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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추함과 이유를 묻지 않는 지혜

by 격암(강국진) 2016. 11. 26.

박근혜의 추함과 이유를 묻지 않는 지혜

 

우리는 종종 물어야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교육을 받은 탓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며 그것은 질문을 억압한다고 배웠다. 따라서 이것을 논리적으로 부당하게 뒤집어 질문을 억압하는 행위는 나쁜 것이며 우리는 가능한한 부지런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불교나 노장사상에서는 모든 것을 알려고 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일을 금기시 한다. 질문을 던지지 않는 행위가 반드시 어떤 신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유한하다. 그러니 우리는 던져야 할 질문을 던지기 위해 오히려 질문을 억압해야 한다. 떠오르는 질문을 모두 던지기 보다는 이것이 왜 필요한 질문인가를 생각하고 그 질문에 반응해야 한다. 적어도 느리게 반응하면서 살아야 한다. 대부분의 질문은 한 호흡을 쉬고 돌아보면 그다지 던질 필요가 없는 질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안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그걸 근면하다고 생각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거기서 멈추면 다행이다. 애초에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을 부질없이 나눠서 싸움을 시작하고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예는 여러가지가 있다. 한국 사람만큼 누굴 만나면 나이나 학번이 얼마냐, 직업은 뭔가, 어디에 사는가등 질문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사람도 없다. 명절이면 집요하게 취직이며 결혼이야기를 묻는 사람도 많아서 그것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질문을 던져대는 것을 친근감과 관심의 표현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런 질문때문에 쓸데없는 차별과 선입견을 만들고 파벌을 만들게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학교나 회사에서 쓸데없이 부모 직업이나 재산 혹은 본적이 어딘가 따위를 수집하는 일은 전에는 아주 흔했고 지금도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전에 내가 직접 겪은 일로는 어떤 대학에서 교수를 뽑는 데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정보가 정말 꼭 필요한 것일까?

 

아무래도 요즘 시국에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국민의 대다수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원하고 있다. 우리는 이 것을 또 다른 예로 삼아 이 일속에서도 이유를 묻지 않는 지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 상황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박근혜가 추하다고 느낀다.

 

다시말해 우리는 박근혜는 빨리 퇴진해야하고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하지 못하게 그 권력을 그녀로부터 빼앗아야 한다고 느꼈다. 적어도 거듭 반복된 여론조사가 말해주는 결과가 그걸 확인해 주고 있다. 요즘 시국에서는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을 미리 해두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분석하고 정리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미학적인 문제다. 장미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보다 그것이 왜 아름답냐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그런 분석이 쓸데없을 때 그것은 쓸데없는 짓을 넘어서 아주 멍청한 짓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추구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는 가장 단순한 이유를 들자면 우리가 법조문에 박근혜는 추하기때문에 퇴진하고 처벌받아야 한다라고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종국에는 이 모든 것이 역사가 되며 한국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해석되고 정리될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체험을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인식하고 소화하고 기록하고 교육해야 하며 인식에는 그것을 위한 기본적 틀과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또다른 최순실과 박근혜를 막기 위해 박근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합의에 이를 필요가 있다. 그걸 해내지 못하고 그 정리와 청산 과정이 또다시 혼돈만 남긴다면 우리는 미래에 또다른 최순실과 박근혜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왜 분노하는가, 우리가 왜 박근혜를 추하게 느끼는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국민의 분노는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지만 모두가 같은 이유로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같은 사람도 한가지 태도로만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의 분노들이 서로 다른 강도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때는 서로 충돌하면서 말이다. 이 충돌들은 우리에게 한국이 어떤 사회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사람들은 박근혜가 헌정이라고 부르는 시스템을 망가뜨린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것을 시스템적 분노라고 부르기로 하자. 시스템적 분노는 게임의 법칙을 무너뜨리고 반칙을 한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적어도 학교에서 배우고 헌법이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이며 민주사회란 국민들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곳이다. 설사 현실이 순수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세상에는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규칙은 있다. 사람들은 이 규칙이 깨지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오늘날 스스로를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분노하는 한가지 이유가 이것이다.

 

논리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은 현 정국을 주로 최순실 게이트라기 보다는 박근혜 게이트로 부르고 싶어한다.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는 인과관계의 고리속에서 박근혜를 첫번째 원인을 제공한 자로 파악하고 싶어하며 그래야만 박근혜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 방법에 따르면 최순실은 박근혜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중요해 진다. 그리고 이것은 아래에서 설명할 신분질서적 분노에서와는 상당히 다르다.

