

 

둘째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을 모두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개인의 힘은 그 한계가 분명합니다. 깊은 병을 가진 환자를 간호하는 사람은 그것을 금방 깨닫습니다. 가족으로서의 의무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애정으로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같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자신은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금새 부모나 배우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겨우 이것밖에 안되나 싶은 생각에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나이가 좀 들어서 이런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들은 그래서 장혜영씨 같은 사람의 행동을 보면 무모하다고 단언하기 쉽습니다. 일의 어려움을 너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저로서는 다만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고 극단적인 사고에 빠지지는 말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쪽 극단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과대망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건 대개 자기 주변에 높은 벽을 쌓아서 진짜로 자기와 다른 사람은 전혀 접근도 못하게 해놓은 사람이 그 좁은 우물같은 세상속에서 나는 민주적이고 차별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높디 높은 성의 아래에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그 성안에서는 귀족들이 서로에게 서로의 관대함을 칭찬하며 우리는 차별을 모르는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정육점에서 사온 스테이크로 잔치를 벌이는 사람이 자신은 벌레도 죽이지 못한다면서 자신은 생명을 아주 존귀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반대로 다른 극단에서는 우리는 쉽게 우리가 악마라고 인정해 버립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악마니까 차별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빼앗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능하며 사악하니까, 본래 그런 사람이니까 남의 아픔에는 눈을 감는게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위선자라던가 현실을 모르는 인간이라는 비판을 가합니다. 

 

이 두 극단을 요약하는 한가지 방법은 우리는 타인과의 거리를 0으로하거나 무한대로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타인과 내가 서로 전혀 구분이 없는 운명공동체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아니면 타인과 전혀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보편적 주거가 아파트인 한국은 이런 극단적 사고가 만들어 낸 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파트는 타인과 접촉을 최소화합니다. 집성촌에 모여살고 친족관계를 강조하던 한국인은 불과 몇세대만에 모두 타인을 기피하는 집으로 옮겨갑니다. 우리는 타인과 격리되어 살고 싶어서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은 본래 몇대의 가족이 모여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요즘은 윗세대와 동거한다는 생각은 모두에게 공포를 주는 것같습니다. 남자가 장남이라서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하는 것은 빵점짜리 결혼상대라는 뜻일 뿐더러 나이든 부모들도 자식들과 동거하며 자식들에게 휘둘리고 착취당하며 사는 것을 끔찍 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가족들끼리도 빨리 헤어지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관계가 전혀 없거나 아니면 무한 책임입니다. 관계와 책임이 무한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극단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더불어 사는 법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더불어 산다는 것은 결코 무한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며 소통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0이나 무한대가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화하고 소통하다보면 우리는 우리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와 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가능성을 0으로 해버립니다. 더불어 사는 삶같은 이야기는 자선의 개념으로 접근합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우리가 남이가하는 식으로 무한 책임 공동체를 강조하거나 아니면 아예 벽을 쌓아서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벽을 쌓아서 잊는 것도 나쁘지만 회사나 학교나 가족들이 벽을 쌓고는 그 안에서 우리는 남이 아니다라며 패거리 정신을 강조하고 서로 서로 윤리와 법을 넘어 담합하고 봐주는 문화도 그 못지 않게 나쁩니다. 한국사람들은 참 담백한 만남을 가지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누군가와 만나서 밥이라도 한번 먹으면 왠지 공사가 무너질 것같은 관계가 성립합니다. 요즘은 좀 덜한 것같습니다만 전에는 그날 인사하고 좀 마음에 든다고 당장 형동생하면서 니꺼 내꺼없이 지내자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행동을 호쾌한 것으로 칭찬하기도 했죠. 

 

그런데 차별과 지나친 담합은 같은 사고의 양쪽 얼굴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장애인들을 어딘가 보이지 않는 시설들에 격리하고 잊어버리려고 하는 한국을 만들어 내는 원인입니다. 인간관계가 우리편이면 무조건 방어해주는 무한책임의 관계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대놓고 차별하는 완전한 타인이라는 둘중의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혜영씨같은 사람의 시도를 단순히 무모한 짓이거나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단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벽을 넘어 소통을 촉진시키려고 하는 노력과 시도로 보아야 합니다. 그녀는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으며 인간이 누구나 죽듯이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죽는다고 삶이 의미 없는게 아니듯 시도와 노력은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꼭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온갖 갑질에 차별에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여러가지 속박속에서 괴로워하는 현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소수자의 문제에 우리가 고개를 돌려서는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어떤 문맥에서는 소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수자가 괴로운 세상은 결국 모두가 괴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발달장애인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모두 어떤 의미에서 어떤 문맥에서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육체의 장애보다 더 심한 장애는 세상에 많습니다. 장애인들이 살기 힘든 세상은 모두가 살기힘든 세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쉽게 장벽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안됐다고 해서 오늘도 안된다고는 단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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