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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주병진과 성공한 삶

by 격암(강국진) 2017. 12. 25.

2017.12.25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 책상앞에 앉아보니 실시간 검색어 1등이 주병진이다. 주병진이 무슨 일을 했나 싶어 알아봤더니 그의 집이 방송을 탔는데 그가 후배 개그맨 박수홍에게 해준 조언이 화제가 된 모양이다. 나는 주병진을 피상적으로 안다. 그저 방송에 나오고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을만큼만 알 뿐이다. 그래서 주병진에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방송에 나와서 했다는 말이 계기가 되어 과연 합리적으로 산다는 게 뭘까하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걸 적어볼까 싶다.  

 

주병진은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음악다방 디제이 같은 것을 하다가 방송인으로 유명해진 그는 좋은 사람들이란 속옷 사업으로도 성공해서 돈을 모았다. 덕분에 지금도 2백평이나 되는 펜트하우스에 사는데 집값이 정확하진 않지만 50억에서 100억쯤 한다고 말해진다. 한때 주병진은 대단한 인기인이었다. 지금도 방송출연을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방송경력은 다끝나지 않은 셈이지만 그래도 최근의 방송출연은 그렇게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공한 사업가로 통하던 주병진은 여자문제로 크게 당한 적이 있다. 오랜간 법정투쟁을 해야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대중이 그를 결백함을 믿어주는 것같지만 그 기간을 거치는 동안 고생을 많이 해서 이제는 스스로 정신병력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다. 

 

말하자면 그는 여전히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할 만큼 평균이상의 부와 인맥을 가지고 사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하지만 60이 코앞인 그는 허망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병원에 갔을 때 보호자 이름을 쓰라고 하면 써넣을 보호자가 없다고 한다. 가난했던 그는 좋은 집에 살고 싶은게 꿈이었고 그래서 이제는 혼자 2백평짜리 호화판 집에 산다. 하지만 그렇게 외롭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는 결혼하지 않아서 혼자인 자신이 쓸쓸하다고 말한다.

 

그는 열심히 살았고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았으며 분명 성공도 했다. 박수홍은 그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 삶의 모순점은 똑같은 삶인데도 평가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삶의 대차대조표가 마구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즉 어떻게 보면 손해 안보고 이득을 크게 내며 살아온 인생인데 어느 순간 그 삶이 지겨워지고 그 삶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그간에 얻었던 것이 다 쓸모없어 보인다. 주병진은 어쩌다보니 가족없이 살아서 그 나이가 되었지만 반대로 결혼해서 가족에게 얽매이며 2-30년 살아본 사람들은 때로 결혼같은 거 안하고 살았으면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할 것이다. 다만 그런 생각을 입바깥에 내는 것은 다른 가족에게 미안한 일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잘 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사는 일은 이렇게 살아도 후회, 저렇게 살아도 후회라는 말을 하는 것같다. 

 

삶은 두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캠퍼스에 그림을 그리거나 돌에 조각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로 삶을 완성해 간다. 설혹 그런 구체적인 생각과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가치와 계획과 꿈에 따라서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관점에 따라 삶을 보고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혹은 본의아니게 이렇게 산다. 장인의 삶을 예찬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는 이런 삶이 생각난다. 사실 오늘날 삶의 상당부분은 결국 직업이므로 사람들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런 형태의 삶으로 말려들어가기 쉽다. 즉 우리는 하나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또하나의 방법은 그냥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일관성에 얽매이지 않고 그 때 그 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통상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삶의 방식이다. 오늘은 공무원하다가 내일은 장사하고 모래는 여행을 떠나는 그런 삶이다. 합리성이란 결국은 일관성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관성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모하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비판받기 쉽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되돌아 보면 저절로 어떤 일관성이 보이게 될 수 있다. 그냥 막 사는게 아니라 내 안의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내 안의 누군가가 무슨 의도로 그런 주문을 하는가를 모른다. 그래도 그 누군가는 아직 내가 모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지나고 나면 아 그래서 내가 그랬었구나 하는 엉뚱한 답을 얻게 될 수도 있다.

 

합리적인 삶이란 그럴듯하고 멋지지만 함정이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주변에다 테두리를 치고 그 바깥을 보지않고 살겠다는 식이 된다. 아직 겪어 보지 않은 미래를 우리는 아는 척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면 계획이란 불가능하다. 내일 서울로 갈지, 뉴욕으로 갈지 모르는데 여행계획이 있을 수는 없다. 이 테두리는 우리 의식의 테두리다. 일단 이렇게 테두리를 분명하게 하면 우리 계획과 판단을 평가할 수 있고 따라서 그 합리성도 분명히 보인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이것은 감옥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의식은 성장 변화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나는 이미 계획을 세운 나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초등학생이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살겠다고 하면 말도 안되는 엉터리 삶을 살 것이다. 그런 삶은 초등학생의 의식속에 갇히는 것이다. 초등학생이 선택한 것에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건 대개 불가능한데 아직 가진게 없는 초등학생의 삶은 자꾸 외부의 무언가로 인해 깨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계획은 자꾸 틀어지고 만다. 우리는 계획을 다시 세우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좀 더 어른이 되고 좀 더 가진게 많아지면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삶을 누군가가 깨지 못할 정도가 되면 우리는 자기의 삶속에 스스로 갇힐 수가 있다. 일단 그렇게 되면 모든 게 합리적인데 삶에는 더이상 성장과 재미가 없다. 자기가 만든 틀을 버리기는 너무 위험하고 아깝지만 이런 삶속에서는 모든 것이 점점 의미를 잃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저 죽을 때를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만다. 작품을 완성하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삶이란 당연한 선택인 것같지만 이런 함정이 있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그것을 자신의 삶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어떤 사람은 너무 일찍 자기 삶에 갇히고 그것은 비극적이지만 비극은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한히 커져나가려는 노력만 하다가 아무 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하고 마는 사람도 많다. 인간은 어차피 무한대로 클 수는 없고 무한정 살 수도 없으며 체력도 건강도 한창 때 같을 수는 없다. 이렇게 방황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일찌감치 작은 소품같은 삶을 하나 완성하는게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할 법하다. 아무 것도 형태를 갖추지 못했는데 삶이 끝나간다는 것은 쓸쓸한 것이다. 

 

우리는 절반만 그린 명작을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그저 아주 작은 소품을 완성하고 죽기만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하질 말아야 할까. 사람은 언제 죽을지, 언제 자신이 어떤 재료를 가지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인생이란 그래서 합리적일 수가 없다. 좁쌀같은 인생을 자랑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바람처럼 떠돌기만 하는 삶도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합리적으로 살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의 삶이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 그것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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