 

세상에는 또 다른 분노들이 있다. 따지고 보면 여러가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신분질서적 분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나는 아주 중요하게 느낀다. 신분질서적 분노는 한마디로 최순실이라는 흉한 인물최순실이라는 학벌도 없고 교양도 예의도 없으며 미신에 빠진 천한 인물이 대통령을 지배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분노는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최순실같은 사람에게 지배당했었다는 사실에서 주로 나온다. 속았다는 것이다. 부패나 헌법유린 자체는 이 분노의 중심이 아니다. 신분질서적 분노는 주로 인간이 서로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것같다. 이 분노는 박근혜가 최순실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최순실이 박근혜를 지배했으며 최순실은 추하고 어리석은 여자라는 것이 들어날 수록 강해 질 것이다. 최순실이나 박근혜가 우스워질 수록 이 분노는 강해지고 그들이 나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역시 알고 보면 굉장한 사람이다라는 식이 될 수록 이 분노는 약화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박근혜대통령이 최태민과 성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시스템적인 분노를 주로 가지는 사람은 섹스는 사적인 것이며 그것 자체는 개인의 권리라는 사고에서 즉 법규를 어긴 것이 아니라는 사고에서 분노의 확장을 자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분질서적 분노는 젊은 나이에 사교집단의 수장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어린 동생들마저 등져버린 어리석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엄청나게 확대될 것이다.

 

이밖에도 세월호 사건이나 국정교과서 문제등 특정한 사안때문에 박근혜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분노도 있을 것이고 국가나 대통령이 지켜야 할 위신이 있는데 한국과 한국의 대통령을 우스운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에 분노하는 감정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분노는 서로 서로 조금씩 다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우리의 감정과 체험을 정리해 나가려고 할 때 어떤 분노에 집중하는 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다. 여러 다른 분노들도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시스템적 분노와 신분질서적 분노는 상당히 다르다.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주로 이 다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 다름을 그냥 무시하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분노로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리려고 하면 모처럼 국가를 개혁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는데 그 에너지가 분산되어 흩어져 버릴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남겨야 할 것이고 어떤 공감대에 도달해야 할 것인가. 이 답은 정보의 시대, 망의 시대에서는 전과는 좀 다르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자체가 얼마안되던 시절, 정보가 아주 느리게 흘러서 사실 검증이 잘 안되던 시절에는 우리는 되도록 빨리 그리고 되도록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기록은 없어지고 사람들은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는 현실적으로 누군가가 기록한 역사가 진짜 과거를 대체해 버리게 된다.

 

반면에 비록 우리는 아직 그런 세상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것도 잊혀지지 않고 모든 정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섯부르게 그것을 압축하고 정리하여 어떤 개념의 상자속으로 우겨넣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보가 무한히 많다는 말은 미래의 사람들도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에 무한히 가까워 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직접 금강산에 가볼 수 있는데 금강산 여행기를 읽고 금강산이 이러니 저러니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왕을 쫒아 낸다고 할 때 반정세력은 언제나 하나의 답을 내놓고 그 답을 빨리 기정사실화해야 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그 답이 과연 얼마나 진실인가는 미심쩍은 데가 많다. 예를 들어 조선역사에서 폭군으로 기록된 군주는 정말 폭군이었을까? 이 군주는 이러저러해서 추하다라는 선언은 정말 옳은 것일까? 설사 옳다고 해도 그걸 일반 백성들이 검증할 방법이 있었을까?

 

