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에는 건국이래 최대였으며 어쩌면 금세기 세계 최대의 데모였을 (일본 방송이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촛불집회가 있었다.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참가했는데 거기에서 느낀 몇가지 점들을 써둘까 한다.
그 날은 참 하야하기 좋은 날이었고 데모하기 좋은 날이었다.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와 달리 비도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밤이 되자 촛불의 열기 때문이었는지 가져간 옷을 계속 입기에는 너무 덥다 싶을 정도로 따스했다. 우리는 2시가 좀 넘어서 현장에 도착했는데 광화문 전철역 입구를 나오자 마자 사람들이 이미 광화문앞을 거의 채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제동이 사회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 하나 발언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참 따스했다. 한번은 한 장애인이 발언을 했는데 사실 발음이 분명치 못해서 도무지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그 발언을 끝까지 들었다. 나는 감동했다. 나는 또한 한국 사람들이 참 말을 잘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나는 학회에서 몇백명앞에서 발표를 해 본적이 있는데 그것도 상당히 긴장되고 떨리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이미 수만을 넘어가는 상황에서 말을 하는데도 떠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즉흥연설이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말에 거침이 없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는 세 가지만 이야기하련다. 하나는 그만큼 사람들이 말에 목말랐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말들이 하고 싶은데 하질 못해서 수없이 마음속에서 그 이야기들이 맴돌았을 것이다. 그러니 마이크가 앞에 오자 그렇게 줄줄이 말이 나왔을 것이다. 또하나는 거대한 집회가 이미 동지의식을 만들어 내서 용기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거대한 군중앞에서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말잘하던 사람들중에서도 특히 귀에 들어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오래된 이데올로기나 구호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특히 중요하다. 이데올로기와 분석은 거의 필요없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도 분석이고 도올이 그날 하려고 했던 것도 분석인데 그런 것들은 현장에서는 거의 필요없었으며 특히 낡은 구호와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내밀려고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초라하게 들렸다. 선동적이고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중을 믿고 우리를 믿는 것이다. 그것이 촛불집회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이며 목적이다. 지금은 20세기와는 또 다르다. 우리는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길 수 있다. 내가 다시 확인한 것이고 이 글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5시 반인가에 시작되기로 한 행진은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행진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시청에서 경복궁까지 들어차서 행진이 아니라 그냥 서있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따금씩 박근혜는 하야하라를 외쳤다. 가져간 깔개가 매우 도움이 되었다. 추위는 별거 아니었지만 바닥의 콘크리트는 차가웠다.
나는 10시가 되기 조금 전 이승환의 공연까지 끝나고 나서 일어났다. 아이들도 있었고 다시 판교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돌아가서 전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집회는 흥겨운 축제였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를 같이 부를 때 나는 왠지 눈물이 났다. 정태춘이 정말 오랜만에 부르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는 것도 좋았다. 이승환은 늦게 도착해 여러 노래를 불렀지만 나는 마지막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라는 노래가 가장 좋았다. 마이크와 스피커가 가수에게 미안할 정도로 상황이 안좋았든데도 다들 잘 불렀고 그래서였는지 이승환이 마지막에 다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목이 막히는 것도 나름 감동적이었다.
이런 축제로서의 평화적 집회가 모두의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트위터 같은 곳에서는 놀고 즐기자는 축제가 아니다, 결국 이런다고 박근혜가 무시하면 그만일 것이고 사실 그녀는 이걸 무시할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백만 촛불집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한 치유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권같은 것을 보면 우리는 단순히 박근혜나 최순실에 대한 분노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역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세상에 대해 실망이 든다. 이런 나라 살아야 할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사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의 하나가 한국인인 것이 창피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한국인인게 챙피하면 안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거리로 나가야 했다. 거기에서 멀리 제주에서부터 왔다는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면서 웃고 떠들면서 한국에 대한, 한국인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소수의 폭력단에 의한 구데타가 아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을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 안으로 포섭하여 하나의 망을 건설하는 일이며 어떤 영웅이나 결정적 행위의 힘을 믿기보다는 그 공동체 전체의 힘을 믿는 일이 꼭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만 하면 최순실, 박근혜의 비리가 파헤쳐지고 거리 공연이 준비되고 그것이 여러 통로를 통해 퍼져나가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회를 평화적 축제로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려움을 날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성급한 사람들은 말한다. 좋기는 하지만 이거 다 무시당한다. 그렇지 않다. 당연히 이것은 그저 하루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 특정한 법률을 통과시키거나 특정한 정치인이 당선되면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저 하루 우 몰려가서 함성지르고 끝을 낸다면 대중의 관심이 줄어드는 틈을 타서 제이의 박근혜, 제 이의 최순실이 나타날 것이다. 대중의 관심이 계속 살아있어야 언론도 검찰도 정치인들도 정도를 걸을 것이다.
대중이 의지를 지속적으로 보이면 긴장은 올라가게 되어 있다. 박근혜는 이제 두가지 양극단으로 설명되는 선택들 앞에 서있다. 하나의 극단은 당장 하야하는 것이고 또 하나의 극단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이것은 대중의 관심과 분노에 대한 일종의 도박이다. 어쩌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박근혜가 버티면 대중은 다시 이 일들을 잊어버릴지 모르고 다시 어용 언론과 검찰은 이 일들을 별거 아닌 것으로 묻어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버티는 것에도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집단적으로 행동을 통해 강력하게 표명하는 의지를 그녀가 무시한다면 하루 또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녀와 그녀를 지탱하는 집단 그리고 그 기본 정서에 대한 분노는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대중이 잊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이긴다면 버티면 버틸 수록 그녀와 그 일당이 입을 손해는 더 커진다. 싸움은 점점 더 큰 배팅을 걸고 하는 도박이 되는 것이다.
