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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동주와 정치

by 격암(강국진) 2017. 5. 9.

오늘은 대선 날이다. 날도 날이거니와 나는 어제 아내와 함께 영화 동주를 보면서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 또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본패망 직전의 시대를 살았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논쟁에서 느껴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화 속에서 동주는 몽규와 문학에 대한 논쟁을 한다. 몽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글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시 쓰는 동주를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동주를 통해서 밖에 송몽규를 모르거니와 실재의 송몽규가 어떠했는지를 제대로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영화속의 계몽주의자 몽규에게 조언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치나 정의란 그렇게 보이기 쉽지만 결코 지식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람에 대한 것이다. 즉 감정을 가지고 정의감을 가진 인간이 세상에 있고 그런 인간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떤 진리나 올바른 정보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둘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진리나 정보를 퍼뜨리려고 하는 이유가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몽주의자들은 너무 쉽게 자신들의 진리를 믿고 그것 이외의 것에 대해 오히려 더욱 더 장님이 된다. 계몽주의자들은 가장 아름다운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권력투쟁을 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계몽의 기본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준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같지 않다. 계몽을 하는 사람과 계몽을 당하는 사람은 같지 않다. 제 아무리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어떤 의미에서 계몽을 시키는 사람은 계몽을 당하는 사람에게 완벽한 존재로 서게 된다. 그것은 마치 그림을 배우는 사람이 어떤 그림을 베끼면서 연습을 하는 것과 같은 상태다. 베끼는 동안은 올바른 그림이란 바로 베낌을 당하고 있는 그림이 된다. 올바름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완벽한 존재가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누구도 마이클 잭슨을 모창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이클 잭슨을 넘어설 수 없다. 열린 마음으로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은 마음속에서 전도를 하겠다는 욕망에 차있는 사람은 타인들에게 정말 제대로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계몽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성공했을 때 권력자가 되기 쉽다. 아니 되지 않기가 어렵다. 계몽의 과정이 결국 어떤 조직과 시스템을 만들고 그 조직과 시스템은 계몽을 추진한 사람이 죽어서 없어지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을 중심핵으로 해서 굴러가기 때문에 설사 본인이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해도 조직의 논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조직은 그렇게 하려는 사람을 무책임하다고 공격한다. 그건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문학의 한계이자 장점은 그것이 불확실한데가 있다는 점에 있다. 때문에 어떤 독자는 심지어 작가보다 어떤 작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해서 건조한 논리와 개념으로 써내려간 논설문이나 사회과학 이론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지키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론적으로는 사실 시가 아니라 소설도 그리고 소설이 아니라 논설문이나 사회과학적 논문도 하나의 시처럼 독자가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포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렵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즐기기 위해서 시청자는 감독이나 작가의 역량을 뛰어넘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비록 감독이나 작가보다 매우 아는 것이 없고 경험이 부족할 지라도 여전히 그들이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 삶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다. 누구도 한 사람이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다 알 수가 없다. 최고의 석학도 떡볶기 팔기에 대해서는 떡볶기 장사보다 훨씬 못한 면이 있다. 


하지만 어떤 철학책이나 사회과학 논문에 있어서 비슷한 일은 훨씬 더 어렵다. 그들은 보다 견고하고 높이 쌓아올려진 개념의 탑속에서 사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고 나름의 장점이 크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점에서 더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교통신호를 모르는 사람은 운전을 할 수 없다. 무지한 숲속의 원주민이 와서 자동차를 몰려고 한다면 대참사가 날 것이다. 그러나 달리기나 삶에 대해 과연 교통신호의 체계 안에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반드시 숲에서 사는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더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정치는 몇몇 친구들이 만든 친목계 내부에도 있고 작은 골목 내부에도 있는가 하면 대한민국같은 거대한 집단에서도 있다. 그리고 그 집단이 거대해 지면 질 수록 얇팍한 계몽주의는 실패한다. 왜냐면 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그 사람이 생각하고 경험한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 사람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규칙을 정하면 사람들은 점점 더 숨막혀 하기 때문이다. 작은 친목계나 작은 가정이라면 머리 좋은 리더가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일을 해나가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거대한 사회에서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세상은 그 계몽주의자의 생각과는 다르고 그 다름은 굉장히 큰 댓가를 요구하는 실패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 정치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시선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니까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게 아니다. 인간이 행복해 지니까 옳은 것이다. 정치는 인간에게 숨쉴 곳을 줘야 좋은 정치다. 인간을 키우고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좋은 정치다. 그런데 설사 선의에 가득차 있다고 해도 계몽주의적 발상에 머무는 사람들은 인간을 괴롭히고 구속하지 못해서 야단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구속은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극악한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래서 복잡해지기만한 대학입시를 매우 싫어한다. 더 좋은 입시를 만들기 위해 더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면 만들수록 결과는 나빠진다. 아이들은 이제 더욱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고 좌절하여 우울해진다. 


오늘은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는 날이다. 우리는 블랙리스트 같은 것을 만들거나 매우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으로 행동하는 대통령들을 두차례나 겪었다. 그들은 정부에서 정하면 협의나 타협없이 밀어부치는, 마치 성주에 사드기지 밀어부치고 미국 소고기 수입 밀어부치듯 밀어부치기만 하는 대통령들이었다. 불통 대통령이었다. 


새로운 대통령은 이와는 다르기 바란다. 물론 대화와 타협은 오로지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두가 그럴 자세를 갖춰야 대화와 타협과 신뢰가 가능할 것이다. 오늘 이후부터는 정부와 국민이 함께 그런 것이 가능한 한국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 숨쉬고 살 수 있는, 분노와 답답함 때문에 어지럽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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