그런데 요즘은 관심만 기울인다면 정보가 무한정 쏟아진다. 우병우나 김기춘이 어떤 사람인지, 최태민과 박근혜는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증언과 자료가 마구 쏟아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여전히 사태를 직접 경험하는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래의 정보를 어떤 사람이 단순하게 정리하고 그 사람이 그걸 보는 관점으로만 세상을 봐야 할 필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요즘 나는 재미있어 보이는 현상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정치권은 무력하며 아주 많은 유명인사들이 그다지 대단한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거나 거의 멍청한 언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반면에 거리에서나 인터뷰에서 일반 시민들이 내놓은 의견은 매우 공감이 가고 분명한 현명한 답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이것은 어떤 패러다임이 깨질 때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일반인들은 선입견이 없이 문제를 보고 있는데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너무 전문화된 사람은 그 패러다임이 만들어 내는 선입견에 더 중독이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가 오히려 더 바보같은 인식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을 보면 그들은 계산을 엄청나게 한다. 현 시국이 누구에게 유리할 까라는 계산도 하지만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면 예를 들어 하야 주장을 하거나 탄핵주장을 하면 일이 어떻게 벌어질까에 대해 자꾸 계산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해보기도 전에 이러저러한 것은 안된다고 단언하고 대안을 찾는데 뒤돌아보면 그저 평범하고 상식적으로 반응했으면 좋았을 것을 무리하게 추측하고 예측하려고 하다가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인상을 줄 때가 있다. 다음주도 예측을 못하는 사람들이 벌써 내년의 대선패권구도는 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까지 똑똑하지는 않아보이는데 말이다. 오히려 그런 예측과 단언이 화를 불러서 그 미래가 바뀌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까?

 

오늘날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는 훨씬 더 어렵고 어떤 사안에 대한 정보는 전보다 훨씬 많은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물어야 할 필요가 있는 질문이 아니면 묻지 않는다는 지혜가 훨씬 더 절실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박근혜가 추하다는 일차적 체험을 어떤 이데올로기 혹은 어떤 관점으로 정리하는 일을 서두를 필요가 없고 꼭 필요하지 않는다면 해야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부질없이 싸움을 만들어 낼 것이다.

 

박근혜는 추하다라는 체험을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에서 시작해서 정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으로 글이 끝이 나는 것같아 어리둥절한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진짜로 정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부분적으로는 정리하지 않는 것도 정리하는 방법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이 박근혜를 만들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거기에 다양성의 포용을 포기하고 뭔가 어떤 하나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 전체주의적인 생각이 그 핵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돌아보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증거는 넘치도록 많았다. 또한 가장 박근혜적이라는 것은 소통이 없으며 박정희시대에 대한 믿음에 맹신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가장 반하는 사고가 바로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배격하고 여러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는 망의 시대가 활짝 개화하는 시기에 가장 구시대적인 사고로 한국 사회를 이끌 임무를 맡았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지금처럼 깊은 병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검증시스템들은 다 망가지고 신뢰는 한없이 줄어들었다. 진실은 언제나 알 수가 없어서 별별 해괴한 음모론들이 다 퍼지게 만들었다.


만약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나오는 사회였다면, 사람들이 진영논리에 빠져서 자기편의 어떤 단점에도 눈감는 행태를 보이지 않았다면 박근혜는 검증 시스템을 통과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질문하지 않는 기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같은 이유로 해서 걸핏하면 나오는 야권단일화 주장도 이제는 과거로 흘러보내야 한다고 믿는다. 대중의 선택을 중간자들이 제약하고 정리하려고 하는 시도는 옳지 않다고 믿는다. 적어도 박근혜 이후에는 아니다. 시대가 확실히 바뀐 것이다. 

 

다양성을 보장하는 원칙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추하다라는 결론으로 충분하다면, 지금 당장은 박근혜를 퇴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 우리는 왜 박근혜가 추한가에 대해서는 가볍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차이를 발견하더라도 그걸 통합하고 같게 만들려고 하고 공식적으로 어떤 답이 절대라는 식으로 선언하려고 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의 머리속에 잇는 진리아래서의 통합을 추구하지 말고 다양한 사람들이 갈 수 있는데 까지는 그냥 같이 걸어간다는 자세여야 한다. 이것이 누가 쓰건 단하나의 국정교과서로 모든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나쁘다는 이유이기도 하지 않는가.

 

우리는 아직도 다름과 공존하는 것을 어색해 한다. 나는 꼭 필요하지 않는 것,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 지혜와 현 시국을 통해서 한국이 다름과 공존할 수 있는 사회로 변했으면 한다. 사실 묻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다르지 조차 않다. 구분할 필요가 꼭 있지 않은데 꼭 묻고 지적해서 분열할 필요는 없다. 한국은 당연히 시련속에 있다. 하지만 이 시련의 시기를 잘 지내고 나면 한국은 전보다 더 하나인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 하나인 공동체란 다 똑같아져서 하나인 공동체가 아니라 부질없는 질문으로 분열하지 않기에 생각과 행동이 다 다르지만 그래도 모두 자유롭게 하나로 살 수 있는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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