이미 광화문 거리에만 백만이 모였다. 전국에 모인 사람들을 합치면 당연히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자괴감 시리즈로 대중적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대로 그녀가 버티면 지금 이미 일어나고 있듯이 그 비판과 비웃음은 새누리당을 넘어 박정희 신화에 까지 이를 것이다. 이미 새누리당은 끝났다, 박정희 신화는 그녀에 의해 붕괴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버티면 버틸 수록 그 정도는 훨씬 심해져서 역사책이 바뀔 것이다. 국정교과서를 통해 자기 아버지를 미화하려고 했던 그녀에 의해서 그녀의 아버지가 진정한 친일파였고 독재자였다는 사실이 교과서에서 널리 가르쳐지는 미래가 올 수 있다. 그리고 다시는 새누리당같은 당은 이 땅에 있기 힘들정도로 국민 모두에게 이 일들이 각인될 수 있다.
나는 그 길이 너무 위험하고 소모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까지는 원하지 않지만 만약 그녀가 임기 끝까지 버틴다면 그리고 대중이 그 임기 마지막까지 그 관심을 버리지 않고 버텨서 다음 대선을 맞이 한다면 박근혜와 박정희는 완벽하게 히틀러 수준으로 한국역사에 기록될 것이며 그 부역자 모두에게 그 수준의 처벌이 가해질 것이다. 그 싸움은 적어도 백년은 회자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박근혜와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이정도까지 버티는 것에 대해 차라리 잘됐다고 느끼는 면도 있다. 이만큼 버틴 것만으로도 광장에 백만이 모였지 않은가. 해방이후 최대다. 다시 말해 단군이래 최대다. 이건 분명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박정희가 신화로 남은 것은 그가 총탄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가정해 보자. 만약 이순간 박근혜가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살해당한다면 그것은 그녀 자신에 대한 불행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불행이다. 다시 그녀에 대한 동정론이 살아나면서 새누리당과 박정희 신화는 살아남아 두고 두고 한국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괜히 청와대에 들어가서 국민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그녀의 아버지 신화를 스스로의 손으로 끝장내고 있는 것이다.
백만이 모여도 돌을 던지지 않는 국민은 절대 잊지 않을 국민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섯부른 이데올로기나 소집단의 정체성 표명은 어느 정도까지는 필요악이겠지만 도움이 안된다. 우리는 광장에 개인으로 모인다. 모두가 이 일을 잊지 않을 생각있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출세하고 권력을 잡고 싶어서 광장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기 때문에 선전을 하고 세를 얻고 싶어서 광장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유니폼을 맞춰입고 깃발을 들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한국인일때 무슨 무슨 당, 무슨 무슨 노조에 머무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광장의 정신을 훼손하는 면이 있다. 광장의 정신이란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지만 또한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으로 평등하다.
이데올로기란 결국 그 핵심이 미래에 대한 예측이다. 세상은 이러저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므로 나는 미래에 이러저러할 것을 알고 있으니 이러저러한 전략을 세우자는 것이다. 그 대부분의 전략의 바탕에는 대중에 대한 불신이 있다. 대중이 스스로 정보를 흡수하고 그때 그때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의 던져진 돌멩이처럼 수동적인 존재로 놓고 한 개인이 자신이 가진 정보와 지적 능력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믿음이 있을 수록, 대중이 만들어 내는 망에 대한 힘을 믿을 수록 미래에 대한 설계는 적게 하게 된다. 사실 개인의 예측은 세밀해 지기 시작하면 다 틀린다. 다음주에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아는가. 야당이 지금 대중에게 걸리적 거리는 존재처럼 이따금 느껴지는 이유는 대중은 오히려 성숙하여 차분하게 압력을 넣고 대통령 하야라는 목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머리를 쓰기 때문이다. 미리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잔꾀를 쓰려고 하는데 그 수준이 형편없어서 오히려 대중에게 방해가 된다. 자신들이 국민의 대표라고 너무 진지하게 믿는다. 지금 야당이 여당이랑 합의하면 문제가 끝나는 건가? 야당이 실수하여 면죄부를 날리면 이 나라의 주인인 대중이 나서서 다시 그게 아니라고 보여줘야 하는 식이다.
분석이나 이데올로기가 모두 쓸 모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는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듯이 글을 쓰고 분석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집단을 조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한국인이라는 망에 하나의 입력을 넣는 것뿐이다. 결정은 한국인이라는 공동체가 스스로 할 것이다. 내 생각만이 옳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이 지나치면 바로 박근혜가 된다. 우리는 자기 생각을 가지면서도 대중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 우리의 날개짓이 아니라 대중이 우리를 날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집회가 끝나고 종로3가쪽으로 차없는 거리를 걸어서 광화문을 떠났다. 백만이 모였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어디나 사람이었다. 포장마차도 재료가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이렇게 넓은 길을 이렇게 기분좋게 걸어본 건 처음이었다. 아내는 지나가는 길에 있던 영어학원을 가리키며 여기서 아빠와 엄마가 처음 만났었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다.
일본에서 자란 아이들은 아무래도 일본을 고향으로 느낀다. 한국에 온지 2년이지만 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낯설고 깊은 정이 들기 힘든 곳이다. 더구나 박근혜 사건같은 기괴한 일이 있어서는 너희들은 그래도 한국인이다라고 말하는 아버지로서 미안한 감까지 들었다. 그러나 집회에 같이 참가하고 소리도 지르는 동안 아이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한국에 대해 정을 붙이게 되는 날이 되지 않았나 한다.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나라 애정이 안생긴다. 가능하다면 이민가고 싶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계속 유지한다면 한국인은 승리할 수 있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흉한 얼굴을 치워버릴 수 있다. 백만인 집회속에서 나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나 자신도 많이 치유되는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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